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황산벌 1
이때까지도 백제 임금 의자는 나당 연합군의 거병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당이 미리 손을 써서 숙위사인 복신을 가둬버렸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서 3월에 낙양에서 조칙으로 징집령이 내렸을 때 복신은 아무래도 낌새가 수상해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등주와 내주에서 수백 척의 전선을 만든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는 급히 본국에 심부름꾼을 보내 전란에 대비할 것을 말했으나 임금은
복신(扶餘福信)의 우려를 기우로 간주하고 이를 무시했다.
당이 고구려를 놓아두고 백제를 칠 리 없다는 게 의자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는 복신이 보낸 사신에게 전후시말을 꼬치꼬치 묻고 나서,
“어디로 군사를 낼지는 아직 모릅니다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시라는 게 복신공의 전언입니다.”
하는 말을 듣자,
“당나라는 사방에 적을 깔아두고 있다.
낙양에 징집령이 내리고 등주와 내주에서 전함을 만든다고 그때마다 우리가 긴장한다면
불안해서 당최 어떻게 산단 말인가?
그러잖아도 근년에 민심이 부쩍 흉흉해져서 근거도 없는 온갖 말들이 나도는데
그 근원을 따져보면 죽은 성충이 전란을 겪을 거라고 공연한 소문을 퍼뜨려
백성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말이 아니면 더 이상 백성들을 불안하게 만들지 말라.
고구려 하나도 상대하지 못해 쩔쩔매는 당나라가 미쳤다고 우리를 친단 말이냐?”
하고 복신의 전갈을 무시해버렸다.
안심하고 지내던 의자가 비로소 사태를 알아차린 것은 덕물도에서 신라군과 군기 약정을 마친
소정방이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백제 해역으로 들어선 직후였다.
확고했던 신념이 너무도 어이없이 무너진 탓일까.
급보에 접한 의자는 한동안 별로 놀라지도 않은 채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망연히 허공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난리가 난 것은 대신들이었다.
“마마, 큰일 났습니다!
당나라 전함과 신라 선박이 서해 바다를 새카맣게 뒤덮어 물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 수군들은 수평선을 가린 적선들만 구경할 뿐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해역에서 비보가 날아든 것과 거의 동시에 서쪽 육로에서도 신라군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가 솟고 얼마 안 있어 사색이 된 전령이 당도했다.
“신라군 수만이 벌 떼같이 국경을 침공하고 있나이다! 어서 군사를 동원해 이를 막아주소서!”
의자는 그때까지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털끝만큼도 대책을 세워두지 않았으므로 갑자기 묘안이 떠오를 리 만무했다.
평시에 온갖 비상한 지략으로 정적(政敵)을 음해하고 정사를 떡 주무르듯이 주물러온 왕비와
그의 측근들 역시 정작 대란을 만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야단법석만 떨 뿐
나라를 구할 방법이 없기는 임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하, 이제라도 늦지 않았나이다!
흐려진 성총을 바로잡고 시급히 중지를 모아 나라와 백성을 구하옵소서.
유구한 7백 년 사직이 대왕전하의 한 마디에 달려 있나이다!”
무기력한 임금을 일깨우려 한 이는 좌평 정무였다.
그러나 정무의 간언에도 의자는 아무 응대가 없었다.
정무의 뒤를 이어 좌평 의직도 안을 내었다.
“당병은 멀리 바다를 건너와서 지쳐 있을 게 분명합니다.
더구나 당은 본래 수군이 허약한데 수천 척의 배에 사람을 싣고 왔다면 배에 탄 자들은
대부분 물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고, 배를 타고 오는 동안 줄곧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들이 처음 육지에 내려 미처 기운을 차리지 못했을 때 군사를 내어 급히 공격하면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서쪽의 신라군은 대국의 원조만 믿고 출정했을 것이니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당군이 불리하게 된다면 미리 겁을 집어먹고 감히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게 뻔합니다.
먼저 군사를 해안으로 내어 당군과 결전하는 것이 옳습니다.
윤허해주옵소서!”
의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솔 상영(常永)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군은 멀리서 쳐들어왔으므로 한시라도 빨리 싸우려고 들 것이니
우선 그 예봉을 피하는 게 유리합니다.
그에 비하면 신라군은 앞서 여러 차례 우리와 싸워 패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동원해 위엄을 갖추고 나간다면 그 병세(兵勢)만 바라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에 쓸 계책은 당인의 길을 막아 피로함을 기다리고,
먼저 일부 군사로써 신라군을 들이쳐 그 예기를 꺾은 연후에 적당한 기회를 보아 합전(合戰)하면
군사도 온전히 보호하면서 아울러 국가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통촉하옵소서!”
