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24장 장관의 사랑 [8]
(506) 24장 장관의 사랑 <15>
서동수는 사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버릇이 생겼다.
이것은 경험에서 얻어진 교훈이다.
첫째가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는 자주 방해꾼이 끼어든다는 고사성어가 있다.
그것은 곧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다시 풀어 말하면 잘 나갈 때 방심했다가 큰코다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이 그렇다.
서동수는 뛰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진정시켰다.
방심하지 마라.
앞에 앉은 나오미를 응시하면서 서동수는 두 번째 교훈을 떠올렸다.
그것은 항상 최소한 두 개의 대비책을 갖고 덤벼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사꾼처럼 ‘올 오어 나싱(All or nothing)’ 자세로 나가다 가는 쪽박 차는 것은 시간 문제다.
혼자서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오미가 고기를 씹으면서 서동수를 보았다.
털어놓아서 편안한 것 같다.
나오미의 현 상황에 대한 평가는 아직 보류다.
서동수는 세 번째 교훈을 떠올렸다.
그것은 항상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자세다.
모든 일에 다 그렇다.
겉은 웃더라도 마음 자세는 갖춰야 된다.
언젠가 10년도 더 전에 서동수는 공식 석상에서 우연히 한 사내를 소개받았다.
예정에 없던 만남이었고 초면의 사내였다.
그때 서동수는 방심하고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을 때 사내가 악수를 거부하고 돌아섰다.
주위 사람들은 놀랐지만 금방 잊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사내는 서동수 회사 때문에 부도가 난 경쟁회사 대표 부인의 오빠였던 것이다.
그럴 줄이야,
서동수가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신분이었다고 해도 몰랐을 것이지만 그 사건에서 서동수는
또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긴장을 풀면 안 된다는 것.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처음 만난 사람한테 바보같이 웃으면서 손을 내밀면
그런 개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교훈이다.
“그, 대마도에 대한 나오미 씨의 견해는 물론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요?”
서동수가 묻자 나오미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당연하죠.
그럼 당장 반역자로 매도당할 텐데요.
절 추천해 준 요시무라 씨뿐만 아니라 총리도 탄핵을 받겠지요.”
서동수는 다시 호흡을 조절했다.
자, 호사다마다. 어디에 마(魔)가 끼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해라,
서동수. 그러나 일본 공관장이 대마도가 한국령임을 믿고 있다니,
이것은 마치 일본 열도에서 대한독립 만세가 울려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더구나 요즘 정세(政世)는 오죽 답답한가?
한국정부는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엄연한 한국령 독도의 입도시설 공사도 포기한 상황이다.
그때 나오미가 말을 이었다.
“일본 정부는 저를 통해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 영향력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제가 백제계이며 한국어에 유창하고 친한파라는 것까지 노출되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서동수는 머리만 끄덕였다.
거기까지다.
나오미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띄워졌다.
“더 깊숙한 내면은 알 수가 없겠지요.
대마도에서 도쿄로 이주했던 내 친척들이 관동대지진 때
일본 자경단에게 몰살당한 사연 같은 것 말이죠.”
“…….”
“그런 친척이 있는가 하면 내 할아버지는 일본군 중좌로 과달카날 전투에서 전사하셨지요.
야스쿠니에 계신 친척 두 분도 모두 장교였습니다.”
나오미가 손을 뻗어 술잔을 쥐더니 지그시 서동수를 보았다.
“한국과 일본은 이렇게 사연이 깊은 나라예요.
지금 일본 총리의 하는 짓을 보면 역사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507) 24장 장관의 사랑 <16>
술잔을 든 서동수가 한 모금에 술을 삼키고 나서 머리를 들었다.
“나오미 씨, 그럼 미국 측하고도 연락이 닿겠군요?”
“그래요.”
거침없이 대답한 나오미가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우리 둘이 만나는 것도 압니다.
CIA와 협조하라는 지시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연락이 가죠.”
“…….”
“공관 직원 중 셋이 정보요원이고 그중 하나가 CIA 연락관이죠.”
안종관한테서 보고를 받은 내용이다.
서동수가 나오미를 똑바로 보았다.
이제 나오미는 자신의 정체를 다 밝힌 상태다.
이 정도 수준을 갖춘 여자가 목적이 없겠는가?
일본 신의주 공관장이 되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오미가 서동수의 시선을 받더니 빙그레 웃었다.
환한 웃음이다.
갑자기 가슴이 막힌 느낌이 들었으므로 서동수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때 나오미가 말했다.
“그래요. 신의주를 중심으로 남북한 통일을 이루고 싶어요.
그리고 일본과 미국, 중국의 견제와 간섭을 물리치고 통일 한국을 동북아의 강국으로 만들자구요.”
서동수는 홀린 듯이 시선만 주었고 나오미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제가 장관님을 도와드리겠어요.
적절하게 일본과 미국을 대처하도록 정보를 드리고 조언을 해 드릴게요.”
“…….”
“그렇게 백제계 후손으로 일본 땅에서 천 수백 년을 이어 살아오면서
이용당하고 멸시당한 내 조상들의 한을 풀어드리는 거죠.
그것이 제 목표입니다.”
나오미의 상기된 얼굴에서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물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제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러다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역사를 알게 되었고 유학을 갔을 때 목표를 세웠어요.
한민족을 위해서 일하다가 죽겠다구요.”
“나오미 씨.”
어깨를 늘어뜨린 서동수가 마침내 긴 숨을 뱉었다.
“당신은 나보다 낫습니다.”
이제는 서동수가 상기된 얼굴로 나오미를 보았다.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이 행운이오.”
“제가 그래요.”
두 손으로 볼을 감싼 모습으로 나오미가 서동수를 보았다.
“장관께선 순수하세요. 듣기와는 전혀 다르세요.”
서동수는 물끄러미 나오미를 보았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다.
눈앞의 나오미에 대해서 전혀 욕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존경심과 잊었던 가족을 만난 것 같은 감동이 솟구쳤다.
이윽고 서동수가 숨을 고르고 나서 말했다.
“나오미 씨,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 가십시다.
그러려면 서로 조심해야만 할 겁니다.”
“물론이죠.”
나오미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우린 미국, 일본, 중국까지 상대해야 될 테니까요. 그리고…….”
눈을 좁혀 뜬 나오미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저는 북한보다 한국 정치권이 걱정되더군요. 괜찮겠어요?”
“아, 그럼요.”
서동수가 자신 있게 대답하고 나서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말문이 막힐 때의 버릇인데 오랜만에 나왔다.
그만큼 나오미 앞에서 가면을 벗어놓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본 나오미도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러면 가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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