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황산벌 4
전투는 그로부터 밤을 넘겨 꼬박 하루 동안 계속되었다.
좌영을 공격한 천존의 군사는 백제군이 미리 파놓은 삼혈 가운데 하나인 깊은 구덩이에 빠져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우영의 죽지도 결사항전을 외치며 달려드는 백제군의 예봉에 혼쭐이 났다.
두 번씩이나 거푸 패한 흠순과 품일 만이 적군 3백여 명을 참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역시 그만큼의 아군이 희생되었으니 반드시 전과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바싹 약이 오른 신라군은 밤에도 횃불을 들고 나가 적진을 공략했다.
이번엔 천존이 좌영에서 적장 수미를 베고 병영을 불태웠으나 계백과 맞선 죽지의 군대가 크게 당했다.
아침이 되어 군사를 불러들였을 때는 1만 군사 가운데 돌아오지 못한 자가 무려 3천 명이나 되었다.
“큰일 났다.
당군과 약조한 날이 오늘인데 아직도 황산을 넘지 못했으니
소정 방이 무슨 트집을 잡고 나올지 알 수 없구나.”
유신은 난감한 얼굴로 한탄했다.
“많은 군사로써 적은 무리를 토벌하지 못하는 것은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몇 차례의 교전으로 기력이 다해 땅에 떨어진 아군의 사기를 되살릴 방도가 없으니
그것이 제일 큰 난제입니다.”
부하를 가장 많이 잃은 죽지도 땅이 꺼져라 깊이 한숨을 토했다.
신라군은 다시 10여 리나 더 물러나 병영을 꾸미고 아침밥을 지어 먹은 뒤 교대로 눈을 붙였다.
앞으로 나가도 부족할 판국인데 한번 교전이 끝날 때마다 번번이 뒤로 물러나는 꼴이라
장수들은 더욱 기가 막혔다.
“처음에 우리가 적을 너무 가볍게 보고 싸웠다가 패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흠순은 패전이 계속될수록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밥도 입에 대지 않고 잠도 자지 못했다.
남들이 코를 골며 잘 때도 그는 군막 한쪽에 우두커니 주저앉아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눈치더니 중식 때가 되어 군사들이 단잠에서 깨어나자 가만히 아들 반굴(盤屈)을 불렀다.
이때 흠순의 장자인 반굴은 나이가 19세로 화랑이 되어 낭도를 거느렸는데,
아버지의 가계를 닮아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스러웠다.
특히 그는 품일의 아들인 관창(官昌)의 낭도들과 무리를 지어 산곡간을 돌아다니며
곧잘 기예를 겨루곤 했다.
제법 기운깨나 쓴다는 신라의 풍월도 사이에선 백제를 토벌하러 임금까지 나선 이때의 사건이
큰 화젯거리였다.
천년 사직의 숙원을 푸는 장도(壯途)에 자신들도 참가해 하다못해 시석이라도 나르고 싶었던 건
어쩌면 훗날의 명장과 양신(良臣)을 꿈꾸는 화랑들에겐 당연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전국 2백여 풍월도 무리 가운데 화주(花主)를 통해 참전할 의사를 밝힌 화랑이 대략 30여 군(群),
아버지의 군대를 따라온 반굴과 관창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전쟁터에 나와 보니 소회가 어떻느냐?”
“장수들이 위대해 보이고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더욱 자랑스럽습니다!”
흠순이 다정한 어조로 묻자 반굴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어느새 불쑥 자라나서 아버지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있던 반굴이었다.
“그간 아버지가 공무로 바빠서 네가 갈고 닦은 무예를 눈여겨보지 못하였구나.”
흠순은 그렇게 입을 열었다.
“네 큰아버지는 옛날 낭비성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싸울 때 꼭 지금 너처럼 할아버지를 모시고
싸움터에 나간 일이 있었다.
그때도 우리 군사들이 어려움에 처하였는데 중당의 당주에 불과하던 네 큰아버지가
혼자 말을 타고 나가 적장 셋을 차례로 베어 단숨에 전세를 뒤집고 그 여세를 몰아
낭비성을 손쉽게 공취하였다.
자고로 신하 노릇을 하는 데는 충(忠)이 제일이고, 자식 노릇을 하는 데는 효(孝)만한 것이 없는데,
이런 위급함을 보고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면 충과 효를 둘 다 완전히 이루는 것이다.”
흠순은 집에서 다정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청탁(淸濁)에 구애되지 않아 기승 원효를 따라다니는 노상의 걸인들과도
곧잘 어울렸다.
어려서는 유신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잘 따랐지만 사람들이 모두 유신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자
어느 순간부터 이를 비웃으며,
“내 형은 저자에서 알몸으로 만난 여인의 정분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런 내 형이 어찌 두렵단 말인가?”
