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0장 신라 5

오늘의 쉼터 2014. 11. 15. 19:58

제30장 신라 5 

 

 

 

무해무득한 그 싸움이 끝나고 나서 임자네 집에 종살이를 하던 신라 사람 조미압이

임자의 아들 대신 군역에 나갔다가 용케 살아 돌아왔는데,

그렇게 한번 주인에게 공을 세운 뒤로는 걸핏하면 행방을 고하지도 않고 사라졌다가

수일 만에 다시 나타나곤 하니 집사가 이를 수상히 여기고 하루는 임자에게

직접 문죄할 것을 청하였다.

조미압이 비록 종이지만 포로로 잡혀오기 전에는 신라에서 고을 하나를 들어 다스리던

벼슬아치여서 집사 따위가 상대하기에는 아무래도 버거운 인물이었다.

이에 임자가 집사의 청을 받아들이고,

“그놈을 데려오라.”

하여 집사가 조미압을 데리고 임자의 방 문 앞에 이르렀다.

“네가 어디를 그처럼 쏘다니느냐?”

임자가 묻자 조미압이 옆에 집사의 눈치를 가만히 살핀 뒤에,

“저는 이제 백제 사람으로 살아야 할 몸이 아닙니까?

백제국의 백성이 되려면 나라의 풍속을 좀 알아야겠기에 여러 곳을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하는데 제법 대답하는 품이 의연했다.

“풍속을 알려면 어찌 며칠 다리품으로 되겠느냐?”

임자가 거듭 묻자 조미압은 여전히 집사의 눈치를 엿보며 대답했다.

“정작 그런 뜻으로 집을 나섰지만 또한 개와 말이 어찌 오랫동안 주인을 떠나 살겠습니까?”

임자는 조미압의 태도에서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음을 직감했다.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라.”

그는 집사의 요청과는 달리 조미압에게 더 묻지도 않고 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바로 그날 밤이었다.

이번에 조미압은 집사를 떼어놓고 혼자 조용히 임자의 방을 찾아왔다.

“나리께 긴히 여쭐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문 밖에서 조미압이 고하자

임자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금방 문을 열었다.

“어서 들어오라.”

조미압은 임자의 방으로 들어와 목소리를 잔뜩 낮춰 속삭였다.

“아까는 집사가 있어 감히 바른대로 아뢰지 못했으니 용서하십시오.

실은 신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왔는데 김유신 장군이 나리께 전하라며

제게 특별히 부탁한 말이 있었나이다.”

임자는 김유신이란 말에 흠칫 놀라는 눈치였으나 이내 특유의 표정 없는 기색으로 돌아와,

“김유신이 내게 무슨 말을 전하라던가?”

하고 되물었다.

조미압은 김유신과 자신이 옛날부터 퍽 절친한 사이처럼 잔뜩 사설을 늘어놓은 뒤에,

“제가 나리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줄을 알고 국가의 흥망은 가히 알 수 없으니

만약 백제가 먼저 망하면 나리께서 김유신 장군에게 의지하고,

신라가 먼저 망하면 김유신 장군이 나리께 의지하기로 저를 통해 약속을 하자고 제안했나이다.”

하며 도비천성에서 들은 말을 슬그머니 털어놓았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포로로 붙잡아온 자신의 집 종이 국경을 넘나들며 첩자 노릇을 했다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지만

창칼을 마주하고 대치한 상황에서 적장이 상대국의 병권을 쥔 재상에게 서로 신변 보장을

약조하자는 것은 역모에 버금갈 엄청난 소리였다.

배포가 컸던 조미압도 정작 말을 뱉은 그 순간만은 떨리는 마음으로 임자의 반응을 살폈다.

스스로 생각해도 원체 위태로운 내용이라 만일 임자가 충성스러운 인물이라면

그 자리에서 대로하여 목을 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임자의 표정엔 여느 때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한참을 묵묵히 앉았다가,

“그만 나가보라.”

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조미압은 임자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일찍 털어놓지 않았나 후회도 되었다.

아침에 입궐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저녁이면 퇴궐하는 사람을 훔쳐보았다.

행여 안채에서 무슨 소리라도 나면 숨소리를 죽이며 가슴을 졸였고,

임자의 명을 받은 백제 군사들이 들이닥쳐 자신을 붙잡아가는 꿈도 여러 차례 꾸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기를 무려 두어 달,

조미압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나리께서 찾으시니 어서 안채로 가보게.”