의직의 주장은 당병과 먼저 싸우되 단기간에 끝장을 보자는 속전 쪽이었고,
상영의 주장은 신라군을 먼저 상대하되 가급적 시일을 끌어보자는 장기전이었다.
두 계책은 양인의 성격처럼 정반대였다.
그 뒤로 천복과 임자를 비롯한 몇몇 신하들이 뜻과 말을 보탰으나 대개는
의직과 상영이 말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논쟁이 뜨겁게 전개되는 동안 줄곧 편전의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의자가 드디어 입을 열고
깊은 한숨을 토했다.
“내 한 번도 조공을 거른 일이 없거늘 낙양의 더벅머리 아이놈이 어찌 이리도 무례하단 말인가……”
그는 제일 먼저 당주 이치를 원망했지만 이미 덧없는 푸념에 불과했다.
임금은 신하들의 논쟁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선뜻 결단하지 못했다.
의자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즉위 초만 해도 만인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고,
선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신묘한 계략으로 번번이 신라를 쳐서 위세를 떨치고
국토를 넓혀온 강군이었다.
하지만 불과 20년 만에 그는 이처럼 달라져 있었다.
하루아침에 돌변한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달라져서 급기야는 적군이 코앞에 당도하도록
아무 전략도 세우지 못하는 천하의 무능한 군주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백제의 안타깝고도 슬픈 실상이었다.
한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의자는 시립한 내관 하나를 불러 말했다.
“너는 지금 고마미지현 으로 가서 흥수에게 사태가 위중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보고 오라.”
수많은 중신들과 근 1백 명에 달하는 처자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위급한 순간이 오자
그는 귀양을 보낸 흥수를 찾았다.
이 또한 따지고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처사였다.
백척간두의 위기로부터 필생(必生)의 묘책을 물을 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죄를 사하고 귀양지에서 대궐로 시급히 불러와야 옳았다.
그럼에도 의자는 흥수의 뜻만 물었을 뿐 그의 고단한 처지는 헤아리지 않았다.
대궐에서 내관이 나와 긴박한 사정을 전하고 의향을 묻자 흥수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붓을 들었다.
당나라 군사는 원래 숫자가 많기도 하지만 군율과 기강 또한 엄정하기로 정평이 난데다
신라와 공모하여 기각지세(埼角之勢)를 이루었다고 하니 만일 평원이나 광야에서 대적해 싸운다면
승패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요로(要路)는 백강 하류의 기벌포와 탄현이니
그 두 곳의 길목에서는 장부 하나가 창 한 자루를 들고 있어도 만인이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용사를 뽑아 앞서 말한 두 길목을 굳건히 지키십시오.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한 뒤
성문을 굳게 닫고 엄중하게 지키다가 저들의 군량이 다하고 군사들이 피로해졌을 때
급히 우리 군사를 내어 분격한다면 반드시 양적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전날 죽은 성충이 이미 글로써 아뢴 그대로입니다.
햇수로 4년째 귀양을 살고 있었지만 흥수는 충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쏟아놓았다.
내관이 흥수의 글을 받아 대궐에 이르자 의자는 그 내용을 읽어본 뒤 중신들에게 전했다.
그런데 속전을 주장하던 신하들이 흥수의 주장에 의문을 달고 나섰다.
“아룁니다. 흥수는 오랫동안 유배 중에 있어 대왕을 원망하고 나라를 진심으로
걱정하지 않을 게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위급한 때에 어찌하여 그런 자의 의견을 쓰려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당병들이 설혹 백강을 거슬러 올라온다 해도 역류하는 강물에
배를 마음대로 부리지 못할 것이요,
신라군 역시 탄현을 넘더라도 길이 좁아서 군마를 벌려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이들에게 길을 내주었다가 적당한 곳에서 몰아친다면 울안에 들어온 닭을 잡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줍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이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단합하지 못하고 서로를 의심하는 백제 조정이었다.
임금은 속전을 주장하는 신하들의 논리에 차츰 수긍하기 시작했다.
그는 적당히 두 의견의 중지를 모아 기벌포와 탄현에 방어선을 구축하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백강 중류인 가림군(加林郡:서천) 남쪽 물가와
황등야산(黃等也山:논산)을 최후의 보루로 삼도록 하고
의직, 임자, 충상, 정무, 자간(自簡), 계백, 상영과 무수 등의 장수들에게
도성의 군대를 총동원하여 적을 막도록 지시했다.
