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신라 11
진심이 다하는 곳에 귀신의 도움이 있다고 했던가.
꿈에서 깨어난 춘추는 곧 장춘과 파랑의 두 집 자손들을 수소문해 후한 상을 내리고
유사에 명하여 한산주(漢山州:서울)에 장의사(莊義寺)를 창건해 두 충신의 명복을 빌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경신년(660년) 정월, 상대등으로 있던 금강이 대사를 앞두고 그만 유명을 달리했다. 금강은 위로 임금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신하들의 직무를 총괄하느라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사람이
었다.
춘추는 금강이 죽자 과중한 격무 때문이라고 여겨 친히 초상집을 찾아가 슬피 울었다.
금강의 뒤를 이어 이찬 김유신이 드디어 나라의 최고 상신인 상대등의 지위에 올랐다.
이때 유신의 나이 예순다섯이었다.
그해 3월, 거병 여부를 두고 무려 반년이 넘게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던 당주 이치에게
결정적인 조언을 한 이는 그의 아내인 무후(則天武后)였다.
선주에 비하면 사고력과 결단력이 현저히 떨어졌던 이치는 서력 655년,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비 무후를 황후로 맞이했다.
이듬해에는 무후의 소생으로 태자를 교체했으며,
이때부터 무후는 당나라 정사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659년에는 무후를 반대하는 세력을 피해 낙양(洛陽)에 궁궐을 짓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길 만큼 이치는 무후에게 빠져 있었다.
“본래 안이 소란스러우면 밖을 치는 법입니다. 전쟁이 났는데도 장안의 무리가 시끄럽게 굴면
얼마든지 역모로 다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이치는 인문과 양도가 수시로 찾아와 원병을 청하는 통에 무척이나 골치가 아팠다.
아버지뻘인 신라왕 김춘추의 구구절절 간곡한 친서도, 김인문이 가져온 양국의 혈맹문도
이치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국내의 어지러운 사정 때문에 아무 소득 없는
남의 나라 싸움에 대병을 동원할 형편도 아니었다.
그런데 무후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라 밖으로 군사를 내자고 말했다.
무후뿐 아니라 재상 장문관(張文瓘)도 소정방을 데리고 입조해 이렇게 말했다.
“선제께서 춘추공과 동맹문을 짓고 혈맹의 서약을 한 데에는 그럴 만큼 심오한 뜻이 있었나이다.”
“심오한 뜻이라니?”
“백제와 신라는 국경이 개이빨처럼 맞물려 있습니다.
백제가 있는 한 신라를 수중에 넣기란 어렵지만 만일 백제를 토벌한 뒤 그대로 군사를 돌려
신라를 정벌하기란 주인 없는 외밭에서 외를 따는 일보다 손쉬울 것입니다.
그런 다음 고구려를 양쪽에서 협공한다면 삼한의 강역을 모조리 평정할 수 있습니다.
한 번 군사를 일으켜 누대의 골칫거리였던 삼한 세 나라를 전부 우리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는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이것이 선제께서 이미 구상하셨던 삼한토평(三韓討平)의 계책이었나이다.”
무후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장문관은 거병을 주장했다.
“……신라까지 토벌한다고?”
이치는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릎을 당겨 앉았다.
“그러나 신라왕 김춘추는 이미 선친과 자별한 우애를 나눠온 형제 같은 분이 아니신가?”
“천하를 경영하는 일을 두고 사사로운 정리에 얽매이는 법이 아니옵니다.”
“신라를 친다, 신라를 친다……”
이치는 한동안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신라는 이미 국가의 법제와 문물을 우리 식으로 손질해 남의 나라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군사가 가면 필경은 그 나라 백성들이 거리로 달려나와 쌍수를 흔들며 환영할 것입니다.
더구나 백제를 치려면 모든 신라군이 사비로 출병할 게 뻔하니 그 도성은 텅텅 비어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정 마음에 걸리시면 신라를 토벌한 뒤 도독부를 설치하고 지금의 신라왕으로 하여금
도독으로 삼아 여전히 그 땅을 다스리게 하면 됩니다.
부디 선제의 깊은 뜻을 헤아리시어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호기를 놓치지 마옵소서.”
이치의 얼굴에 점차 희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가 반년이 넘게 갖은 핑계를 대며 기피하던 신라사들을 다시 불러들인 건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였다.
