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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장 황산벌 2

오늘의 쉼터 2014. 11. 19. 09:49

제31장 황산벌 2

 

 

 

앞줄에 선 몇몇은 문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고 뒷줄의 군사들은 목을 길게 뽑아 담장 너머를 기웃거렸다. 계백이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바깥으로 나온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피가 뚝뚝 흐르는 칼날을 자신의 소매에 닦아 다시 말 안장에 걸고 부장 백량(苩良)에게 말했다.

“들어가서 내 처자의 시신을 거두어 집 뒤에 땅을 파고 대강 묻어주게나. 나는 잠시 다녀올 데가 있네.”

계백은 그 길로 자신의 애마인 가라말을 달려 망해정 북산에 묻힌 성충의 무덤을 찾아가 절한 뒤

봉분 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했다.

“사직위허(社稷爲墟)를 한탄하는 처량한 노랫소리가 사방을 울타리처럼 에워쌌으나 용렬한 계백은

이런 날이 올 때까지 대감의 유지를 제대로 받들지 못했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성은을 입고 국록을 받은 몸으로 무엇을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오리까.

마지막 순간까지 백제 장수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일만 남았을 뿐입니다.

바라옵건대 정녕 충혼이 계신다면 이 계백에게 적을 물리칠 힘과 지략을 주소서!

그것이 어려우면 장수의 위용이라도 크게 떨쳐 천년 사직의 대미가 장하였음을 만대에 남게 해주옵소서!”

성충의 묘 앞에서 계백은 처자를 죽일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보였다.

흙을 덮고 누운 충신의 응답이었을까.

비장한 호소가 끝나는 순간 갑자기 무덤 근처에 회오리가 일어나고

사방의 나뭇잎들이 수천 개의 종처럼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계백이 다시 집 앞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던 군사들은 이미 처음의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도성의 방군(方軍) 가운데서도 제일 으뜸으로 치던 중방(中方)의 군사들로

일찍이 성충이 대란을 예측하고 키워온 정병 중의 정병들이었다.

이들은 계백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처자를 단칼에 베어 죽이자 두 가지 사실을 명확히 깨달았다.

첫째는 충신의 높은 절개요,

둘째는 이렇게 나라가 망하면 자신들의 처자 역시 노비가 되거나 치욕과 수모를 당할 거라는 점이었다.

그랬다.

임금이 죽고 사직이 망하는 것이야 어째도 좋았다.

그들이 창칼을 들고 적과 싸워야 할 이유는 임금을 위해서도,

사직을 위해서도 아닌 바로 자신과 자신들의 처자식을 위해서라는

당연한 사실을 계백은 스스로 식솔들을 죽임으로써 분명히 가르쳐준 셈이었다.

전쟁에서 지고 나라가 망하면 백성들이 어떤 꼴을 당할지는 너무도 뻔했다.

야수 같은 적의 품에 알몸으로 안긴 처와 딸자식, 곱디고운 그네들을 마음껏 짓밟고 유린하는

광경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울부짖는 노부모와 피를 흘리며 죽어갈 아들자식의 비명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목숨을 바쳐 싸우기에 그보다 더한 이유가 어디에 또 있을 것인가.

아무도 결사항전을 강요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장수의 처자식을 땅에 묻으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필사의 각오를 다지기 시작했다.

오합지졸이 철벽의 강군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황산의 전역(戰域)을 피로 물들인 계백의 5천 결사(決死)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계백은 이들을 이끌고 황등야산(황산:논산군 연산면) 들판에 이르렀다.

전날 상좌평 성충을 수행하고 지나갔던 길,

불과 하루 만에 적성 일곱을 쳐서 빼앗고 만인의 찬사와 부러움을 받았던 전설의 땅 우술군은

이미 신라군의 수중에 넘어간 뒤였다.

옛 추억에 잠긴 그의 눈앞에 어느덧 깃발을 촘촘히 늘여 세운 적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계백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음을 알고 황산을 의지해 3영(三營)을 설치한 뒤 군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월(越)나라의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吳)나라의 70만 군대를 무찔렀다.

모두 다 분발하여 반드시 이기도록 하자.

결승(決勝)만 다짐한다면 저따위 신라군은 얼마든지 격파할 수 있다!”