집사의 말을 듣는 순간 조미압은 가슴이 철렁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기도 했다.

말을 꺼내고 두어 달이나 지났으니 일이 잘되기보다는 틀어졌을 공산이 컸다.

그사이 임자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고,

아침에 일어나 대문만 열면 청탁을 하려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곤 했다.

그런 임자가 무엇이 답답해 나라가 망할 때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전에 네가 말한 김유신의 전언이 무엇이라고 했느냐?”

잔뜩 겁을 집어먹고 불려간 조미압에게 임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 중대한 일을 잊어버리고 되물을 리는 없었다.

그간 마음 고생을 톡톡히 치른 조미압은 두려운 마음에 두어 달 전과는 달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 번 더 유신의 말을 전했다.

그런데 얘기를 듣고 난 임자가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전한 말을 내가 잘 알았다.

금일로 너를 풀어줄 것이니 신라에 돌아가거든 김유신에게 그렇게 하자는 내 뜻을 알려라.”

조미압은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안도감이 밀려들면서 가슴이 마구 두방망이질을 쳤다.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 길로 임자의 집을 벗어나 재주껏 국경을 넘어 신라로 돌아왔다.

 

조미압을 통해 임자의 뜻과 백제의 실상을 소상히 전해들은 김유신은

이를 임금께 고하며 더욱 시급히 백제를 병탄할 것을 모의하였다.

“백제의 난정이 극에 달해 의자는 국사를 팽개친 지 이미 오래요,

권세는 모두 은고라는 요부의 손에서 놀아나는데,

좌평에서부터 말단 하리에 이르기까지 눈만 뜨면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터라

뇌물을 써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국경을 넘는 데도 쌀 두 말에 피륙 한 필이면 너끈하다고 하니

백제는 우리가 치지 않아도 스스로 망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시속이 이와 같을 때는 말 한 마디가 백만 군대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당을 움직여 정벌에 나설 때까지 신이 백제의 민심을 더욱 뒤흔들어놓을까 합니다.”

유신의 말에 춘추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묘책이라도 있습니까?”

“과거에 백제왕 부여장이 마 장수로 우리나라에 숨어들어와 왕실의 선화 공주를 꾀어내 간 수법을

이번에 신이 고스란히 백제에 돌려줄까 하나이다.”

이어 유신은 자신의 계책을 임금에게 털어놓았다.

이른바 이간계(離間計), 부여장이 선화의 미색과 그 성품이 자유분방한 사실에 근거해

과도한 헛소문을 지어 퍼뜨려 만인을 속인 것처럼 유신은 백제 조정에서 몇 가지 사실들을

취해 부허지설(浮虛之說)로써 사비왕실과 백성들 간을 더욱 멀어지게 만들고자 결심했다.

사실에 근거한 소문의 위력은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갈수록 커진다는 점을 이용한 위계(僞計)였다.

이때 김유신이 만들어낸 소문이 바로 ‘1천 궁녀설(一千宮女說)’이다.

유신은 의자왕에게 후궁이 많다는 점과 거기서 태어난 서자가 40명이 넘는다는 점을 알고

대궐의 궁녀가 1천 명이라는 헛소문을 지어냈다.

그는 이것을 먼저 신라에 퍼뜨린 뒤 국경을 넘나드는 상인과 승려들,

그리고 접경의 백성과 군사들의 입을 통해 백제로 말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의자의 처첩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숫자가 기껏해야 십수 명이요,

왕가의 시중을 드는 늙거나 어린 궁중 나인들까지 합치면 3백 명쯤 되었으므로

1천 궁녀란 터무니없는 숫자였으나 이 황당한 소문은 백제에 전해지는 순간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며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임금의 황음무도와 정사의 어지러움이 헛소문이 자라는 데 양분을 제공하고

파급되는 속도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입에서 입을 거치며 1천 궁녀는 금방 2천 궁녀가 되고, 2천 궁녀는 또다시 3천 궁녀가 되었다.

임금 한 사람이 무려 3천 명이나 되는 후궁을 거느리고 산다는 것이었다.

곰곰 생각해보면 삼척동자도 믿지 못할 말이었지만 본래 소문이란 거북이의 털도,

처녀 불알도 근거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어내는 법이었다.

“소문 들었나?”

“무슨 소문?”

