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신라 4
김춘추가 신라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에도, 연개소문이 신라를 치자고 사신을 보냈을 때도
그는 상좌평 성충에게 만사를 일임하고 자신은 별궁이나 대왕포, 임류각 등지의 경치 좋은 곳에서
비빈들과 어울렸다.
그의 뇌리에 남은 것은 젊은 시절에 본 아버지 서동 대왕의 모습,
아리따운 궁녀와 신하들이 풍악을 울리며 한바탕 노래하고 춤이라도 출라치면
어느새 구름같이 모여든 백성들은 성대(聖代)라 찬탄하며 다들 박수를 치고 즐거워했다.
의자의 뇌리에 각인된 성대란 그런 것이었다.
임금이 춤을 추고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것,
어쩌면 의자는 일부러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불안감에 빠진 백성들을 위로하는 거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점은 시대가 달랐다는 사실이다.
임금도 그때의 임금이 아니었지만 백성들도 그때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때는 일어나는 신월(新月)의 시기요,
지금은 기우는 만월(滿月)의 형세였다.
같은 술자리라도 결국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모후를 잃고 난 의자의 고독한 마음을 파고든 사람은 왕비 은고였다.
의자는 보위에 오르기 전 스물도 되기 전에 맞이한 첫 부인에게서
아들 융(扶餘隆)과 태(扶餘泰), 효(扶餘孝)를 낳았다.
그런데 첫 부인은 의자가 태자로 책봉된 몇 해 뒤 산후 조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죽었고
두번째로 맞아들인 부인이 은고였다.
일찍 만난 의자의 첫 부인은 귀족을 경계하던 서동 대왕이 간택한 며느리답게
팔족 출신도 아닐뿐더러 인물도 그리 고운 편이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의자가 임금이 된 뒤 직접 고른 은고는 문벌 높은 집안에서 자란
전통적인 명가 목(木)씨 가문의 딸로 절세가인이란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젊은 시절의 선화비가 그토록 아름다웠을까.
은고를 본 사람은 누구나 그 자리에서 넋을 잃었고,
시선이라도 닿으면 사람은 고사하고 허공의 가지에 매달린 나뭇잎마저 파르르 떨 정도였다.
왕비가 되었을 때 은고의 나이 열아홉, 의자와는 무려 서른 살 가까이 차이가 났다.
그는 대궐에 들어와서 아들 연(扶餘演)과 수(扶餘秀)를 낳고 딸도 몇 사람을 보탰지만
나이가 들자 갈수록 정사에 참견하는 일이 많아졌다.
게다가 타고난 천성이 요염하고 영악해서 나이 많은 임금을 떡 주무르듯 주물렀고,
행여 잠자리에서 실수라도 하는 날엔 밤새 눈을 하얗게 흘기며 왕의 애를 태우곤 했다.
“용루(龍淚)가 너무 일찍 흘러 신첩은 아무 재미가 없나이다.”
“허허, 미안하오.”
“바닷가의 동굴은 점점 커지는데 거북이는 자꾸 대가리가 작아지니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하면 거북이가 동굴을 옮겨가야 하겠소?”
“그렇게 하시구려.”
“동굴도 비면 재미가 덜할걸?”
“비긴 왜 빕니까?”
“거북이가 나가서 오지 않으면 비지 별수 있소?”
“세상에 거북이가 어디 하나뿐인가요?
그러잖아도 늙은 거북이 나가면 들어와 살겠다는 젊은 거북이가 줄을 섰습니다.
신첩이 작고 아담한 새 동굴을 많이 구해드릴 테니
대왕께서도 신첩에게 맞는 젊은 거북이를 구해주시지요.”
“그게 본심이던가?”
“본심이지요 그럼.”
“정말?”
은고는 대낮에도 가끔 편전으로 내관을 보내어 임금에게 속옷이 젖었다는 은밀한 서신을 건네곤 했다.
임금이 왕비의 서찰을 받고 황급히 내전으로 들어갈 때는 대개 그럴 경우였다.
이 또한 의자에게는 부왕(父王)의 자취였다.
금실 유별하기로 온 나라에 소문이 자자했던 선왕 내외의 일이 후대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의자에게 그 아버지 서동 대왕은 다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전범(典範)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살성 패전 이후 임금이 정사에 싫증을 내면서 은고가 정사에 참여하는 비중은 점점 더 커졌다.
그는 자신의 친정 식구들을 대부분 벼슬자리에 앉혔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는 파직을 시켜 내쫓거나 심지어 없는 말로 임금을 구워삶아 죽이기까지 했다.
