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신라 6
백제의 시속이 이러할 때 국경을 마주한 신라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알천이 춘추에게 임금 자리를 극구 양보하고 춘추가 세 번 사양 끝에 할 수 없이 보위에 올랐다는
미담이 전해지면서 백성들은 가히 살맛나는 세상을 만났다고 입을 모았다.
그처럼 아름답고 욕심 없는 사람들이 조정대사를 맡고 나라를 다스리니
백성들 살림살이도 한결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불땐 구들장처럼 서서히 달아올랐다.
그 뒤로 민간에 나도는 소문도 그른 것보다는 좋은 것이 많았다.
임금이 침식을 걸러 가며 정사를 살핀다거나 대신들이 아예 별궁에서 기숙한다는 것도
백성들이 듣기엔 나라가 흥할 조짐이지 망할 조짐은 아니었다.
임금의 자식들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험한 물길을 건너 당나라를 번갈아 다닌다는
소문도 백성들에겐 흐뭇한 얘기였고, 전쟁이 났을 때 임금의 사위가 앞장서서
전장에 나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는 점도 이미 오랜 전란으로 남편과 자식을 잃은
많은 유족들에겐 작은 위안거리가 되었다.
특히 양산의 조천성에서 죽은 국서 김흠운의 명성은 날로 커져갔다.
흠운과 그 벗들의 시신이 거적에 덮여 경사로 돌아오자
임금은 과부가 된 공주를 앞세우고 대궐 밖에까지 나와 부녀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니
이를 구경하는 사람치고 따라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흠운과 예파에게 일길찬을, 보용나와 적득에게는 대내마 벼슬을 추증해
뒤를 보살펴주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신라 백성들 사이에선 흠운의 기개를 칭송하고
그의 장엄한 죽음을 기리는 양산가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들에 나는 곡식엔 들이 들었고, 산에 연 열매엔 산이 든다고 했다.
평원에서 자란 말은 평지를 잘 달리고, 물가에서 기른 말은 진창길에 빠른 법이다.
해안 절벽의 소나무가 굽은 탓도, 기름진 옥토에 장송거목이 곧은 것도
모두 본성이 지세에 순종하는 까닭이 아니던가.
들 넓고 양식 많은 백제 지형에 비하면 신라는 산이 많고 땅이 거칠어 사람들의 성정이 괄괄하고 드셌다. 백제인이 빚은 도기(陶器)는 들판 멀리 능선처럼 미려하고 유순했으나 신라인의 솜씨는
산 첩첩 물 첩첩 산세를 닮아 선이 곧고 섬세했다.
왕흥사의 돌탑이 여인의 옷맵시와 같다면 황룡사 구층탑은 투박하고 장대했으며,
미륵사 본존불이 자애로운 여인의 얼굴이라면 흥륜사 부처는 민첩한 재인(才人)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음이요, 하나는 양이었다.
특히 신라인들은 한번 흥이 나면 물불과 생사를 가리지 않고 흥대로 살려는 기질들이 있었다.
일찍이 법사 원광이 세속 오계에 임전무퇴를 집어넣어 화랑들을 훈육한 것도 신라인의
이같은 기질을 간파해 여러 날 먹고 마시며 놀다가 그 어우러진 힘을 전장에서 폭발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당장 자신이 먹을 것이 없어도 길에서 낯선 사람이 굶는 것에 감흥을 받기만 하면 가진 것을 남김없이
퍼주는 것이 신라인의 욱기였다.
매사가 그러하듯 다스리는 사람이 잘 쓰면 훌륭한 잠재력이요,
잘 못 쓰면 쉽게 무너질 망조이기도 했다.
춘추왕이 즉위한 뒤로 신라의 분위기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왕실이 어지럽고 정사가 문란할 때는 엄벌을 공포하고 창칼을 들이밀며 위협해도
군역에 나가지 않던 사람들이 자발하여 징집장을 기웃거렸고,
조세를 부과하면 들어오는 것이 오히려 남았으며, 임금이 죽어도 울지 않던 백성들이
흠운의 처가 홀로 되어 요석궁(瑤石宮)에 기거한다는 말에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성질 급하고 흥이 많은 신라인들은 수십 년 악정고초를 잊어버리는 것도 실로 잠깐이었다.
왕실이 모범을 보이고 정사가 바로 서니 백성들 마음 돌아오는 것이 마치 벼릿줄을 한 번 들어올려
난마처럼 꼬인 그물을 펴는 것과 같았다.
이런 민간의 달아오른 분위기에 불을 지핀 이가 바로 원효(元曉:새벽이라는 뜻)라는 젊은 중이었다.
원효는 당대 제일의 유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대내마 설담날(薛談捺)의 아들로 어려서는
이름이 서당(誓幢)이었는데, 진평왕 39년인 정축(617년)에 압량군 남쪽 불지촌(佛地村)의 북쪽 마을인
율곡(栗谷)의 사라수(娑羅樹)9) 아래에서 태어났다.