하고 옛날 유신의 가슴 아픈 애사(愛事)를 거론하며 말과 태도를 조심하지 않았다.
유신은 이를 알고도 늘 지극한 우애로 흠순을 어린아이처럼 사랑했다.
또한 흠순은 재물에도 어두워 늘 가세가 적빈했으나 원광 법사의 아우인 보리(菩利) 공의
두 딸을 한꺼번에 처로 맞이할 만큼 성정이 대범하고 배포가 두둑했다.
그는 집에 있으면 항상 좋은 아버지가 되어 처자식과 노는 것이 마치 천진한 어린애 같았지만
칼을 차고 전장에 나오면 사정은 판연히 달라졌다.
평소에 우습게 여기는 듯하던 유신의 말을 하늘처럼 받들 뿐만 아니라 유신이 지나갈 때는
그 그림자도 밟는 일이 없었다.
그 때문에 흠순의 군대는 늘 군율이 엄정하고 위계가 엄격해 만군의 본보기가 되곤 했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흠순을 가리켜,
“전쟁에 임하면 산천초목이 모두 떨지만 집에서는 닭과 개가 업신여기는 사람이다.”
하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반굴은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에 나와서야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뜻을 알아차렸다.
집에서 본 아버지는 전장에 나가면 제대로 싸움이나 할까 싶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갑옷과 투구를 쓰고 칼을 들자 호령소리부터가 달라졌다.
특히 그가 백제군과 세 번째 벌인 싸움에서 무인지경 적군 사이를 헤집으며
혼자 수십 명의 목을 베는 광경을 목격한 뒤론 그런 영걸을 아버지로 둔 것이
새삼 눈물이 날 만큼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나이 열아홉, 한번 피가 끓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을 때였다.
“소자를 믿어주시니 고맙습니다. 삼가 아버지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반굴은 아버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았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일어나 무장을 갖추고 말에 뛰어올랐다.
흠순이 말 잔등에 앉은 반굴의 엉덩이를 툭 치며,
“과연 내 새끼다! 너를 낳아 키운 보람이 있구나.”
하고 격려한 뒤,
“아비가 직접 북을 칠 테니 어디 북소리에 맞춰 유감없이 싸워보라!”
말을 마치자 곧장 북을 걸어둔 곳으로 달려가 웃통을 벗어제치고 손수 북채를 잡았다.
둥, 둥둥, 둥둥둥, 둥둥둥둥둥……
잠에서 막 깨어난 신라군은 난데없는 북소리에 놀라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유신을 비롯한 장수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군막 밖으로 달려 나왔다.
북을 치는 사람은 흠순인데 그 소리에 맞춰 한 장수가 쏜살같이 적진으로 말을 몰아가는 게 보였다.
“흠순 부자가 드디어 일을 낼 모양이다!”
유신은 그가 다름 아닌 자신의 조카 반굴임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북소리에 놀라긴 백제군도 마찬가지였다.
계백은 모든 군사들에게 전열을 갖추도록 지시한 뒤 자신도 싸울 채비를 하고 말에 올랐다.
그런데 저만치 황산벌을 질주하며 달려오는 것은 오직 단기필마,
그는 또 김유신이 자신을 회유하러 오는 줄 알고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이번엔 아무리 김유신이라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장수들에게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당부한 뒤 혼자 벌판으로 달려 나왔다.
그런데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보니 김유신이 아니라 처음 보는 젊은 장수였다.
“멈춰라, 너는 누구이며 무슨 용무로 왔느냐?”
차마 싸우러 왔을 거라곤 짐작하지 못한 계백이 묻자 반굴은 뜻밖에도 칼을 휘두르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나는 신라의 화랑 김반굴 이다! 네 목을 취하러 왔다!”
거칠게 휘두르는 칼날을 피하며 계백은 잠시 어이가 없었다.
“보아하니 아직 어린애인 듯한데 상대하기 귀찮으니 그냥 돌아가라!
잘못 먹은 것이 있거든 물로 속을 헹궈내면 다소 나을 것이다.”
“닥쳐라, 이놈! 네 목을 베지 않고 나는 한 발짝도 물러설 수가 없다!”
반굴은 칼자루를 고쳐 잡고 다시 힘껏 공격을 가해왔다.
그의 칼날이 계백의 어깨를 가볍게 스쳤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러서야 계백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굳이 죽겠다는 말이구나?”
“무슨 잔말이 그렇게 많은가?”
반굴은 말대꾸도 귀찮다는 듯이 소리친 뒤 잇달아 몇 차례 칼을 휘둘렀다.
낭도를 이끌고 다니며 틈틈이 수련한 풍월주답게 반굴의 칼 솜씨는 제법 예리한 데가 있었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10여 차례 몰아붙일 동안 계백은 오직 피하기만 할 뿐
역공을 취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피할 수만은 없었고, 피하기만 한다고 그만둘 상대도 아닌 듯했다.
