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신라 8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성충에 대한 집요한 비난에도 좀처럼 바라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자
은고는 사뭇 정색을 하며 작정을 하고 장황한 말을 늘어놓았다.
“신첩의 말을 아녀자의 소견이라고 나무라지 말고 자세히 한번 들어보세요.
요즘 성충이 자꾸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해 쳐들어올 거라고 떠들고 다니는 것은
대왕께서도 잘 아실 테지요.
그래서 병장기를 끌어 모으고 군사를 길러야 한다는 게 성충의 오랜 주장이 아닙니까?
그러나 신첩이 보기엔 성충의 말처럼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해 우리를 치는 전쟁 같은 건
일어날 리 없습니다.
대왕께서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당이 숙적인 고구려를 지척에 두고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대군을 일으켜 우리를 친단 말인가요?
당태종이 있을 때도 그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지금의 당주는 여러 모로 그 아비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게 세간의 정평이 아닌지요?
게다가 당태종이 죽으면서 고구려조차도 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니
그 유조를 중히 여기는 당주가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를 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성충이 어떤 사람인데 이 이치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가 대전이 일어날 거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국정을 불안하게 만들고
민심을 흉흉하게 몰고 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의자는 은고의 말을 듣고 돌연 귀가 솔깃해졌다.
“비는 그 이유를 아시오?”
“알기에 꺼내는 말입니다.”
“이유가 무엇이오?”
“성충이 늘 하는 얘기 가운데 고구려와 탐라, 왜를 묶어 동맹을 꾀해야 한다는 합종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래서 재작년에 왜로 사신을 보내고 그곳의 실력자라는 중신겸족(中臣鎌足)에게
바둑판과 바둑알까지 선물하지 않았소?”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라니?”
“성충이 노리는 것은 고구려와 탐라가 아니라 왜입니다.
그는 흉흉한 소문을 퍼뜨려 대왕을 곤경에 빠뜨린 뒤 전쟁을 핑계로 양성시킨 군사들을 동원해
왜국의 부여풍(扶餘豊)을 옹립하려는 수작이 틀림없습니다.”
부여풍은 의자의 바로 밑에 아우였다.
한때 자신과 태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던 풍인지라
의자는 나이가 들어도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국에서 풍의 활약에 관한 좋은 소식이 들려올 때면 왠지 심드렁한 기분이 되곤 하던 그였다.
정사가 어려움에 빠진 뒤로 만일 풍이 임금이 되었다면 하는 생각이 누구보다 자신의 뇌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자격지심이었다.
의자는 누가 그런 소리를 한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잡아죽일 사람이었다.
은고가 성충을 탄핵하기로 결심한 뒤 노린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큰일에는 대범하지만 사소한 일에는 감성이 예민한 의자가 한때 자신과 보위를 두고 다투었던
풍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경쟁심을 지닌 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은고였다.
“저런 발칙한 놈을 보았나!”
은고의 예상대로 의자는 불같이 화를 냈다.
딴사람도 아닌 풍을 옹립하려 했다는 말에 의자는 앞뒤를 재어볼 겨를도 없었다.
그와 함께 젊어서 풍을 옹립하던 신하들의 면면과 부왕이 정사암의 효험을 역이용해가면서까지
보위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던 광경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성충에 대한 유일한 믿음마저 한 줌 연기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게 만일 사실이라면 내 이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의자는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시급히 일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세 치 혀로 팔족에게 쌓은 신망이 보통이 아니에요.”
“비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구려. 성충의 본심을 알아볼 방법이 이미 내게 있소.”
의자는 이튿날 중신들을 소집하고 모처럼 편전으로 나갔다.
그는 제일 상석에 앉은 성충을 지그시 내려다본 뒤 짐짓 온화한 말투로 물었다.
“경은 당태종의 치세를 어찌 평가하는가?”
돌연한 질문에 성충은 잠깐 임금을 쳐다보았다.
“말해보라, 정관지치가 어떠한가?”
임금이 재차 다그쳤다.
성충은 곧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말년에 비록 황폐한 일이 없지 않았으나 대체로 성대라고 신은 여기나이다.”
“하면 만일 은태자가 현무문에서 변고를 당하지 않았으면 당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가?”
“글쎄올습니다.”
“경은 현무문의 난이 있을 때 당태종의 가까이 있으면서 만사를 지켜보았을 테니 잘 알지 않겠는가?
