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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장 신라 9

오늘의 쉼터 2014. 11. 16. 21:56

제30장 신라 9 

 

 

 

충신은 꺼져가는 목숨을 붙잡고 자신이 죽은 이후 사직의 안위를 걱정했으나 임금은

성충이 지어 올린 글을 읽자 그 자리에서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말았다.

“끝까지 궤변을 늘어놓고 가다니 독한 놈이다!

이는 성충이 자신의 본심을 감추려고 꾸민 수작이니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다.

두고 봐라,

성충이 말한 것과 같은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김유신이란 자가 또 몇몇 무리를 거느리고 국경을 어지럽힐 텐데,

그 정도야 우리 힘으로 능히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의자는 30년 가까이 자신을 보필했던 성충이 죽었다는 말에 마음이 애잔했는지

왜 그토록 빨리 죽었느냐고 꼬치꼬치 캐묻고 나서,

“비록 헛된 말로 편안한 세상을 어지럽히고 불충한 마음으로 과인의 심기를 해친 죄는 막중하나

기왕에 죽은 자를 나무라는 것은 제왕의 도리가 아니다.

성충의 시신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장사를 성대히 치르도록 허락하되

재물을 내려 뒤가 쓸쓸하지 않도록 보살펴주라.”

하고 말했다.

이때가 병진년 3월이었다.

성충이 죽고 나자 상좌평의 자리는 왕비의 집안인 천복에게 돌아갔다.

성충마저 한마디 말 때문에 옥사하는 판이니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려는 이는 더욱 없어졌다.

의자가 가는 곳엔 언제나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일들뿐이어서

임금은 정사가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전국 도처에서 사소한 비행들이 무수히 일어났는데 근본이 망하는 것은

바로 그 사소한 잘못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그런 나라를 목숨 걸고 지키려 할 리 만무했다.

백제는 그처럼 안으로부터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한편 성충이 죽던 바로 그해,

신라에서 일어난 일은 백제의 경우와 좋은 대조가 되었다.

당나라 숙위로 있던 김인문이 드디어 아버지가 임금이 된 신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이치를 찾아다니며 여러 차례 거병할 것을 종용했으나 여의치 않자

보란 듯이 장안을 떠나 금성으로 향했다.

인문은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 북변의 성곽 33개를 탈취했음에도

이치가 소정방과 정명진으로 하여금 겨우 기천의 군사로 요수를 건너는 시늉만 한 것에

대단히 실망했다.

그는 이치에게 말이 들어갈 만한 사람에게,

“우리는 선제와 맺은 맹약을 목숨처럼 중히 여겨 나라의 모든 문물과 제도를 당나라에 맞추고

스스로 당의 변방이 되고자 했으나 선제의 기업을 물려받은 황제가 선친의 유지를 받들지 않으니

낙담을 금할 길 없소.

대국의 신의가 어찌 아녀자의 하룻밤 맹세보다 못하더란 말씀이오?

귀국이 이렇게 믿음을 저버린다면 나 또한 황제 곁에 머물 까닭이 없소.

나도 돌아가면 일국의 왕자인데 무엇하러 남의 나라에서

불편한 잠과 거친 음식을 견디며 헛고생을 한단 말이오?”

하고는 곧바로 짐을 꾸렸다.

늘 조용하고 온순한 그였지만 때로는 과감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도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임금이 된 뒤 인문으로선 처음 밟는 고국 땅이었다.

귀국선을 타고 당항성 나루터에 내리는 순간 그는 달라진 인심을 피부로 실감했다.

떠날 때와는 달리 당항성 성주에서부터 말단 하리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이 몰려나와

귀국하는 왕자를 반갑게 맞이했고, 한산주 군주와 국원 소경의 책임자도 원로에 목을 축이라며

인편에 술과 고기를 보내왔다.

관리들은 서로 다투어 편한 잠자리를 마련한다,

금성까지 모실 안락한 수레를 준비한다,

심지어 객고를 풀 아리따운 여자들까지 동원하는 판이어서 인문은 돌연 우쭐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말로만 듣던 왕자 대접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뱃전에서 내릴 때부터 시작된 과분할 정도의 환대는 인문이 당은포로 7백릿길을 거쳐오는 동안

줄곧 이어졌다.

군의 경계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군주가 나와 영접했고, 마을에선 현령이 나와 절을 했으며,

머무는 숙소엔 온갖 진귀한 음식과 잊지 못할 잠자리가 마련되어 그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내 나라가 좋긴 좋구나.”

인문은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대궐에 이르렀다.

그런데 만인이 환대하고 영접하는 것과는 달리 정작 아버지의 반응은 예상과 크게 달랐다.

“노고가 컸다.”