이에 의직과 임자, 정무와 상영 등은 5부의 군사를 나눠 가림 군으로 향하고
충상과 자간, 계백과 무수 등은 신라군을 상대하러 동쪽으로 향했다.
이때 백제 도성의 군사는 대략 8만 명쯤 되었다.
그런데 정작 왕명이 떨어지고 5방(方) 각부에서 방진과 방좌, 10군 장수들을 전부 소집하니
모여든 군사가 고작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둘 가운데 하나는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자
싸우기도 전에 달아났고, 나머지 군사들도 마지못해 소집령에 따르긴 했지만
결전의 각오 같은 것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창칼을 비스듬히 들고 나온 군사들은 한결같이 뒷짐을 지거나 팔짱을 끼고 서서,
“서자 좌평이 41명이나 되니 그들에게 막으라고 하지 그러시오?”
“3천 궁녀를 풀어 적장들을 녹이는 건 어떠하오?”
“우리가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싸워야 하는지 어디 높은 분네들 얘기나 한번 들어봅시다!”
하며 야유 섞인 고함을 질러댔다. 군사들뿐 아니었다.
도망간 자 가운데는 10군 장수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고,
더 위로 올라가면 임자나 충상 같은 좌평들 또한 이런 병세(兵勢)를 가지고 제대로 싸움이 될까
의구심만 일었다.
임금과 조정에서부터 비롯된 불신과 반목의 여파가 군사와 백성들에게 전해지지 않을 리 없었다.
달솔 계백의 군사들도 처음에는 그랬다. 계백은 성충이 살았을 때 유독 아끼던 장수로 움직임이
크고 힘 있는 그의 검법은 성충으로부터 달관과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찬사를 받곤 했다.
그는 나이 열일곱에 무관이 되었으나 팔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로 지방의 병영과
사군부(司軍部)의 편장으로 떠돌다가 거의 마흔이 가까워서야 서울에 와서 방군(方郡)의 장수가 되었다. 을사년(645년)에 성충은 보군 2천과 계백의 마군 1천기만을 데려가서 단 하루 만에 신라의
우술군(雨述郡:대덕, 유성)을 빼앗고 임금의 신임을 되찾은 일이 있었는데,
그 뒤로 누가 성충의 신묘한 계책을 칭찬하면,
“그것은 계백이란 장수가 있어 가능했던 일이지 나 혼자 힘으론 어림도 없었소.
계백은 내 아우 윤충 같은 이와는 비할 바가 아니오.
그가 지금까지 향리의 한직으로만 전전한 까닭은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나라의 그릇된 제도와 권문세가의 막대한 입김 때문이오.
신라엔 골품이 있어 재인(才人)과 용장(勇將)의 출세를 가로막는다던데
우리 백제엔 팔성의 단합된 권세가 그에 못지않소. 계백은 빈틈없는
출장입상(出將入相)의 재목이오. 뒷날 계백이 재상이 되면 그땐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강국이 되어 있을 테지만 그와 같은 인재가 끝까지
마군의 장수로만 썩는다면 국사도 순탄하지 못할 것이니
계백의 앞날로 사직의 운명을 점쳐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거외다.”
하고 이름 없는 장수 계백을 입버릇처럼 높여 말하곤 했다.
성충이 말한 대로 계백은 무예뿐 아니라 병법과 용병에도 탁견이 있어
가히 문무를 겸전한 보기 드문 장수였지만 성충이 그토록 자랑하지 않았다면
은솔, 달솔로 등용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성충이 죄를 받아 죽기 직전인 을묘년(655년) 봄에 두 사람은 자칫 사돈의 인연까지 맺을 뻔했다.
계백의 큰딸이 아버지를 닮아 키가 크고 인물이 고왔는데 성충이 자신의 막내아들 배필감으로
벌써부터 눈도장을 찍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까지 받아놓은 그 혼사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성충의 변고로 무산되고 말았다.
성충이 옥사하자 계백은 딸을 파혼시키고 매정하게도 성충의 장례에 문상조차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주위에서는 계백이 배은망덕하고 야비한 인물이라고 욕하는 자가 많았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성충의 아들과 정혼했던 딸조차도 아버지를 비난하며,
“천금보다 중한 것이 약조라고 늘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어찌하여
시정의 잡배보다 못한 처신을 하시는지요?”
하고 따졌지만 계백은 어쩐 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네가 뭐라고 해도 좋지만 혼사만은 안 된다. 그런 줄 알아라.”
하고 단호한 자신의 결심만을 밝혔을 뿐이었다.