이때 신라군의 선봉장은 흠순과 품일 이었다.

태자 법민이 덕물도에서 당군과 군기를 약정하고 돌아온 뒤 춘추는 금돌성(今突城:상주)으로 내려와

본영을 꾸미고 사비성을 향해 네 갈래로 군사를 내었다.

전략을 짜고 군사를 부리는 것은 김유신의 몫이었다.

유신은 임금이 지켜보는 앞에서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다음과 같이 군령을 내렸다.

“천존은 아우 천품과 진순(眞純), 진왕(眞王)을 데리고 소비포로 가서 전날 백제에 뺏긴

우술군의 자성들을 되찾고 탄현을 넘어 은진으로 오되 항복하는 군사나 힘없는 백성들은

한 사람도 해쳐서는 아니 되오.

이번 싸움은 적군을 죽이고 적성을 쳐서 무너뜨리는 과거의 싸움과는 격이 다른 것이오.

백제가 망한 뒤 그 땅을 다스리자면 후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소.

당군과 약정한 군기가 내달 10일로 아직 날짜가 넉넉히 남았으므로 민심에 반하는 싸움이나

노략질은 금하도록 군사들을 철저히 단속하시오.

만일 적성에서 사생결단으로 나와 함락시키기 어려운 곳이 있거든

우회하여 길만 얻는 것도 한 방법이오.

급할 것이 없으니 인심을 얻어가며 천천히 은진으로 오시오.”

군령을 받은 천존이 허리를 굽혀 절하고 물러나자

유신은 일선 주에서 달려온 죽지를 불렀다.

“그대는 문충, 군관(軍官)과 수세(藪世), 의복(義服) 등을 데리고 진현현(眞峴縣:대전)을 넘어가

황산 북방으로 진격하되 앞서 말한 바를 명심해 함부로 백성들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지금 백제는 왕도가 황폐하고 민심이 흉흉하여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결사항전을 하려는

군사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항복하는 자들은 너그럽게 거두고 백성들은 모두 그 땅에 그대로 살게 한다면 뉘라서

우리 군사의 진군을 방해하겠는가?

백제의 백성들도 우리가 지나간 뒤엔 모조리 우리 대왕의 백성들임을 유념하라.”

죽지 다음으로 호명된 장수는 병부령 진주였다.

 제아무리 병부 령이 되었다지만 진주 또한 유신에겐 업어서 키운 자식 같은 장수였다.

“병부령 에겐 병부령다운 대임을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

유신의 말에 진주가 겸연쩍게 웃었다.

“하명만 하십시오. 무슨 일인들 못하겠나이까?”

“흠돌과 너의 아우 진흠은 혼자서도 만군을 상대할 장수들이다.

너는 그들을 데리고 소비포와 계룡산 북변으로 돌아가서 웅진 땅을 점령한 뒤 그대로 거기 남아 있으라. 백제왕 의자는 도성이 위태로워지면 틀림없이 웅진으로 피신하려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 해도 사비성을 점령한 뒤 당군들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알 수 없으니

어찌 방책을 세워두지 않겠는가?”

그러자 진주가 의아한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장군의 말씀은 충분히 알아듣겠습니다만 5만 군사로도 당군에게 시빗거리가 될 것을

걱정하는 판국입니다.

은진에 가서 당군과 합세한 뒤 다시 웅진으로 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유신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이유가 없다. 당군의 위세가 이미 백제의 군신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한데

무엇 하러 우리 군사를 피로하게 만들겠는가?

백제를 치는 것은 당군의 힘을 빌리면 된다.

정작 우리가 나서야 하는 전쟁은 그 뒤에 있으니

너는 내 말을 명심하고 결코 장병들을 미리부터 피곤하게 만들지 말라.

은진의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다.”

그리고 김유신은 진주에게 1만 5천이나 되는 군사를 배정해주었다.

3군(三軍)에게 모두 군령을 내린 다음 그는 마지막으로 흠순과 품일에게 선군을 맡기고

자신은 뒤에서 문영과 함께 후군을 인솔해 길동군(영동)을 지나 진동(珍同:금산)과 황산을 거쳐

은진으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출병에 앞서 임금은 9장수를 선발하고 황금 투구와 보검을 하사해 전장으로 나서는

군문의 사기를 높였다.

