제31장 황산벌 3
군사를 인솔해 나갔던 흠순과 품일은 수많은 부하들을 잃고 간신히 처음 병영을 설치했던 곳으로
돌아오자 눈에 불을 켜고 남은 군사를 소집했다.
“우리가 패한 것은 적을 너무 가볍게 보았기 때문일세.
이번엔 놈들의 유인책에 말려들지 말고 벌판 초입에서 결판을 지어보세.
나는 우측을 상대할 테니 자네는 좌측을 맡게.
한바탕 결전한 뒤엔 중앙에서 모여 다시 좌우로 번갈아 공격하기를 되풀이한다면
이번처럼 패하지는 않을 것이네.”
흠순의 말에 품일도 분기를 참지 못하고 대답했다.
“깊이 들어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적이 이미 3영을 설치해 번갈아 치고 빠지는 계책을 쓰니
먼저 한 곳을 집중 공격한 뒤 차례로 3영을 무너뜨립시다.”
두 사람은 전략을 의논한 뒤 각기 군사를 인솔해 좌우로 흩어졌다.
신라군이 양쪽으로 군사를 갈라 나오자 계백은 10군의 장수 세 사람을 불러 말했다.
“이제 저들이 쓰려는 계책은 우리의 힘을 좌우로 분산시키려는 것이다.
이를 알고도 어찌 당하겠느냐?”
그는 수미(首彌)와 진사(眞沙)에게 각각 1천 군사를 배정한 뒤 말을 이었다.
“너희는 좌우에서 적을 상대하다가 흩어지지 말고 도리어 벌판 안쪽으로 사력을 다해
신라군을 끌고 들어오라.
넓은 들에서 싸울 때는 바깥을 막아서면 상대는 저희끼리 부딪히지 않으려고 안쪽으로 모이게 마련이다. 교전이 시작되면 군사를 점차 종렬로 늘여 세우되 앞의 군사는 뒤에서 돕고 뒤쪽 군사는
다시 앞으로 보낸다면 띠처럼 적을 에워쌀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계백은 백량에게 말했다.
“너는 나머지 3영의 군사를 총동원해 수미와 진사가 끌어 모은 적의 한복판을 쏜살같이 치고 지나가라. 좌우 협공을 막는 길은 그것뿐이다.
다만 적군이 흩어지는 것은 쫓아가거나 막지 마라.
한번 흩어진 군사는 그대로 두면 달아나지만 뒤를 쫓거나 막아버리면 다시 뭉칠 수 있다.”
두 번째 교전이 시작되었다.
보폭과 간격을 넓게 벌린 신라군은 좌우에서 백제군과 만나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이들을 바깥으로 몰아내려 애를 썼지만 웬일로 백제군은 쫓기는 형세를 취하고도
도리어 바깥쪽을 지키고 막아서는 눈치였다.
이는 사통팔달의 허허벌판에서는 상식에 어긋난 반응이었다.
당초 신라군은 백제가 처음처럼 자신들을 3영이 있는 황산 깊숙이 유인할 거라 예상했다.
그러므로 좌우에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상대를 밖으로 내몰면 쫓긴 자들이 얼마만큼 달아났다가는
다시 한사코 중앙으로 모여들 거라 추측했다.
하지만 정작 백제군은 처음부터 기를 쓰고 밖을 막아섰다.
더구나 그렇게 띠처럼 둘러싸서 외곽을 차단하는 백제군의 숫자는 어림잡아 2천여 기,
신라군에 비하면 절반에 불과한 적은 무리였다.
적은 무리로 많은 군대를 바깥에서 에워싼다는 것도 신라군이 보기엔 엉뚱한 반응이었다.
모든 것이 상식과 예측을 빗나가니 신라군들로선 차츰 어이가 없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황산 쪽에서 수많은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와 중앙을 급습하자
신라군들은 또다시 도탄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사정은 유인책에 말렸던 첫 번째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궁지에 몰린 신라군은 지난번의 패전을 떠올리며 급격히 기운을 잃어갔고
백제군의 기세는 더욱 거세게 살아났다.