경신년 3월, 당은 삼한을 전부 당나라 영토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속에 감춘 채 겉으론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백제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군사를 모집했다.
이치는 좌위대장군형국공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숙위사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은 뒤 좌위장군 유백영(劉伯英), 우무위장군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 방효공(龐孝公) 등이 이끄는 약 13만 군사로써 백제 정벌을 명령했다.
아울러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당나라 군대를 돕도록 조칙을 내렸다.
이 소식은 인문과 함께 낙양에 숙위하던 김양도를 통해 곧 신라 조정에 전해졌다.
춘추는 즉시 만조의 문무 백관들을 편전에 불러 모으고 대책을 숙의했다.
“드디어 당은 군사를 일으켰으나 그들이 타고 올 배에는 반드시 검은 속셈도 덩달아 실려 있을 것이오.
과인이 누차 말했듯이 백제를 정벌한 뒤 당군은 기회를 보아 우리까지 치려고 들 게 틀림없소.
승냥이를 잡기 위해 범을 끌어들인 격이니
이제 어떻게 하면 범의 아가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의논해야 하오.”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병부령 진주였다.
“당군의 숫자가 13만인데 우리 군사가 15만쯤 되니 과히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듯합니다.
더군다나 백제를 멸한 뒤엔 13만 가운데 얼마가 살아남을지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진주의 말이 끝나자 가야 출신의 장수 천존이 이를 반박했다.
“당군은 선단을 이끌고 백제의 서안으로 들어올 것이지만
우리는 내륙으로 들어가 백제군과 싸워야 합니다.
자연히 우리 군사의 희생이 훨씬 클 것이니
신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뒷일을 장담하기 어렵나이다.”
천존의 옆에 있던 품일도 천존의 말에 동조했다.
“백제와 고구려는 이미 동맹을 맺은 지 오랩니다.
고구려가 원군을 보내 우리 북경(北境)을 어지럽힐 일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일이 잘못되면 우리는 3국 모두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어찌 가벼이 움직일 수 있겠나이까?”
그러자 상신 김유신이 입을 열었다.
“15만 군사를 3분(三分)하여 북경(北境)과 도성을 지키게 하고
그 가운데 5만 가량으로 당군을 돕는 것이 좋겠습니다.”
“5만이면 성원할 군사로 너무 적지 않겠소?
만일 그랬다가 백제를 멸한 뒤 당군이 그 일을 트집잡아서 백제 땅을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어찌 합니까?”
임금이 묻자 유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당군은 어차피 백제 땅을 순순히 우리에게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나라의 입을 틀어막고 백제를 멸한 공을 주장하려면 전쟁의 주(主)는 우리가 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백제 전역으로 군사를 내어 그 나라의 5부(部), 37군(郡),
2백여 개 성곽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도성으로 진격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하려면
전쟁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으므로 실상 불가합니다.
결국 이 싸움은 강역 전부를 수중에 넣는 싸움이 아니라 단지 도성만을 함락시키는
단기간의 결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라고 어찌 충신과 열사가 하나도 없겠습니까?
제아무리 왕실이 문란하고 임금이 신망을 잃었어도 한 나라의 역사가 7백 년입니다.
7백 년 사직이 망한 뒤가 시끄럽지 않을 수 없으므로 당군은 비록 도성을 점거하더라도
안팎으로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힐 게 뻔합니다.
따라서 미리부터 우리가 나설 까닭이 없습니다.
13만이나 되는 당군이 바다를 건너왔으니 이들은 틀림없이 눈에 드러나는 공을 세우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설쳐댈 게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저 곁에서 부(副)가 되어 그런 당군을 적당히 조력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거병할 때의 마음 같으면야 백제를 멸한 뒤 곧바로 군사를 돌려 우리를 칠 것 같지만
막상 당해보면 일은 그처럼 수월하지 않을 것입니다.
뒤에서 당군을 조력하는 데는 5만의 군사로도 너끈하지 않겠나이까?”
유신의 설명에 춘추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상신의 말씀이 하나도 그른 데가 없습니다.
이제 양도의 말을 들어보면 이치가 과인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올 것을 원했다고 하니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도성을 비게 만들어 사비를 멸한 뒤엔
곧바로 금성까지 무혈입성하려는 수작입니다.