유신, 천존, 흠순, 진주, 죽지, 품일, 문충, 천품, 흠돌은 임금의 품의 없이도 싸움터에서

절도와 군령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었고, 진퇴와 군율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었으며,

임금 앞에서도 칼을 차도록 허락했다.

무열왕의 9신(九臣)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9장수가 이끄는 신라군 5만은 금돌성 성문 앞에서 네 패로 나뉘었다.

이 가운데 진주의 군대를 뺀 나머지 신라군들은 당군과 약속 장소인 은진으로 가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황산벌을 통과하게 돼 있었다.

유신의 말처럼 급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당군들이 먼저 기벌포로 진입해 백제 군사들이 그곳으로 몰려가기를 기다렸다가

진격하는 편이 육로의 신라군으로선 한결 유리했다.

신라군은 국경을 지나 백제의 성곽들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탄현을 넘고

계룡산을 우회해 서진(西進)하였다.

때로는 충정이 갸륵한 성주를 만나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백제 성곽들은

그리 극렬한 저항을 해오지 않았다.

펄럭이는 깃발을 앞세우고 북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성문까지 진격한 신라군을 보자

백제의 많은 주민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기색이었다.

3천 궁녀로 대변되는 왕의 실정이 저자에 소문으로 나돈 지 여러 해,

수십 가지 망국의 조짐들이 거의 달마다 생겨나 민심을 어지럽힌 지도 어언 이태나 되었다.

거기에 적군 장수들이 창칼을 앞세워 무작정 공격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예를 갖춰 항복할 것을 권유하고, 투항하는 자들을 해치지 않을 것과 고향 땅에

그대로 살게 할 것을 약속하고 나오자 백성들은 고사하고 성주를 비롯한 관리들조차도

미리 싸움을 포기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이렇게 성 하나가 항복하면 다음 성은 일이 더 쉬웠다.

신라 장수들은 항복한 성주와 성민 몇 사람을 앞세우고 이웃 성으로 가서

먼저 그들을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약탈과 노략질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선험자의 입을 통해 전달하려는 계산이었다.

이런 신라군의 전략은 비록 시일은 많이 걸렸으나 백제 땅을 큰 싸움 없이 점령하게 만들었고,

백제 백성들의 마음도 크게 다치지 않아서 뒷날 양국이 일가(一家)가 되었을 경우를 대비해서도

탁월한 심모원려가 아닐 수 없었다.

김유신이 먼저 가야 망국의 후예가 아니었고,

그 뒤로 1백 년 가까이 신라인과 가야인의 극심한 알력을 겪지 않았더라면

쉽사리 나오지 못했을 대략(大略)이었다.

늙은이들은 군문으로 달려가 자식의 옷깃을 부여잡고 항복할 것을 권유했고,

부인과 어린애들 역시 남편과 아버지의 사지에 매달려 눈물로 싸움을 만류하니

설혹 비장한 결심을 했던 이들일지라도 굳은 뜻이 봄날 눈 녹듯이 허물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보름 만에 탄현 북방의 18개 성곽과 진현, 진동의 12개 토성이 모두 성루에 백기를 꽂고

스스로 성문을 열었고, 무기를 들고 나와 교전한 곳은 왕족이 성주로 있던 계룡산 인근의

불과 두세 곳뿐이었다.

3군 가운데 제일 먼저 황산에 당도한 군사는 흠순과 품일이 이끄는 최남단의 군사들이었다.

이들은 뜻밖에도 황산벌에서 병영을 설치하고 기다리던 계백의 군사를 만나자

먼저 항복할 것을 권유하는 글을 써서 적진으로 보냈다.

앞서 경험에 비춰 그렇게 하면 당연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을 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결과는 신라군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계백은 신라군이 정중히 예를 갖춰 보내온 편지를 읽지도 않고 찢어버린 뒤

사신으로 온 자에게 눈을 부릅뜨고 으름장을 놓았다.

“가거든 너희 장수들에게 전하라.

나는 백제 장수 달솔 계백이다.

내 손으로 처자를 죽이고 나왔으니 항복할 이유가 없다.

백제를 치려면 먼저 나를 꺾어야 할 것이다.