드넓은 벌판에서 맞붙은 두 번째 교전에서도 신라군은 여지없이 참패했다.
이번에도 사상자는 1천여 명, 들판에 처참히 나뒹구는 무수한 사람과 말의 시체는
대부분 신라군의 것이었다.
“계백이란 장수는 가볍게 볼 인물이 아닙니다!
후군이 당도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품일의 탄식에 흠순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선군의 사기를 꺾어놓은 것이 무엇보다 큰일이오.
저런 장수가 셋만 있어도 백제를 멸하기란 어렵지 싶소.”
연거푸 패퇴하여 혼비백산한 두 장수는 화를 낼 기운마저 없었다.
이들은 위용을 뽐내며 황산벌에 나타났을 때와는 달리 10여 리나 거리를 물려
병영을 꾸미고 후군을 기다렸다.
선군이 지나간 길을 따라 백성들에게 선심을 쓰고 인심을 베푸느라
후군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나 늦게 황산에 당도했다.
비장 김문영을 데리고 뒤늦게 도착한 유신은 자신의 아우와 품일 로부터
뜻밖의 사태를 전해 듣자 직접 말을 타고 나가 계백이 설치한 황산의 병영을 살펴보았다.
“저것은 병법과 용병을 잘 아는 장수가 꾸며놓은 군영이다.
저 철옹의 산거 진은 만군으로도 깨뜨릴 수 없다!”
적세를 보는 순간 유신이 크게 한숨을 쉬며 단언했다.
장수들이 궁금해 하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흔히 이와 같은 지형에서 쓸 수 있는 진지의 형태엔 세 가지가 있다.
적이 만일 우리의 선봉을 꺾어 사기를 무너뜨릴 생각으로 합수 진을 쳤다면 이쪽의 군사가 많으니
규진 법이나 곡차 진으로 응수하면 된다.
잡초가 무성한 황산 서편으로 위이진 을 쳤다고 해도 정병을 선봉에 배치해
추행 진으로 뚫고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적장이 쳐놓은 진지는 황산 등성이의 굽은 곳을 의지한 산거진이다.
산거진도 보통의 산거진이 아니라 3영의 간격이 3각을 이루어 각각의 거리가 자로 잰 듯이 같고,
평지와 언덕을 서로 엮어 태극의 삼혈을 이뤘으니 앞으로 들어가면 뒤에서 죽고
옆을 치면 가운데에서 당하게 마련이다.
3영의 군사는 한 곳에 고정되지 않고 장수의 명령에 따라 좌로 돌기도 하고 우로 돌기도 하는데,
하나가 나와서 치고 달아나면 이내 좌측 병영의 군사가 뒤를 치고,
뒤를 막으면 다시 우영(右營)의 군사가 반대편에서 칠 수 있으므로 저 계략에 말려들면
마치 사방에서 적이 나오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질 것이다.
병서에서 읽기로 옛날 월왕 구천이 5천 군사로 오나라의 70만 대군을 무찌를 때
저와 같은 진법을 구사한 일이 있다고 했는데, 계백이란 장수가 반드시 이를 알고 있는 듯하다.
그가 만일 탄현 고개에서 저 진법을 구사해 아군을 막았더라면 우리는 절대로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유신의 설명을 들은 장수들은 한결같이 난감한 표정들이 되었다.
“아직 북쪽에서 천존 장군과 죽지의 군대가 오지 않았으니
그들을 기다렸다가 함께 밀어붙이면 승산이 있지 않겠습니까?”
흠순이 안을 내자 유신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방법이야 그뿐이지만 아군의 희생이 얼마나 크겠느냐?
이미 두 차례나 참패한 우리 군사들의 사기도 걱정이려니와
지금쯤은 적군의 기고만장함도 극에 달했을 것이다.