그것을 알고야 어찌 도성을 방비하지 않겠습니까?”
춘추는 길지 않은 논의 끝에 비로소 단안을 내렸다.
그는 김유신의 말대로 신라 전역의 군사를 3패로 나눠 일부는 북경으로 보내고,
일부는 도성 외곽을 철통같이 방비하도록 명한 뒤 나머지 5만 군사를 이끌고
약속한 날짜에 맞춰 친히 출병하려 했다.
그러자 유신을 비롯한 만조의 백관들은 사색이 되어 이를 뜯어말렸다.
“대왕께서 친정에 나서실 까닭이 없나이다. 도성을 지키옵소서!”
“전쟁은 우리 장수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시석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곳을 어찌하여 친히 가시려 하옵니까?”
하지만 춘추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과인이 가야 합니다. 그러잖아도 군사가 적어 트집을 잡힐 판입니다.
과인마저 가지 않으면 뒤에 할말이 없습니다.”
임금과 신하들 간에 한동안 양보 없는 설전이 벌어지자 보다못한 태자 법민이 나섰다.
“아바마마께서는 대궐에 계시는 것이 좋겠나이다.
소자가 아바마마를 대신해 당나라 대군을 맞이하러 가겠습니다.”
“오냐, 너도 가자!”
춘추는 무슨 생각에선지 그렇게 말했다.
법민은 아버지를 대신해 가겠다는 것이었는데 임금은 오히려 같이 가자고 나서는 것이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대왕께서 태자까지 대동하신다면 도성과 대궐은 어찌한단 말씀입니까?
부디 한 분만이라도 남아서 도성을 지켜주십시오!”
임금을 만류하던 신하들은 이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남아줄 것을 간청했다.
그럼에도 춘추는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비록 당나라의 검은 속셈을 꿰뚫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다음에야 신의와 명분을 저버릴 수는 없소.
당주가 우리를 도우려고 대병을 일으킨 것이 명분인데
과인이 어찌 도성에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할 수 있겠소?
과인이 가고 안 가고는 훗날 당태종과 맺은 서약을 논의할 때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과인이 가야 합니다.
그래야 백제 땅을 한 뼘이라도 더 우리가 가져올 수 있을 것이오.”
“하오면 태자마마라도 도성에 계시도록 하십시오!”
“태자도 마땅히 가야 합니다.
누대에 걸친 숙원을 풀고 천년대업을 이루는 마당에 태자가 동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춘추는 어느새 자신의 다음 세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제왕의 권위를 세우려면 먼저 그럴 만한 위국지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남의 신하로 지내오면서 몸소 체득한 경험이었다.
“그렇다면 대궐과 도성은 과연 누구에게 맡긴단 말씀입니까?”
신하들이 걱정스럽게 묻자 임금은 웃음을 머금고 태연히 대꾸했다.
“그건 염려하지 마시오. 과인이 다 알아서 하리다.”
그날 저녁, 춘추는 신하들이 모두 퇴궐한 뒤 내관 하나를 앞세우고 궐 밖 알천의 집을 찾아갔다.
기별도 없이 나타난 임금을 보자 알천은 크게 놀라며 맨발로 마당에 내려서서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마마, 국사가 위중한 터에 이 누옥엔 창졸간 어인 일이신지요?”
“숙부께 특별히 청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신과 같이 늙은 것은 대왕께서 타시는 어가의 한 귀라도 들라고만 한다면
천하에 다시없는 광영이올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알천의 집은 청빈함이 지나쳐서 사뭇 궁기마저 돌 정도였다.
그는 마침 늙은 처와 단둘이 앉아 이제 막 밝힌 등잔불 밑에서
쌀에 섞인 뉘와 잡석을 골라내고 있던 중이었다.
“무엇을 하시는지요?”
임금이 묻자 알천이 겸연쩍게 웃었다.
“전에는 이런 것도 없어 못 먹었는데 근자엔 부쩍 묵은 곡식을 버리는 집이 흔합니다.
백성들의 입살이가 그만큼 좋아졌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저희 내외는 기쁜 마음으로 이런 것을 주워서 양식으로 삼고 있나이다.”
알천의 대답에 춘추는 대경실색했다.