인문으로부터 저간의 경위를 전해들은 임금은 5년 숙위사의 노고를 단 한 마디로 위로한 뒤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 네 아우들은 모두 변방에 나가서 낡은 성곽을 보수하는 일로 비지땀을 흘리는 중이다.

그들에게 벼슬을 내린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뜻이 아니라

힘든 노역을 시키는 데 소임을 분명히 하라는 뜻에서다.

너도 알겠지만 당을 움직이는 일이 어렵다면 결국은 우리 힘으로 백제를 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왕의 자식들이 솔선수범하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들이 나서서 목숨을 바쳐 싸우려고 하겠느냐?

네가 숙위사로 가 있었던 것은 네 아우들에 비하면 호사스러운 일이다.

이제 돌아왔으니 너 역시 예외일 수 없고, 더군다나 너는 태자를 제외하면 제일 연장자이니

누구보다 앞장서서 수고로움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내전에 들어가 어머니를 뵙고 나거든 곧 임지로 가거라.

마침 압량주에 장산성(獐山城:경산)을 지으려고 의논 중이다.”

춘추는 이제 막 돌아온 인문에게 압량주 군주 자리를 떠맡겨 장산성을 축조하라고 명령했다.

순간 인문은 아버지의 처사가 지나치게 야속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전으로 들어가 어머니 문명 왕후를 뵙고 한동안 반갑게 담소한 뒤,

“그런데 소자가 오늘 돌아왔으니 며칠 궐내에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아울러 왕명이 너무 야박하다며 슬그머니 불평을 늘어놓았더니 모후가 웃으며,

“궐에 있으면 네가 더 쉬기 어려울 게다.

태자는 차라리 아우들이 부럽다며 틈만 있으면 저도 노역을 시켜달라고 조르는데

그럼 네 형과 얘기를 한번 나눠보겠느냐?”

하였다. 인문이 그제야 법민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형님은 어디에 계시는지요?”

하니 모후가 법민은 아침에 눈을 뜨면 그때부터 삼궁을 두루 돌아다니며 국사를 보좌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노라고 자세히 일정을 설명한 뒤,

“오늘은 아마도 남산에 적송을 베어내 월성 밖에 궁방(弓房)을 차리는 일을 감독하러 나갔을 게다.

그런 일은 과외로 하는 것인데 뒤로 사무가 밀려 있어서 필경은 오늘도 3경 안에 잠들기는 글렀을 게야.”

하며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귀경길의 환대에 잠깐 평심을 잃었던 인문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화를 꿈꾸며 달려왔던 것이 스스로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인문은 얼굴을 붉히며 어머니에게 솔직히 말했다.

“소자가 잠시 생각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하룻밤만 어머니 곁에서 자고 내일 해가 뜨면 곧장 압량주로 가겠나이다.”

아들들에게 벼슬과 함께 중책을 맡겨 조정과 백성들의 수범을 보이도록 하는 춘추의 태도는

조야에 큰 호응을 얻었다.

짐승도 자식 귀한 줄은 아는 법인데 하물며 임금이 금쪽 같은 자식들을 죄 험지로 내몰아

직접 흙짐을 지게 하고 수레를 끌게 만드니 감동하지 않으려야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인문이 돌아오자 춘추는 다시 셋째 문왕을 당나라로 파견해 장안에 머물도록 지시했다.

심하게 외로움을 타서 귀국했던 문왕은 처음엔 이찬 벼슬에 왕자 노릇이 신바람이 나서

하루하루가 즐거웠으나 이내 고루(鼓樓)를 월성 안에 건립하는 일에 책임을 맡아

가을 한 철을 궁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한뎃잠을 자고 나자

차라리 숙위사가 그리워질 판이었다.

그런데 고루를 만들어 올리고 났더니

이번엔 승부 관리들과 전국을 돌며 군마를 기를 목장과 초지를 알아보라고 하여

겨울부터 반년이나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돌아다녔다.

문왕은 형 인문이 장안에서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제 쪽에서 먼저 부왕을 찾아가,

“아바마마, 장안에 숙위사가 없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형이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왔다면 이는 틀림없이 계집애 같은 이치가 삐칠 일입니다.”

하므로 춘추가 외롭다고 투덜대던 전날의 문왕을 떠올리고,

“그렇긴 하다만 네가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다 했느냐?”

하고서,

“올 가을이나 겨울쯤 네 아우 가운데 하나를 보낼까 궁리 중이다.”

했다. 그러자 문왕이 기겁을 하며,

“아우들은 어림도 없습니다. 소자가 아니고선 이치를 달랠 사람이 없나이다.

소자를 보내주십시오. 더군다나 소자는 좌무위장군이니 이미 당조의 내신이 아닙니까?”