짐이 새삼 궁금해 물어보는 것이니 기탄없이 말해보라.”
간밤에 내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던 성충은 임금의 말뜻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은태자는 여러 모로 그 아우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모르긴 하오나 만일 건성이 보위에 올랐다면 정관의 시대 같은 것은 뒤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국의 역사를 상정하건대 비록 인륜에는 어긋나지만 아우나 자식이 부족한 형이나
아비를 해치고 보위에 오르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겠구나.”
성충은 이때까지도 임금의 저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나라 환공 또한 형을 해하고 보위에 올랐으나 지금 이를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이다.
대의멸친이 참혹한 일이긴 하오나 그것이 여염이나 향당의 일이 아니옵고 국사와 사직의 경우일진대
후세의 평가는 오로지 군주의 자질과 치세의 성쇠만을 따지게 마련입니다.
수를 망친 양광과 같은 이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므로 일국의 군주를 논평함에는
앞뒤의 허물을 모두 통찰함이 마땅합니다.”
성충의 대답은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저의를 가지고 묻는 의자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그렇다면 나의 여러 아들 가운데 특별히 형보다 잘난 아우가 있어
뒷날 그 형을 해치는 것도 마찬가지겠구나?”
의자가 묻자 성충은 이때야말로 융의 복위를 거론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환공이나 양광, 당태종이 일어난 때는 모두 나라의 법제와 문물이 틀을 잡기 전인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하오나 우리나라의 사직은 이미 7백 년에 달하는 유구한 전통을 가졌사옵고 선왕이 계실 때
태자를 세우는 전통 또한 자리를 잡은 지 오랩니다.
그러므로 선대가 후대를 잘 살펴서 보위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난정이 도래하고 사직이 위태로울 수 있나이다.
후대를 결정하는 것은 그만큼 중대한 일이올습니다.”
성충은 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지만 의자는 이를 자신과 풍의 비유로 받아들였다.
무서운 오해가 아닐 수 없었다.
은고로부터 확실히 세뇌당한 왕은 야릇한 웃음을 머금고 다시 물었다.
“경은 짐의 아우 부여풍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충은 아무 의심 없이 대답했다.
“왕제께서 왜국에 계신 것은 우리나라로선 큰 행운이옵니다.
그가 있기에 겸족 대신을 압박하여 합종계를 논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그를 불러 본국의 임금으로 삼고 싶지는 않는가?”
순간 성충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제야 까닭을 알 수 없던 임금의 생경한 질문들이 한줄에 꿰어지면서 머릿속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마마, 무슨 말씀이신지 어리석은 신으로선 짐작조차 하기 어렵나이다!”
“시끄럽다, 이놈아! 네가 꾸미고 있는 일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의자는 격노한 안색으로 우레 같은 호통을 퍼부었다.
“당군이 쳐들어올 거라는 허튼수작으로 민심을 뒤흔들고 왕실과 조정을 교란시켜
결국에는 풍으로 하여금 보위를 잇겠다는 게 너의 계략이 아닌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그런 오해를 하셨는지, 신이 잘못한 일이 대체 무엇이옵니까?”
억울한 성충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물었으나 의자의 노한 표정과 싸늘한 말투는
평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네 죄는 스스로 잘 알 것이다!
전운을 조장해 민심을 해치고,
그 어지러움을 선동해 군사를 끌어모은 뒤 합종계로 부여풍을 끌어들여
나를 몰아내려는 것이 너의 수작이 아니더냐?
그러나 미안하지만 당군이 쳐들어올 까닭은 없다!
당나라가 군사를 낸다는 건 순전히 네가 꾸민 말이다!”
의자가 단언하자 성충이 땅에 엎드려 피끓는 소리로 진언했다.
“당나라는 조만간 틀림없이 군사를 일으키려 들 것입니다!
마마, 성충이 오해를 받는 것은 두렵지 않사오나 이 말만은 믿어주십시오!”
“닥쳐라! 짐은 지난 16년간 단 한 해도 당에 조공을 거른 일이 없고,
당태종이 요동을 정벌할 때는 고구려와 맺은 맹약을 저버리면서까지 갑옷을 지어 바쳤다.
더구나 이세민의 유조로 천적인 고구려를 치기도 어렵게 된 당이 왜 느닷없이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를 친단 말인가?