“혹시 양식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까?
제가 대궐에 들어가는 대로 양곡과 식읍을 다시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알천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손사래를 쳤다.
“신은 이미 3대에 걸쳐 받은 양곡과 식읍이 넉넉합니다.
다만 그것들을 이웃에 갈라주었을 뿐입니다.
가을이 오면 그들이 가져오는 양식만 해도 신의 곳간이 그득하니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저희 내외가 그저 소일 삼아 하는 일입니다.”
춘추는 혀를 차며 알천의 방을 새삼스레 둘러보았다.
누더기 같은 이부자리 한 채에 글을 읽는 책상 하나가 달랑 놓였을 뿐,
막대기를 휘둘러 거칠 것이 하나 없으니 그야말로 물로 씻은 듯이 가난한 살림살이였다.
춘추는 평생을 지켜온 알천의 검약함에 깊이 감동했다.
그와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두 번씩이나 내란을 겪은 계림의 사직이 어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랴.
“예원(禮元)에게 자주 안부는 묻습니다만 용렬한 주제로 과분한 지위에 있다보니
철마다 직접 문안을 여쭙지 못했습니다.”
예원은 알천의 장자로 이때 조정에서 승부의 일을 돕고 있었다.
“그래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대왕께옵서 보살펴주시는 덕분으로 요즘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백발이 빠진 자리에 다시 검은머리가 난다고 하니 장수할 조짐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하하.”
알천이 천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춘추도 크게 기뻐하며,
“그러셔야지요. 이제 꿈에도 그리던 천년대업을 이루게 되었는데
숙부께서 부디 그 영광스러운 날을 보셔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연하여 춘추는 대강의 국사를 설명한 뒤에 이렇게 부탁했다.
“저와 태자가 당군을 맞이하러 나가고 나면 도성과 대궐이 비게 되어
정사를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저희 부자가 백제를 멸하고 돌아올 때까지 숙부께서 금성을 다스려주신다면
저는 아무 걱정 없이 싸우는 일에만 매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귀찮다 마시고 도와주십시오.
이 소청을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한 마디를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듣는 알천이었다.
“친히 나가셨다가 봉변이 없겠습니까?”
“불군(不群)의 장수들이 곁에 있습니다.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춘추의 말에 알천은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를 세 패로 나눈 일은 정말 잘하신 결정입니다.
5만 군사로 당군의 기세를 꺾으려면 대왕께서 친히 나가셔야 하고
태자 또한 후사를 위해서는 금성에 남아 있어 될 일이 아니지요.
모두 다 불가피한 일인데 신이 죽었다면 모를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어찌 태산 같은 왕업을 돕지 않으오리까.
염려하지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창칼을 들고 싸움터에 나가라고 해도 거절하지 못할 터인데
도성과 대궐을 지키는 일이야 과히 어려울 게 없습니다.
신이 신명을 바쳐 뒤를 맡겠나이다.”
알천이 쾌히 승낙하자 춘추는 덥석 알천의 손을 붙잡았다.
“과연 숙부십니다! 춘추는 실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습니다!”
이튿날 아침 알천은 낡은 관복을 손질해 입고 오랜만에 입궐해 편전에 부복했다.
김유신을 비롯한 만조의 문무백관들은 알천을 보는 순간 한결같이 희색이 만면했다.
임금이 마음 편히 정사를 돌보게 하려고 물러나서 그렇지 아직 젊은이 못지 않은 기력을 지니고 있었다. 춘추는 알천에게 각간 벼슬을 돌려주고 신표를 내려 국사를 총괄하게 한 뒤
태자 법민을 비롯해 김유신, 진주, 천존 등의 장수와 맹군 5만 명을 거느리고 금성을 출발하니
이때가 음력 5월 26일, 여름 볕이 한창 뜨거워질 무렵이었다.
이들은 7백 리 당은포로를 따라 서북으로 진군해 6월 18일,
남천정(南川停:경기도 이천)에 이르렀다.
그사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내주(萊州:산동반도)에서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뱃길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 6월 21일, 서해 덕물도(德物島:덕적도)에 닿았다.
당군을 따라온 인문은 곧 시종하던 문천(文泉)을 파견해 이 사실을 알렸다.
춘추는 태자 법민에게 당항성에서 배를 타고 나가 소정방 일행을 맞이하도록 시켰다.
