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신라 7
원효가 나타나기 전까지 불교는 소수의 벼슬아치와 권문세가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원효가 광대들로부터 얻은 괴상한 박을 두드리며 화엄경의 구절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다니면서 저잣거리의 몽매한 무리들도 다 부처의 이름을 알았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사람들은 천재 스님 원효의 기행을 무애행(無碍行)이라고 불렀다.
특히 그가 주장한 화쟁론(和諍論)은 민심을 하나로 아우르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염정불이(染淨不二)와 진속일여(眞俗一如).
그랬다.
그에게 이르면 모든 것이 하나였다.
감로수와 해골바가지의 물이 다르지 않듯 그를 통하면 맑고 탁한 것이 하나요,
높고 낮은 것이 한가지며, 성(聖)과 속(俗)이 같고, 부귀와 빈천이 마찬가지였다.
남자와 여자, 많이 배운 자와 무식한 자, 임금과 백성, 주인과 종, 늙은이와 어린이가
모두 마음 가운데 있는 철저한 허상일 뿐 실은 똑같은 것이라고 원효는 말했다.
심지어 백제 포로를 구박하는 사람 앞에서는 신라와 백제 또한 둘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극락과 불국정토가 모두 우리 마음 가운데 있다.
마음이 편하면 이곳이 극락이요,
내 집이 불국정토다.
누구를 미워하고 무엇을 괴로워한단 말씀인가?
술을 먹고도 물을 마셨다고 생각하면 마신 것은 물이요,
물을 마시고도 술을 마셨다고 생각하면 마신 것은 술이다.
부처도 중생도 다 내 마음에 있을 뿐이다.”
“중관이니 유식이니 하는 것들은 보내기만 하고 두루 미치지 않거나 주기만 하고 빼앗지 않는 사상이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기신론이다. 기신론은 이문일심(二門一心)의 법을 요체로 삼고 있다.
이문 안에 만 가지 뜻을 받아들이면서도 어지럽지 않고, 무량한 뜻이 결국 한마음으로 혼융되어 있으니, 펼치는 것과 합치는 것이 자유자재하고, 세우는 것도 깨뜨리는 것도 걸림이 없으므로,
펼쳐도 번잡하지 않고, 합해도 옹색하지 않으며, 세워도 얻음이 없고, 깨뜨려도 잃지 않는
저 마명의 뛰어난 술법, 이것이 곧 기신론의 종체다.”
중생을 만나면 중생의 말로, 법사를 만나면 도저한 법어로 원효는 승속(僧俗)을 두루 일깨웠다.
그의 기신론은 당대에 논쟁을 주도했던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의 대립을 완전히 해소시키는
탁월한 이론이기도 했다.
이런 원효의 행각을 뒤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던 낭지는 그를 찾아와 탄식하는 고승들에게,
“내가 취산에서 일찍이 가섭불(迦葉佛) 때의 절터를 발견하고 땅을 파서 등항(燈缸) 두 개를 얻었는데
그 하나가 원효다.
그대들은 대저 무엇을 근심하는가?
옛날에 원광이 세속오계를 지어 화랑들을 훈육한 것이나 오늘날 원효가 저자에서
표주박을 두드리는 것이 매양 한가지로다.”
하는 말로 제자의 뒤를 거들곤 했다.
원효의 언행과 사상은 무서운 속도로 민심을 파고들었다.
원효가 지나간 거리는 잔칫집과 같았고,
그가 놀고 간 마을에선 남녀노소가 모두 신바람이 났다.
그는 불법을 말했으나 이것은 또한 국사(國事)였다.
그에게 이르면 불사가 국사요,
국사가 불사인 셈이었다.
춘추왕은 일찍부터 스승 담날의 아들인 원효를 잘 알았다.
게다가 원효가 저잣거리를 떠돌며 민심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어루만져 자신의 왕업을 도와주고 있으니
소문을 들을 때마다 기특하고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임금으로선 하지 못할 일을 원효가 나타나 해주는 셈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궐 밖에서 소문을 물어온 자가,
“기승 원효가 드디어 남산에 나타났는데 여전히 이상한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춘다고 합니다.”
하고서,
“그런데 이번에 원효가 지어 부르는 노래는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고들 하나이다.”