“왕이 매일 밤마다 알밤처럼 벗겨서 입에 물고 노는 여자가 글쎄 1천 명이나 된디야.”

“예끼 이 사람, 그런 엉터리 헛소문이 어딨나? 임금 연세가 낼모레면 예순일세.”

“예순이면 먹을 것을 못 먹나, 설 것이 안 서나?

우리 이웃의 영감 중에도 칠순에 자식을 본 이가 아직 아랫도리가 시퍼래서

젊은 마누라를 밤마다 끼고 잔다네.”

처음엔 이렇게 시작된 소문이 곧 없는 놈 빚더미같이 늘어났다.

“육십 임금이 1천 명이나 되는 젊고 아리따운 궁녀들과 밤마다 희한한 짓을 벌인다네.”

“이 사람이 정신 나갔구만. 한수(漢水)에서 시조 대왕 멱감던 얘기는 왜 안하나?”

“무슨 소리야?”

“1천 궁녀는 옛말이고 실은 2천 명이나 된다네.”

“엊그제 남역 뱃사람한테 1천이라고 들었는데 그새 또 1천 명이 늘었나?”

“본래는 1천쯤 됐는데 왕비가 자식들을 낳고 하문이 헐거워져서 스스로 틈만 나면

새 궁녀를 뽑아 바친다네. 그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지.”

“누이 좋고 매부 좋다니?”

“생각해보게. 그렇게 해야 왕비는 승은(承恩)이 한 사람한테만 내리는 것을 막을 수 있어 좋고,

임금은 임금대로 매일 새 맛을 보니 양쪽이 다 좋을밖에. 은고 왕비가 그렇게 영악하다네.”

이런 얘기를 들은 사람이 사비 도성에 당도해 2천 궁녀 얘기를 전하자 들은 이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어디 촌에서 오시는 길인가 보오?”

“그걸 어찌 아오?”

“1, 2천 궁녀를 말하는 사람은 대개 시골서 올라오는 촌사람들이지요.”

“그럼 그게 아니란 말씀이오?”

“아니지요.”

“그럴 줄 알았소. 육십 임금이 무슨 수로 1천 명, 2천 명씩 새 여자를 데리고 놉니까?”

“허허, 앞으로 도성에서 누구랑 입이라도 섞으려면 3천 궁녀라고 말하시오.”

“뭐라구요? 궁녀가 그새 또 1천 명이나 늘었소?”

소문은 저잣거리에만 나도는 게 아니었다.

여염집 안방에서도 내외간에 이런 대화가 이어졌다.

“궁녀를 3천 명씩이나 뽑았다는데 어째서 우리만 모르고 있었을까?

방도 안 나붙고 간택령도 없었는데 어디서 그 많은 궁녀를 뽑았는지 모르겠수.”

“알음알음으로 몰래 뽑았겠지. 그게 뭐 자랑할 일이라고 궐문 열어놓고 뽑았을까.”

“임금이 젊은 궁녀 3천 명한테서 밤마다 양기를 빨아먹고 회춘을 한다던데 그게 참말일까요?”

“그 사정을 내가 어찌 알어? 무슨 곡절이 있으니 그러고들 살겠지.”

“또 궁녀를 뽑을 테지요?”

“뽑으면 뭐하게?”

“우리 집 작은 년이 인물이 곱지 않소?”

“인물 고우면? 궁녀 시키려구?”

“재수 좋아 임금님 사랑만 받아보슈, 우리라고 떵떵거리고 살지 못하란 법 있나.”

“이런 화상하곤. 거 속 모르는 소릴랑 제발 좀 작작 해, 지금 소문에 벌써 3천 궁녈세.”

“그러기에 하는 말이지, 3천이나 되는 판에 우리 애 하나 낄 자리 없을라고.”

“끼면 뭣해? 여잔 3천이고 임금은 하난데,

하루 서너 명씩 데리고 자도 몇 년 만에 차례가 돌아오나?

그러고 3천중에 섞어놓아 봐,

그 인물이 그 인물이라고. 거기서 승은을 바라느니

차라리 하늘에서 돈벼락 맞기 기다리는 게 낫지.”

“……그럴까요?”

“공연히 멀쩡한 딸년 신세에 초장부터 재갈 물리지 말고 웬만큼 전답 가진 놈 곳간지기도 좋으니

적당한 혼처나 구해 하루빨리 치울 궁리나 해. 어미 헛바람에 딸년까지 궁녀 바람 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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