뒷날 그의 행장에 경사 사람이라고 한 것은 그의 조부인 잉피공(仍皮公)과 아버지 담날이
모두 금성에서 벼슬을 살았기 때문이다.
처음 그 어머니가 임신할 때 유성(流星)이 품에 들어오는 신비로운 꿈을 꾸었는데 출산하는 날에는
영롱한 오색 기운이 땅을 뒤덮어 일문의 많은 사람들은 시초부터 아이의 앞날이 비범할 것을 예측했다.
이렇게 태어난 서당 원효는 과연 일찍부터 총명함을 드러내어 스승을 두지 않고도 혼자 배웠다.
한때 춘추를 가르쳤던 대학자 담날이 자식을 데리고 앉아 몇 번이나 유가의 경전을 가르치려 했으나
그때마다 원효가 가르치려는 것을 먼저 말하므로 드디어는 그 아버지가 책을 집어던지며,
“어떻게 된 아이가 공부를 하고 나이를 먹어야 아는 것을 미리부터 안단 말인가!
가르치려고 해도 가르칠 것이 없으니 아비로선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니다.”
하고 탄식했다.
원효가 10여 세쯤 되었을 때 하루는 취산에 사는 이승 낭지가 찾아와 담날에게 말하기를,
“자네 집에 아이는 비록 자네가 낳았지만 내게 주시게나.
그놈 잘 키워 제자 삼으려고 내가 아직 죽지 못했다네.”
하고 청하니 담날이 웃으며,
“큰스님께서 특별히 청하시니 저로선 영광이지만 가르칠 게 있을 지 의문입니다.”
하고서 자신이 아이를 몇 번이나 가르치려다가 결국 포기한 일을 털어놓았다.
낭지가 담날의 말을 다 듣고는,
“그렇다면 나 또한 가르칠 게 없을 테니 잘되었네.
가르치지 않고 제자를 삼는다면 한입 고생은 덜었고,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가르치는 묘미 또한 재미날 테니 나로선 일거양득일세.”
하고 기뻐하였다.
그 뒤로 낭지가 걸핏하면 담날의 집에 나타나 원효를 데리고 며칠씩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는데,
원효가 낭지를 따라갔다가 돌아오면 자주 오묘한 소리를 입에 담아서 담날조차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렇게 자란 원효가 선덕왕 말년,
스물아홉 살 나이에 황룡사로 출가하며 자신의 집을 불문에 희사해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고
자신이 태어난 나무 옆에 다시 절을 세워 사라사(娑羅寺)라 했다.
그는 낭지의 문하에서 만난 학승 의상(義湘)과 더불어 형제처럼 지내며 함께 뜻을 키웠다.
의상은 속명이 김일지(金日芝)로 원효보다는 여덟 살이 어렸다.
그는 신라 왕가의 자제였는데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원효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글을 많이 읽어
유전(儒典)에 통달하고 황노학(黃老學)과 불전(佛典)에도 무불통지하였다.
문무를 겸전한 의상은 일찍이 삼한을 평정하는 데 보탬이 되기로 결심하고 화랑도에 들어가
호연지기를 길렀는데, 역시 낭지를 만난 뒤로 그의 제자가 되었다.
매사에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원효와 진지하고 듬직한 의상은 묘한 대비와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아끼고 존중했다.
세속에서는 형제의 의를 맺고 불문에 들어온 뒤론 도반의 열정으로 뭉친 두 사람은
고달산 경덕사에서 보덕화상에게 열반경과 유마경, 법화경 따위를 배우다가
진덕왕 4년인 경술(650년)에 만법이 횡행한다는 당나라 장안에서 유학할 결심으로 금성을 떠났다.
이들은 사문에게 비교적 관대한 국경을 믿고 육로로 고구려를 거쳐 당으로 들어가려 했다.
내지를 거쳐 압록수까지는 무사히 통과했으나 뜻밖의 변고를 만난 것은 요동에서였다.
이때 요동은 당태종이 죽고 난 직후여서 그 어느 때보다 경비가 삼엄했다.
고구려 군사들은 두 사람을 승려로 가장한 첩자라고 오인해 한동안 징역을 살린 뒤
다시 신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한번 뜻이 꺾였다고 그만둘 수는 없는 법이었다.
유학에 실패한 이들은 그로부터 몇 해 뒤,
이번에는 당항성에서 상선을 얻어 타고 입당할 것을 결심했다.
하지만 그사이에 원효의 구법(求法)에 대한 생각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금성을 출발해 당항성으로 가는 도중에 길에서 큰비를 만났다.
게다가 날까지 어두워졌으므로 사방을 더듬어 비를 피할 만한 흙구덩이 하나를 찾아들었다.
처음엔 비가 그치는 대로 객관이라도 찾아갈 요량이었지만 비는 좀체 그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그 흙구덩이 안에서 밤을 지새기로 하고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몹시 갈증을 느낀 원효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으로 사방을 더듬어보니
마침 구덩이 밖에 바가지 하나가 손에 잡혔다.