하니 춘추가 그에게 무슨 노래냐고 하문했다.
그가 전하는 노래의 내용은 이랬다.
누가 내게 자루가 빠질 만한 도끼자국을 빌려준다면
내가 거대한 기둥으로 그것을 찍고 갈라볼 텐데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때는 바야흐로 전장에서 죽은 흠운을 추모하는 양산가가 크게 유행할 때였다.
춘추는 신하들이 전하는 노래 내용을 듣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원효가 왜 그런 음탕한 노래를 지어 부르는지 그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양산가를 부르는 백성들은 남편인 흠운을 떠나보내고 젊은 나이에 홀로 지내는
요석궁의 공주를 매우 측은히 여기고 있었다.
원효의 뜻을 알아차린 춘추는 점잖은 말로 그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애썼다.
아무리 승속의 경계를 일거에 무너뜨린 원효라지만 사문의 명성을 훼손해가면서까지
조야(朝野)의 간격을 없애고 상한 민심을 어루만지려는 뜻이 임금으로선 가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대사가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서 어진 아들을 낳고 싶다는 뜻인 듯하오.
나라에 큰 현인이 나온다면 그 이익이 어찌 막대하지 않겠소.”
신하들은 임금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춘추는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데려오도록 했다.
왕명을 받은 궁리가 대궐 밖으로 달려가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을 거쳐 시정의 문천교(蚊川橋)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 뒤로 구름 같은 인파가 따르고 있어 궁리는 쉽게 원효를 찾아냈다.
“이보시오, 대사!”
궁리가 인파를 헤치고 원효를 향해 팔을 흔드는 순간 그는 갑자기 다리 밑으로 뛰어들어
강물에 풍덩 몸을 던졌다.
당황한 궁리가 급히 원효를 끌어올려 대왕의 뜻을 전하고 함께 대궐로 들어오니
임금이 원효의 젖은 행색을 보고 크게 놀라며,
“어서 요석궁으로 모셔가서 젖은 옷을 말리게 하라.”
하고 홀로 된 공주의 거처로 데려가도록 했다.
뒷날 설총을 낳은 원효와 요석 공주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백제와 신라, 양국간의 상반된 분위기는 병진년(656년)에 이르러 절정으로 치달았다.
양국은 바로 이 해를 분기점으로 운명이 갈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제의 상좌평 성충은 나라 안팎을 엄습하는 수상하고 불길한 기운을 간파하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 안에 나도는 온갖 구설은 망조가 분명했고, 김춘추가 임금이 된 뒤 그 아들들이 잇달아
장안을 들락거리고 발빠르게 국경의 성곽을 손질한다는 나라 밖의 소문도 예사로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김춘추가 신라 임금이 되면서부터 노심초사에 빠졌다.
그가 우려하던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 셈이었다.
신라에 대한 원한과 분노로 말하면 그 또한 누구 못지않은 사람이었다.
도살성에서 아우 윤충을 잃은 뒤로 단 한 차례도 밥을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고,
손자를 보았을 때도 웃지 않았던 그였다.
마음 같아서는 시급히 군사를 부려 신라를 땅에 묻고 싶은 욕심이 왜 없으랴.
그러나 나라 하나를 쳐서 없애는 것은 빈틈없는 계획과 치밀한 전략에 천기까지 살펴야 하는
천지간의 중대사, 먼저 사람이 할 일을 끝내놓은 연후에 하늘의 뜻을 빌어야 했다.
그럼에도 임금은 골치가 아프다는 핑계로 정사를 돌보지 않는 날이 늘어나고,
갈수록 신하와 백성들의 신망을 잃어갔다.
“공이 상좌평이 아닌가? 만사는 공이 다 알아서 하라.”
난신을 몰아내고 악정의 폐단을 고치자는 간언에도,
국고를 헐어 군자(軍資)를 마련하거나 군역 비리를 바로잡아 강군을 기르자는 제안에도
임금은 오로지 그렇게 응대했다.
언뜻 보기엔 국정의 모든 권한이 자신에게 있는 듯했다.
그러나 정작 윤허를 얻으려고 내전을 찾아가면 일을 처리하는 것은 왕비 은고였다.
“곡내부의 대신을 왜 몰아내야 합니까?”