하고 안색이 벌개서 달려들었다. 춘추가 웃으며,

“너야 산 설고 물 선 곳에서 지내는 숙위사가 체질에 맞지 않다고 진작부터 진저리를 치던

아이가 아니냐? 괜찮다.

그런 너를 어찌 다시 보내겠느냐?”

하자 문왕은 더욱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아바마마, 대사를 생각하소서!

소자가 숙위사를 싫다고 한 적은 없고 다만 부모형제가 보고 싶다고 말한 일은 있는데,

이제 부모형제를 실컷 보았으니 당분간 장안에 가서 지내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도 춘추가 웃기만 할 뿐 금세 허락을 하지 않으니 문왕은 더욱 애가 달아서,

“오뉴월 곁불도 쬐다 나면 서운하고 짖던 개도 죽고 나면 그립다고,

요즘엔 이치가 꿈에 부쩍 자주 나오는 것이 때론 그 덜 떨어진 듯한 면상을 보고 싶기까지 합니다.

소자가 이럴진대 이치라고 소자가 왜 안 보고 싶겠습니까?

두고 보십시오,

아바마마! 소자가 장안에 가서 이치를 재주껏 구워삶아 반드시 인문 형님이 못한 일을 해내겠습니다.

이치는 본래 단순하고 멍한 데가 있어서 인문 형님처럼 점잖게 무슨 말을 해가지곤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치 구슬리는 일은 소자한테 맡겨주십시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애걸복걸했다.

춘추는 몇 차례나 문왕에게 오금을 박은 뒤,

“하면 다신 외롭다느니 고생스럽다느니 하는 소리가 네 입에서 나오지 않겠느냐?”

“물론입니다. 그런 말이 나오면 소자의 입을 찢어주소서.”

하는 대답까지 듣고서야 드디어 그를 다시 장안으로 파견했다.

병진년에 살펴본 백제와 신라, 양국의 시속이 대강 이와 같았다.

 

당은 드디어 군사를 일으켰으나 백제 임금 의자는 계속해서 오기로 정사를 꾸려나갔다.

그는 아우에게 태자의 자리를 빼앗긴 둘째 아들 부여태가 예전에 비해 왕실의 위엄이

많이 위축되었다고 탄식하자

정사년(657년) 정월,

부여궁(扶餘躬)을 비롯해 41명이나 되는 자신의 서자 전부를 좌평으로 삼고

이들에게 모두 식읍(食邑)을 하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조치를 취했다.

고금의 어떤 나라에서도 예를 찾기 힘든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그동안 침묵이나 감언이설로 일관하던 신하들조차도

국정의 부당함을 간언하고 나섰다.

대대로 5, 6명에 불과하던 좌평을,

그것도 순전히 자신의 서자로만 41명이나 데려다 앉힌다는 것은 스스로 망하려고 들지 않는 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하들이 모처럼 한목소리로 임금의 처사를 성토했지만 의자는 이를 묵살하며 도리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임금의 자식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국사를 보필하고 조상의 기업을 돕는 것이 어찌 가상한 일이 아니랴. 당태종의 시대에도 10명이 넘는 아들이 각기 원근의 고을을 식읍으로 받아서 다스렸고,

소문을 들으니 신라에서도 김춘추의 자식들이 조정의 제일 높은 벼슬을 살며 제각기 성읍을 맡아

다스린다고 한다.

일문이 성하려면 자식이 늘고, 왕실이 번창하려면 왕자가 많아야 하는 것은 필연지사인데,

다행히 열성조의 음덕으로 나의 슬하에 40명이 넘는 아들들이 생겨났으니

백제의 앞날은 가히 탄탄대로가 아닐 바 없다.

대개 성대라고 말하는 때는 10여 명의 왕자가 왕업을 보좌했을 뿐이다.

40명이 넘는 성대 같은 것이 고금의 어느 시대에 또 있었던가?

이는 만인의 부러움을 살 지극히 아름다운 일로 오히려 귀신의 시샘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사택지적과 성충이 죽은 뒤 백제의 삼현(三賢) 가운데 마지막 남은 이는 흥수 하나였다.

그는 난신이 우글거리고 요부가 날뛰는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한다는 게 치욕스러워

골백번도 더 물러나고 싶었지만 한편 생각하면 그럴수록 더 임금을 끝까지 섬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기도 했다.

흥수는 그 두 가지 마음 가운데에서 갈등이 심했다.

물러나는 것은 지적이 이미 썼던 방법이요,

남아서 충성을 다하다가 죽는 것은 성충의 방법인데,

흥수는 성충이 걸어간 길을 더 높이 쳤다.

그래서일까.

창자가 뒤틀리는 꼴을 보고 만정이 떨어져서 사직을 하려고 결심한 날이면 번번이

꿈에 죽은 성충이 나타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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