원효는 빗물이 담긴 그 바가지를 안으로 들여 벌컥벌컥 물을 마신 뒤 다시 잠을 잤는데,
이튿날 날이 밝아서 보니 잠을 잔 흙구덩이는 빗물에 손궤된 무덤이요,
새벽에 물을 떠 마신 바가지는 보통 바가지가 아니라 해골바가지였다.
순간 원효는 기겁을 하며 바깥으로 달려 나가 새벽에 먹은 물을 토해내려고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해댔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섬광처럼 뇌리를 치는 것이 있었다.
구해도 구해도 얻지 못하던 깨달음은 한순간에 그렇게 왔다.
마음을 따라 온갖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으면 사당과 무덤이 한가지로다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龕墳不二
그랬다.
모든 것은 마음이었다.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 어찌 스스로 더러울 수가 있으랴.
더러운 것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이요 헛된 분별이었다.
더러움도 아름다움도 결국은 마음이 짓는 허상, 그 경계를 벗어버리면 천하가 하나요,
일법(一法)이 만법(萬法)이며, 피아(彼我)가 한가지요,
원근(遠近)이 다르지 않을 터였다.
원효는 다시금 한 게송을 읊었다.
삼계엔 오직 마음뿐이요 만법엔 다만 식(識)이 있을 따름이다
마음 바깥에 대저 무엇이 있다고 따로 그것을 구할 것인가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원효는 그 길로 의상과 헤어져 금성으로 돌아왔다.
이미 마음속의 진리를 보았으니 굳이 당나라에까지 가서 구할 것이 없었다.
확철대오(廓徹大悟), 깨달은 마음만 닦으면 될 일이었다.
얻고자 했던 만법은 드넓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사방 한 치 자신의 방촌(方寸)에 들어 있었다.
한 번 크게 깨달은 원효는 돌아오는 길에 취산의 스승 낭지 법사를 찾았다.
원효가 절 문으로 들어서자 낭지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세 번 땅을 두드린 뒤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원효는 두 번 절하고 대답했다.
“무덤에서 나오는 길입니다.”
“세 번을 물었는데 답은 왜 두 번만 하느냐?”
“큰일 하나가 남았습니다.”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불생사(一道不生死)니라.”
“나는 마쳤으니 앞으로는 춤을 추고 노래를 할까 합니다.”
원효의 대답에 낭지는 파안대소했다.
“빨리도 왔구나.”
백수(白壽)도 훨씬 넘은 기승(奇僧)은 제자를 흐뭇한 눈길로 바라본 뒤 이렇게 말했다.
“초장관심론(初章觀心論)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지어보도록 해라.
그런 연후에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면 너를 함부로 비난할 자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장차 원효의 기이한 행장을 짐작한 낭지가 고승대덕과 사문들로부터 쏟아질 비난을
미리 막자는 뜻에서 권유한 말이었다.
낭지의 이런 권유는 이후 원효의 평생 지침이 되었다.
낭지의 곁에서 하루를 묵고 금성으로 돌아온 원효는 그로부터
얼마 뒤 반고사(磻高寺:울산)로 와서 스승이 말한 두 편의 소론(小論)을 지어 취산으로 보냈다.
그는 책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시문을 지어 스승의 깊은 뜻에 고마움을 표했다.
서쪽 골짜기 사미가 삼가 머리를 조아려
동악의 덕 높은 스님 전에 예를 올립니다
가는 티끌은 불어서 취산에 보태고
작은 물방울은 날려 용연에 던지나이다
西谷沙彌稽首禮 東岳山德高巖前
吹以細塵補鷲岳 飛以微滴投龍淵
이때부터 원효의 일평생은 수많은 경전의 집필과, 백성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강론하고
함께 어울려 춤추며 노래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조용한 산문에 들어 붓을 들고 불서(佛書)를 저술할 때는 경전에 대한 정통함과 해박함이
고승대덕의 기를 죽였고, 발길 닿는 대로 경향 각지를 누비며 난장에서 백성들과 춤추고 노래할 때는
어떤 광대보다 신명나게 놀았다.
원효가 나타나면 좋아하는 사람들은 절대다수의 가난한 자, 천민, 거지, 구종별배, 여자와 어린애,
그리고 전장에서 붙잡혀온 백제 포로들이었다.
산문의 고매한 승려가 땟국이 줄줄 흐르는 무지한 자들과 어울려 한바탕 몸을 부대끼며
소란을 떠노라면 더러 스스로 고귀한 자들이나 나이 많은 중들은 혀를 차며 흉을 보았지만
바로 그 사람이 황룡사 백고좌에 나타나 현묘한 불법을 설파하고 장엄한 화엄의 이치와
기신론(起信論) 따위를 강론할 때면 노안의 법사가 낯을 붉히고 모여든 학승들이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