성충이 죽고 나자 낙담한 흥수가 한때 물러나려고 마음먹은 뒤
이를 정무에게 가만히 말했는데, 계백이 정무로부터 우연히 이 말을 듣자
밤에 변복을 하고 흥수의 집을 찾아갔다. 이때만 해도 흥수 또한 계백을
야박하고 몰인정한 인물로 여겨,
“자네가 내 집에는 어인 일인가?”
찾아온 사람을 안으로 불러들이지도 않고 마당에 세워둔 채 물으니 계백이 허리를 굽혀 절한 뒤,
“세상에는 큰 도리와 작은 도리가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큰 도리란 마음을 읽는 것이고,
작은 도리란 말과 표정을 읽는 것입니다.
지금 좌평께서 상좌평의 일로 낙담하여 물러나신다면 작은 도리는 지킬지언정
큰 도리는 지킬 수 없습니다.
상좌평이 계시지 않는 조정에 이제 대감마저 물러난다면 가뜩이나 어지러운 나랏일을
누가 제대로 보살피겠습니까?
이는 필경 돌아가신 상좌평께서도 원하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하고 말하는데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옷깃을 적셨다.
흥수는 그제야 계백이 큰 사람인 것을 알고 안으로 청하여 밤새 술을 마셨다.
그가 새벽까지 한 말은 주위에서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자신은 성충이 다하지 못한 일을
반드시 하겠다는 것이었다.
적이 쳐들어오고 국운이 간두지세에 처한 그 위급한 순간에도 임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신하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니
그 참담한 조정 공론을 지켜보는 계백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
비록 적병의 숫자가 엄청나다지만 백강과 탄현의 지형지세를 잘만 이용하면
아주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도성을 중심으로 군신이 단결하고 합심해 장기전을 펴고,
적당히 틈을 보아 임금을 안전한 외곽으로 피신시킨 뒤 전국 각지의 향군들을 일으켜
적의 후미를 친다면 저 요동 벌의 고구려 군사들처럼 이번 기회에 오히려 거만한
당나라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고구려와 왜에 구원 군을 요청할 시간만이라도 벌자는 게 계백의 주장이었다.
그 어떤 동맹국도 스스로 망하는 나라를 돕지는 않을 것이므로 우선은 불시에 침략한 적을 상대하여
백제의 위용을 내보일 필요가 있었다.
7백 년 사직이 이렇게 망할 수는 없었다.
계백은 머리를 풀고 땅에 이마를 찧으며 장기전에 승산이 있는 것과 군신의 단합을 호소했으나
임금은 어이없이 유배 중인 흥수를 끌어들이고 결국은 어이없는 처사로 다시 흥수를 불신하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계백은 온몸에 와 닿는 섬뜩한 망국의 징후를 느끼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임금과 서로를 불신하는 신하들 앞에서 할복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의 옷자락을 끝까지 붙잡은 것은 죽은 성충의 손길이었다.
성충이 살아 있었다면 이럴 경우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왕명이 자신의 의사와는 다르게 결정된 뒤 그에게 배정된 방군의 군사 5천여 명을 모아놓고 보니
더욱 기가 막혔다.
군사들의 표정과 눈빛만 보아도 승패 따위는 대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장수였다.
병영에 모인 군사들은 하나같이 남들처럼 달아나지 못하고 재수가 없어
끌려나왔다는 듯한 얼굴이거나, 마치 남의 나라 전쟁에 동원된 듯한 태도였다.
뒷짐을 지거나 팔짱을 낀 채로 임금과 조정을 야유하고 빈정대는 그들에게서
결사항전의 분발을 촉구한다는 건 애당초 무리였다.
이런 군사들을 끌고 나갔다간 적장의 고함소리 한 번이면 모조리 새떼처럼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긴 그런 군사들만 나무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간의 악정과 실정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달아나지 않고 무기라도 손에 쥐고 나와 준 것이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계백은 잠시 깊은 상념에 잠겼다가 곧 휘하의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대궐 밖 4, 5리허인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대문 앞에 당도한 그는 군사들이 궁금히 여기는 가운데 말에서 내려 안장에 걸어둔 칼을 집어 들었다.
“지금 우리의 인력으로 당나라와 신라의 대병을 상대하려니 나라의 존망을 알 길이 없다.
만일 사직이 망하여 내 처자가 적들에게 붙잡히면 노비가 되기밖에 더하겠는가?
살아서 그들에게 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손에 죽기를 바랄 것이다.”
말을 마치자 계백은 성큼성큼 대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계백의 집 앞에 모여 있던 군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만 끔벅댔다.
처자를 죽이다니, 스스로 처자를 죽이다니……
모두들 설마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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