“농정을 망친 책임을 물어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농정을 망친 책임이 곡내부 대신 한 사람에게만 있습니까?”
“마마, 부처의 수장이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옵니다.”
“곡내부 대신 위에는 내관의 수장이 있고, 내관의 수장 위에는 내외관의 수장인 공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공의 책임은 누가 묻습니까?”
왕비도 성충의 경륜과 지략이 대단한 줄은 잘 알고 있었다.
말미엔 언제나 이런 식의 다독거림도 잊지는 않았다.
“상좌평을 문책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시말과 근원을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는 얘기지요.
본래 농정이란 기후와 절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일로 한 해 농사의 풍흉을 가지고
사람을 문책하기엔 야박스런 점이 많습니다.
정사가 관후해야지 야박해서야 되겠습니까?”
정사는 결코 자신의 손안에 있지 않았다.
성충은 갈수록 의욕이 꺾이고 기운이 빠졌다.
그러던 차에 태자마저 바뀌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 어처구니없는 모함의 배후에 왕비 은고가 있는 것을 성충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부여융이 쫓겨난 직후부터 임금에게 전후시말을 잘 따져 재고할 것을 극간했다.
“태자는 나라의 희망이요 사직의 기둥입니다.
태자께옵서 궐 밖의 사람을 사서 사사로이 공역을 일으킨 것이 아닐진대 역사를 동원한
목부 관리를 불러 물어보면 처음 일을 꾀한 자가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마마, 재량하여주사이다!”
성충의 충간을 임금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과인이 다 알아보았노라. 공역을 일으킨 자는 융이요,
그 처다.
조모가 돌아가신 마당에 제 사는 집이나 고칠 궁리를 하는 위인을 어찌 그냥 두고 본단 말인가?
알아볼 만큼 알아보고 처리한 일이니 그대는 과히 걱정하지 말라.”
하지만 성충의 간언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궁궐 남쪽의 정자 이름을 망해정이라고 지어 붙인 자가 왕비의 일문임을 알아내고
다시 임금에게 고했는데, 결국은 이 일로 은고의 미움을 사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은고는 여러 날에 걸쳐 성충이 어쩌면 부여융과 짜고 의자를 몰아내려 했을지 모른다고
왕을 구워삶기 시작했다.
그즈음 임금도 성충이 틈만 나면 술을 먹지 말라,
정사를 바로 펴라,
조만간 큰 전란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귀가 따갑도록 충간하는 말에 서서히 넌덜머리를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충을 상좌평에 그대로 둔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충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 답답해서 그가 융의 복위를 저토록 강력히 주장하겠어요?
조사를 해보면 십상팔구 뒤에 무언가가 있을 겁니다.”
은고의 말에 처음엔 웃으며,
“성충은 그런 인물이 아니오.”
하고 무시했던 왕도 계속해서 은고가,
“대왕께선 사람을 너무 깊이 믿어 탈이오.
도살성에서 아끼던 아우를 잃은 성충이 아닌가요?
그가 앙심을 품으려면 얼마든지 품을 이유가 있지요.”
“자식도 믿지 못하는 판국에 누구를 믿는단 말씀이오?
정사를 그렇게 오래 하시고도 조변석개하는 사람 마음을 그토록 모르시니 답답합니다.
조밥 먹다가 진력나면 콩밥 먹고, 콩밥 먹다 진력나면 다시 조밥 먹는 게 사람 마음이오.
진수성찬도 계속 먹으면 물릴 때 있고, 제아무리 절세미인도 며칠을 계속해서 품으면
보기 싫어지는 경험을 대왕께서도 이미 숱하게 하지 않았나요?
성충이 대왕과 피를 섞었소, 살을 섞었소?”
틈만 나면 성충을 좋지 않게 말하는 바람에 갈수록 마음에 틈이 생겼다.
은고는 거의 매일 밤 성충을 비난했다.
“나라의 권한이 너무 상좌평 한 사람에게 쏠려 있는 게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들은 말을 대왕께 고스란히 다 옮기면 아마도 놀라 자빠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거예요.”
마치 뒤로 대단한 비행이라도 있는 듯한 이런 말은 성충에 대한 왕의 믿음을 근본부터
조금씩 뒤흔들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