싸움은 사기로 하는 것인데 아무리 이쪽에서 대군을 동원해도
저쪽의 달아오른 사기를 꺾기 힘들 테니 그게 걱정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황산을 통하지 않고는 은진으로 갈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날은 7월 초아흐레,
당군과 만나기로 약조한 날을 꼭 하루 남겨두고 있었다.
중식 때가 지나자 황산벌 북쪽에서 천존과 죽지의 군대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이들은 탄현과 진현 고개를 넘자마자 충상과 자간, 무수의 군대를 만났다.
그러나 백제군은 이미 싸울 태세가 아니어서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좌평 충상과 은솔 무수는 천존의 회유하는 말에 순순히 투항했고,
도살성에서 전사한 자견의 아우 자간도 처음엔 한바탕 죽지의 군대와 싸움을 벌였지만
세력이 다하자 이내 백기를 들고 항복해버렸다.
천존과 죽지가 합류하자
유신은 장수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둔덕에 설치한 백제군의 3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군사를 3패로 나눠 하나씩 맡아 치는 수밖에 없다.
천존은 좌영을, 죽지는 우영을 공격하고 품일과 흠순은 가운데를 치되,
각자가 맡은 곳만 상대하지 서로를 돌아보거나 협력하지 말라.
어떻게든 적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막고 세가 불리해지면 차라리 뒤로 후퇴하는 편이 낫다.
지금 군사를 갈라 나가되 그 전에 내가 계백이란 장수를 만나 설득해보겠다.
3번 나팔을 불면 공격을 시작하라.”
말을 마치자 유신은 투구도 쓰지 않은 채로 혼자 백설총이를 타고 벌판으로 나갔다.
젊어서는 검다 못해 푸른빛마저 돌던 그의 머리털과 수염이 어느덧 은발이 되어 바람에 휘날렸다.
백발 노장이 별다른 무기도 없이 필마단기로 나오자 계백은 그가 김유신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내 말을 가져오라.”
부하들이 계백의 애마인 담가라를 대령하자
그 역시 특별한 군장도 갖추지 않고 훌쩍 말 잔등에 올라탔다.
그제야 부하들은 계백의 뜻을 알고 앞을 다투어 만류했다.
“김유신은 늙고 교활한 자입니다!
장군께서 혼자 나가셨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뒤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나가지 마십시오!”
그러나 계백은 태연하게 웃으며 부하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허허벌판에 꿍꿍이가 있을 까닭이 없다.
적장을 상대하는 예는 따로 있으니 그대들은 과히 염려하지 말라.”
개미 떼처럼 수많은 적병을 눈으로 보고도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듯했다.
실로 두둑한 배포요 만군을 상대할 기개가 아닐 수 없었다.
두 장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그들의 등 뒤에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말하면 각자의 군사들이 있었고,
눈에 뵈지 않는 것으론 7백 년 사직의 명운이 걸려 있는 셈이었다.
먼저 인사를 건넨 쪽은 유신이었다.
“계백 장군이시오?
늙은이를 만나러 이렇게 나와 주니 고맙소.”
유신이 마치 오랜 지기를 만난 듯 반갑게 웃음을 짓자
계백도 마상에서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오랜만이외다.
도살성에서 싸울 때 먼발치에서 뵌 일이 있는데
그때는 사정이 워낙 다급해 장군의 명성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허, 그랬던가요? 명성이랄 게 무에 있겠소,
나는 그저 부하들이 세운 공으로 허명만 높아진 계림의 평범한 노인일 뿐이지요.”
유신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춰 대답한 뒤 사뭇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장군의 고매한 우국충정은 이만하면 천하에 알려졌고 두 번에 걸친 용맹과 지략은
우리 5만 군사를 두려움에 떨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소.
백제와 신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서로 국경을 접하고 이웃나라로 지내왔으나 근년에 이르러
다툼이 잦고 백성들이 많이 상하므로 어느 한 나라가 다스리는 것만 같지 못하게 되었소.