하는 수 없다고 판단한 계백은 마음을 다잡아먹고 결전으로 응수했다.
반굴이 비록 풍류황권에서야 칼 다루는 재주가 뛰어난 축이었지만 계백으로 말하면
백제에서 첫손에 꼽는 검객이요 일국을 대표하는 장수였다.
본격적인 결전이 시작되자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눈빛을 빛내며 맞겨룬 지 단 3합, 계백의 목을 치려고 칼을 휘두르며 들어갔던 반굴은
말 잔등에 납작 엎드려 번개처럼 튀어나온 계백의 칼날에 그만 몸이 두 동강이로 끊어져
구슬픈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반굴이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 황산벌을 뒤흔들던 흠순의 북소리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백제 병영에서는 함성이 치솟고 신라 진영에서는 비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반굴이 죽는 것을 보자 흠순의 곁에 있던 품일은 자신의 아들 관창을 불렀다.
관창의 나이는 반굴보다도 세 살이 더 어린 열여섯, 어려서부터 의표가 단아하고
사람들을 잘 사귈 뿐만 아니라 말 타기와 활쏘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이른 나이에 화랑이 되었다.
이에 화주가 관창을 볼 때마다 매양 사다함과 젊은 시절의 용화 김유신을 함께 거론하다가
특별히 그 기개와 재주를 높이 사서 임금에게 천거한 일까지 있었다.
“너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의지와 기개가 남다른 아이다.
오늘 싸움에서 한번 3군의 표적(標的)이 되어보겠느냐?”
딴에는 반굴과 어울려 호연지기를 논하며 수십 명의 또래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보기엔 아직 귀밑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애일 뿐이었다.
“지금 이런 자리야말로 공명을 세우고 부귀를 취할 때다.
장부로서 가히 용맹이 없어서야 되겠더냐?”
“그렇습니다!”
관창은 반굴이 죽는 것을 본 순간에 이미 안색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공을 다투기로 하고 나온 반굴이 먼저 용맹을 보였는데 제가 나가지 않는다면
풍류황권에서 맺은 맹세가 헛될 뿐입니다.
반굴이 못다 이룬 공을 제가 나가서 마저 이루겠나이다!”
말을 마치자 관창은 창을 비껴 잡고 적진으로 내달았다.
북소리가 다시 울리고 황산벌엔 숨죽인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반굴을 죽이고 나자 계백은 자신의 병영으로 돌아와 투구를 벗고 부하들에게
술 한 잔을 청해 마시고 있었다.
애송이를 죽였다는 사실이 과히 유쾌할 리 없었다.
스스로 처자를 죽인 일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아이들의 얼굴이 새삼 떠올랐다.
그에게도 미처 다 자라지 못한 열 살 안팎의 자식들이 있었다.
열다섯 살짜리 아들은 살려서 전장으로 데려올까도 싶었으나 어차피 적군의 손에 죽을 양이면
그 꼴을 보는 것이 더 괴로울 것 같았다.
반굴을 죽인 계백은 부쩍 그 아들놈 생각이 났다.
“……전쟁은 과연 참극이다.”
술 한 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계백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또다시 벌판의 정적을 깨는 북소리와 함께 멀리서 한 장수가 말을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장군께서는 그대로 계십시오. 저 자는 제가 처리하겠나이다.”
시립한 백량의 제안에 계백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백량은 말을 타고 나가 관창과 맞섰다. 두 사람이 어울려 10여 합쯤 싸우자
신라 진영에서 반굴과 관창을 따라온 낭도들이 끓어오르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화랑의 행적이 저와 같은데 우리라고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생사고락을 오로지 주인과 같이할 뿐이다!”
그렇게 울부짖으며 달려 나간 낭도들의 숫자가 족히 2, 30명쯤 되었다.
백제군들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관창과 백량이 싸우는 곳을 중심으로 양측 군사들 간에 소규모의 혈전이 벌어졌다.
낭도들을 본 관창은 더욱 힘이 솟았다.
그는 백량의 칼끝을 피해 백제군사 3, 4명을 찔러 죽이고 다시 자리를 옮겨 벌 떼처럼 달려드는
적과 맞섰다.
그런데 자신의 낭도를 향해 날아오는 칼날을 대신 막으려는 순간 갑자기 말이 기우뚱하더니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다.
관창의 실수가 아니라 말의 실수였다.
말에서 굴러 떨어진 관창을 보자 백제군 네댓 명이 와르르 달려들어 옴짝달싹도 못하게
사지를 묶어버렸다.
우두머리가 생포되자 낭도들도 급격히 기운을 잃고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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