아니 설령 백 보를 양보하더라도, 만일 그럴 기미가 있다면 수십 년간 장안에 숙위사신으로 가 있는
복신으로부터 무슨 전갈이 왔어야 하지 않겠는가?
장안의 복신도 모르는 일을 이곳에 앉아서 네가 무슨 수로 그처럼 명확히 안단 말이냐?
그러니 죄다 너의 개수작일 뿐이다!”
성충이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고 했으나 의자는 팔을 휘둘러 성충의 입을 막았다.
“여봐라, 저놈을 당장 하옥시키고 바른 말이 나올 때가지 쌀 한 톨, 물 한 모금도 넣어주지 마라!
내 기어코 흉악한 저놈의 배를 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검은 속셈을 밝은 햇살 아래 여지없이 드러내고야 말리라!
나는 지금껏 저를 충신이라고 믿어서 술 한 모금 마시는 것도 눈치를 보았고,
날이면 날마다 귀가 따갑게 짖어대는 소리도 오직 충정에서 하는 말로 믿어 참아왔더니
이처럼 배신을 할 줄 누가 알았더란 말인가!”
왕의 옥음은 더욱 고조되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끌어내어 옥에 가두라!
거역하는 놈이나 두둔하는 놈이 있으면 같은 패로 간주할 것이니라!”
믿었던 만큼 증오도 컸던 탓일까.
의자의 진노는 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한결같이 임금의 서슬에 주눅이 들어버렸다.
오죽하면 성충과 친한 흥수조차 말 한 마디를 거들지 못했다.
성충은 그렇게 개처럼 끌려나갔다.
30년 충정에 뒤로 남은 것은 불충의 모함과 치욕스러운 감옥살이,
그는 군사들에게 팔을 이끌려 나가며 허공을 향해 허탈하게 웃었다.
“부모가 올바르지 않으면 자식들을 모두 불효자로 만들고,
임금이 그릇되면 만조가 불충의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아아, 7백 년 백제 사직이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성충은 이 무렵 집에서 약을 달이고 수시로 의원의 도움을 받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다.
아우 윤충을 잃은 충격에다 몇 년째 정사를 팽개친 임금을 대신해 국사를 돌보느라
격무에 시달린 탓이었다.
의원은 성충을 볼 때마다 몸부터 돌볼 것을 권유했지만 성충은 행여 대궐에 소문이 들어가
임금의 심려를 끼칠까봐 도리어 의원에게 입단속을 시키곤 했다.
의원이 진단한 성충의 몇 가지 병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소갈(消渴),
언제부턴가 자주 목이 마르고 오줌을 누고 나면 개미가 새카맣게 모여들곤 했다.
허기를 느끼면 손발이 심하게 떨려 주체할 수가 없었으므로 성충은 관복에 주머니를 만들어서
몰래 쌀을 넣고 다니며 우물거렸다.
그런데 옥에 가둔 뒤로 쌀 한 톨, 물 한 모금 주지 않으니
금방 기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성충은 갈증과 배고픔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사시나무처럼 사지를 떨며 울부짖다가
몇 번이나 혼절을 거듭했다.
그렇게 사나흘이 지나갔을 때 성충은 돌연 옥지기에게 지필묵을 청하였다.
“고백을 하려 하니 갖다주시게.”
옥지기가 성충의 말을 위에 전하자 임금은 기꺼이 이를 허락했다.
지필묵이 당도하자 성충은 대궐을 향해 두 번 절한 뒤 마지막 정기를 짜내어
다음과 같이 표문을 지었다.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법이오니 마지막으로 대왕께 한말씀을 올리고 죽으려 합니다.
신은 늘 시세의 변천을 세밀히 관찰하였는데 전쟁은 머지 않은 때에 반드시 일어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용병에는 지리를 살피는 것이 제일 중하옵고,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사직을 보전하려면 절대로 백강 상류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나당 연합군이 양쪽에서 협공할 때는 육로(陸路)로는 침현(沈峴:충남 대덕군 마도령)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금강 하류, 장항) 연안의 험난한 곳에
의거해 막아 친다면 능히 승산이 있나이다.
대왕께서는 신의 말을 부디 잊지 마소서.
쓰기를 마친 성충은 그 자리에서 모로 쓰러져 얼마 뒤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