임금을 위하고 사직을 보존하려면 마땅히 장군처럼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싸워야 하겠지만
잠시 눈을 돌려 백성들을 보시오.
내 가계는 삼한에서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금관의 망국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지금은 계림의 신하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상신이 되어 나의 열성조를 멸한
신라 조정과 왕실을 섬기고 있소.
생각해보시오.
사직이 무엇 때문에 있고 임금이란 또 무어요?
태초에 삼한 땅이 솥발처럼 나뉘지 않았더라면 장군과 내가 이처럼 군대를 이끌고
불행하게 만날 리 없고, 오히려 한 사람의 임금 밑에서 서로 형제처럼 지내며
충절을 다투었을 게 아니오?
우리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고한 백성들을 털끝 하나 손상시킨 일이 없소.
성문을 열지 않으면 밖에서 종일 기다렸고, 쌀 한 됫박도 허락 없이 취하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백성을 중히 여긴 때문이오.”
유신은 잠시 말허리를 끊었다가 호소하는 눈빛으로 계백을 쳐다보았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시오.
그대가 서라벌에 오지 않고 내가 황산에 와서 우리가 만난 것은
양국의 일기가 서로 다르듯 금일의 시운과 일진이 백제에 불리한 탓이지
그대가 못났고 내가 잘나서가 아니오.
신라 사람의 목숨이나 백제 사람의 목숨이나 중하기는 한가지인데
우리가 피를 흘리며 싸워봤자 피차 무슨 이득이 있겠소?
어차피 결론은 났지 싶소.
감히 청하건대 장군은 당대, 한 사람을 섬기는 장수가 되지 말고
부디 장래의 천추만대와 수백만 백성들을 생각해주오.
그것이 일평생 사람 죽이는 일로 싸움터를 전전한 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청이외다.”
유신의 말투는 매우 간곡했다.
마상에 앉아 묵묵히 듣고 있던 계백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장군의 말씀은 잘 알아들었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난들 어찌 금일의 형세를 읽지 못하겠소?
그러나 장군이 신라인으로 가야 할 길이 있다면 나 역시 그러하오.
우리의 처지가 서로 다른 것은 장군과 내가 타고 나온 말의 털 빛깔만큼이나 확연합니다.”
그러고 보니 김유신의 애마는 눈처럼 희고 계백의 가라말은 돌처럼 검었다.
“번창할 때만 나라를 섬기다가 기우는 사직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오.
사직지신(社稷之臣)이란 나라가 망할 때도 맡은 바 소임이 따로 있는 법이외다.
더구나 나는 3망의 도리를 실천하기 위해 이미 내 손으로 처자를 죽이고 나온 몸이오.”
유신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새삼스레 계백을 쳐다보았다.
계백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나라는 스러져도 사람은 남고,
사람은 죽어도 이름은 남는다고 했소.
비록 스러질 사직이요 없어질 나라일지언정 백제 사람의 기개만은 훗날까지 남겨야 하지 않겠소?
장군께서 기왕 원대한 뜻을 품고 예까지 나왔으니 나를 넘어서 지나가시오.
그것이 처음부터 나라를 달리하여 태어난 우리 두 사람의 소임이 아닐까 합니다.”
계백의 뜻은 확고했다.
유신은 말로써 그를 회유할 수 없음을 알았으나 애석한 마음만은 쉽게 지우지 못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겠소?”
유신이 안타까운 얼굴로 묻자 계백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다고 판단한 유신은 말머리를 돌리려다 말고 다시 계백을 돌아보았다.
“언제든 마음이 바뀌거든 백기를 들고 투항하구려. 아니 백기가 아니라도 좋소.
징소리만 울려 신호를 주오.”
그러자 계백은 잠시 묘한 표정을 짓고 유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끝내 아무 말 없이 그냥 돌아섰다.
유신이 진중으로 돌아오자
곧 취의 신호가 황산벌을 울리고 신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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