누구든 이 황산벌을 재주껏 지나가 보라.

내 휘하에선 오로지 생사를 초월한 결사항전만 있을 뿐이다.”

돌아온 사신이 혼비백산하여 계백의 말과 뜻을 전하자 흠순과 품일은

결전이 불가피함을 알아차리고 선군 5천 명에게 모처럼 교전할 것을 명령했다.

“적이 비록 항전을 결심했다고는 하나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정작 싸움이 벌어지고 우리 후군이 당도할 때쯤이면 저들의 결심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군사의 매운 맛을 보여서 적으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해야 한다.

천년 사직을 멸하는 판에 전역이 아주 없는 것도 싱겁지 않은가?”

두 장수는 계백의 군사를 약간 시쁘게 여겼다.

곧 5천 군사를 두 패로 나누고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달려들자

백제 측에서도 마군 1천여 기를 내어 맞섰다.

신라군 5천에게 좌우로 포위된 백제 마군들의 형세는 시초만 해도 별게 아닌 듯이 보였다.

와, 하는 함성소리에 파묻혀 금방이라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싸움은 제법 호각세를 이루며 한참 동안 계속됐다.

백제군은 거세게 달려드는 적군을 상대해 당초의 예봉을 얼마만큼 꺾어놓았다고 판단하자

아주 조금씩 황산 쪽으로 후퇴했다.

처음부터 그랬다면 유인책을 의심했을 것이지만 한동안의 치열한 접전 끝에 교묘하게

일어난 일이어서 신라군은 조금도 이를 수상히 여기지 않았다.

중과부적을 위장해 마치 기력이 다한 것처럼 꾸며서 백제군은 적을 끌고 황산 깊숙이 들어갔다.

“신라군이 왔다! 마군들은 어서 사방으로 흩어져라!”

싸우던 군사들 틈에서 갑자기 한 장수가 크게 소리치자

백제군은 잽싸게 등을 돌려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달아났다.

이를 신호로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리더니

황산 계곡에서 수백 명의 궁수들이 나타나 비오듯이 화살을 날려댔다.

놀란 신라군들이 황급히 발걸음을 되돌리려 했을 때였다.

“이놈들,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어느새 퇴로를 가로막은 한 패의 군사들 틈에서 유난히 늠름한 장수 하나가

칼을 뽑아 든 채 점잖게 호통을 쳤다.

앞선 신라군 몇 명이 제법 호기롭게 달려들자

그 장수는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는데,

어찌나 검법에 힘이 실렸는지 맞서는 칼마다 허공으로 날아가고

동시에 사람의 목이 마치 작대기질에 떨어지는 밤송이처럼 후두두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계백이 있는 한 백제는 망하지 않는다! 황산에 들어온 자는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

황산에 의지해 3영을 설치한 계백의 전략은 참으로 절묘했다.

유인한 한 패의 군사가 뒤로 빠지면서 나머지 양쪽 병영에서 달려나온 군사들이 좌우 협공을 시도했고, 달아나는 길은 계백이 방군 장수와 1백여 기의 무사들을 동원해 철저히 차단했다.

유인 군을 포위하고 갔던 신라군들은 순식간에 자신들이 도리어 포위당한 형국이 되자

당황한 마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안쪽에서는 화살이 계속해서 날아오고, 좌우에선 창칼을 든 마군들이 아귀처럼 달려드는데,

달아날 길마저 끊어졌으니 죽기 살기로 싸울 도리밖에 없었다.

그런데 맞서는 백제군은 하나같이 일당백의 무서운 용사들,

짐작컨대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나온 자들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야 칼날이 투구를 치거나 코끝을 스쳐도 그처럼 고개를 빳빳이 세워 달려들 리 없고,

심지어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서 걷잡을 수 없이 피가 흘러도 그처럼 태연히 싸움을 계속할 리 없었다.

신라군들은 갈수록 기가 질리고 힘이 빠졌다.

하나를 베면 둘이 달려들었고, 둘을 피해 도망가면 셋, 넷이 앞을 가로막았다.

첫 번째 교전에서 신라군은 대패했다.

사상자가 1천 명이 넘었고 정벌에 나선 대군 선봉의 예기도 여지없이 꺾여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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