왕명을 받은 법민이 미리 전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 근해에 나가 기다리고 있으니
과연 수많은 당나라 배가 수평선에 나타났는데 그 위세가 가히 1천 리에 걸쳐 바다를 뒤덮을 정도였다.
법민은 신라기를 흔들어 이들을 덕물도로 안내하고 소정방과 자신의 아우 인문을 만났다.
“먼길을 오시느라 노고가 컸습니다. 저희 대왕께서도 소장군께 안부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법민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거구의 소정방도 목례로 답한 뒤 자신이 끌고 온 구름 같은 선단을 둘러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태자는 보시오. 13만 우리 대병의 위엄이면 수백 년에 걸쳐 그대 나라를 괴롭혀온 대방 소국쯤
한달음에 궤멸시킬 수 있지 않겠소?”
소정방의 태도는 용맹함을 넘어 사뭇 거만스럽기까지 했으나
법민은 그럴수록 깍듯함을 잃지 않았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황제의 대군이 이미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쳐놓았는데
쥐새끼 같은 소국의 불충한 무리들이 무슨 수로 달아나겠습니까?
황군의 위세가 든든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하, 그럴 것이오. 여기서 백제 도성은 얼마나 되오?”
“뱃길로 내려가면 반나절 안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거의 다 오신 셈이지요.”
법민은 준비해간 지도를 펴놓고 소정방을 비롯한 당나라 장수들과 전략을 짰다.
이들이 의논한 진입로는 동쪽으로 백강 하류인 기벌포와 서쪽으로는 탄현,
당군은 선단을 이끌고 내려가 기벌포를 치고 육로의 신라군은 탄현과 황산(黃山:논산)을 넘은 뒤
양군이 사비성 남쪽 은진(恩津:강경) 나루터에서 합세해 도성을 치기로 했다.
“부총관으로 따라온 제 아우가 지리를 잘 알고 있으니 길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라 임금은 지금 어디에 계시오?”
소정방이 여전히 거만한 말투로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를 리 없는 법민이었다.
“여기서 지척인 남천정에 나와 계십니다.”
“군사는 얼마나 되오?”
“얼마나 될 게 있습니까, 천년 숙원을 푸는 일입니다.
온 나라의 장정을 모조리 징발해 나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몸집은 두 배나 크고 머리 하나는 더 있는 거장의 앞이었으나 법민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소정방도 법민의 대답이 당연하다고 여겼는지 군사의 숫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왕께서 직접 사비로 오시겠지요?”
“물론입니다.”
“본래 동맹군이 서로 협공할 때는 미리 군기(軍期)를 약정하고 이를 엄수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오.
오늘이 6월 21일이니 앞으로 20일 뒤인 내달 10일이면 나는 틀림없이 우리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할 것이오.
그곳에서 대왕의 군대와 만나 백제국 의자의 도성을 격파하고자 하니 태자는 돌아가시거든
단 하루도 날짜가 어긋나지 않도록 대왕께 내 뜻을 전해주시오.
빨리 오는 것은 괜찮지만 하루라도 늦게 온다면 일은 매우 어려워질 거외다.”
소정방이 미리부터 오금을 단단히 박고 나오는 뜻도 법민으로선 충분히 알 만했다.
만일 약정한 군기를 어기면 일이 끝난 뒤 그것으로 시비를 틀어 이쪽을 제압하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군기 약정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법민은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대왕께서는 지금 대군이 당도하기를 선 채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제가 돌아가서 대장군이 왔다는 말씀을 전하면 틀림없이 약속한 곳으로 서둘러
달려가시려 할 것입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영접과 의논을 두루 마친 법민은 소정방 일행과 헤어져 전선에 올랐다.
배에 오르기 직전 김인문이 형의 뒤를 가만히 따라와서,
“정말 아버지께서 남천정까지 나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법민이 그렇다고 말하자 인문은 주위를 살핀 뒤 사뭇 근심 어린 얼굴로 속삭였다.
“당군의 속셈은 따로 있습니다.
백제를 멸한 뒤엔 시급히 우리 도성을 방비해야 할 것입니다.”
인문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 했으나 법민이 그런 인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도 다 알고 있으니 너는 맡은바 소임에나 충실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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