은고의 사촌인 임자가 하루아침에 병관좌평이 된 것이나,
계축년 대흉에도 곡내부(穀內部) 책임자였던 달솔 천복(千福)이 문책은커녕
도리어 벼슬이 높아진 것은 다 은고의 베갯머리공사 덕택이었고,
그 뒤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아무 죄 없는 법부(法部) 대신을 동시에서 처형한 것도 은고의 작품이었다.
한성 도읍기의 영화를 되찾으려는 자신의 친정 목씨 가문과 누대에 걸쳐 갈등 관계를 빚어온
사씨들을 압박해 좌평 지적을 물러나게 한 배경에도 실은 은고가 있었다.
그는 말끝마다 지적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듯이 말해 감정이 풍부한 임금의 질투심을 자극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은고는 자신이 직접 아리따운 궁인들을 선발해 왕을 모시도록 했고,
한 번이라도 임금을 모신 궁인은 살뜰히 보살펴서 아우처럼 거두니 내전의 기강이 모두
은고의 손에 들어와 아무도 그 권위를 넘보지 못했다.
조정 안팎에서 왕비의 처사에 대한 비판이 높았으나 임금의 총애는 여전했다.
선화 태후가 말년에 자주 은고를 불러 낯을 붉히며 꾸짖었지만
은고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나무라는 태후에게,
“저희 백제국의 법도는 그게 아닙니다.”
무엄하게도 선화의 출신지를 거론하며 대들기까지 했다.
열아홉에 국모가 되어 이때 서른 초반,
여자로서 한창 물이 오른 은고를 팔순을 바라보는 태후가 무슨 수로 당하랴.
선화는 말년에 은고 때문에 마음 고생을 톡톡히 하다가 임종할 때 여천을 몰아쉬며
국사에 관한 몇 마디 당부를 남겼지만 뒤늦게 달려온 왕에게 태후의 유언은 전해지지 않았다.
남자보다 더한 수완으로 이미 내전을 완전히 장악한 은고의 위세에 태후의 시종들이
겁을 집어먹은 탓이었다.
왕비 은고가 개입된 사건 중에 가장 큰 일은 병진년(656년)에 일어난 태자 교체였다.
본래 의자왕은 즉위 4년째인 갑진년(644년)에 전처 소생의 장남 융을 태자로 세워
후사를 분명히 정해놓았다.
그런데 은고는 처음부터 태자 융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젊은 왕비가 정사에 참견하는 일이 잦아지고 조정 안팎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융은 할머니인 선화 태후와 의논해 임금에게 자주 은고의 비행을 알렸다.
이 일로 은고와 융은 회복할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비록 어머니 노릇은 하고 있었지만 은고는 을해생(615년)인 융보다 나이가 여덟 살이나 어렸다.
그는 융을 태자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궁극적으론 자신이 낳은 왕자 연으로 보위를 잇고자 했다.
그러나 연은 아직 열 살이 조금 넘은 어린애였다.
이에 은고가 생각해낸 것은 전처 소생 가운데 자신과 사이가 비교적 원만한
셋째 왕자 효를 활용하는 계책이었다.
“한 번 태자를 바꾸면 또 바꿀 수 있다.
우선 융을 몰아내고 효를 세웠다가 뒷날 적당한 기회가 왔을 때 연으로 바꾼다면
전례가 있으니 누가 반대할 것인가.”
이것이 은고의 계략이었다.
그는 선화 태후가 죽은 직후 태자비 수연(水緣)을 불러 마치 임금이 태자궁을
화려하게 꾸밀 마음이 있는 것처럼 말한 뒤 직접 목부(木部)의 관리들까지 붙여서
공역을 일으키도록 지시했다.
이때는 태후가 별세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을묘년 2월이었다.
부여융은 공역이 시작되고야 사태를 알고,
“할마마마의 장례도 끝나지 않은 터에 무슨 공역이오?”
하고 수연에게 물으니 수연이 은고의 말을 그대로 전한 뒤,
“모후를 여의신 대왕의 심기가 몹시 쓸쓸하고 고적하신 모양입디다.
이럴 때일수록 왕실의 권위를 굳건히 세우고 슬하의 자식들을 돌보려는
마음은 당연하지 않겠나이까?”
하며 태자궁이 지나치게 낡고 초라한 것을 일일이 열거했다.
융은 왈칵 수상쩍은 느낌이 들었지만 국상 중이어서 궁궐을 수리하는 문제 따위로
비탄에 잠긴 아버지와 자세한 의논을 하지 못했다.
태자궁은 만인의 지탄을 받을 만큼 극히 치려(侈麗)하게 수리되었다.
왕궁보다도 오히려 태자궁의 자태가 더욱 화려하고 위엄이 있었다.
게다가 누구의 생각에선지 왕궁 남쪽에는 망해정(望海亭)이라고 이름을 붙인 전각도 지었는데,
그 모습 또한 서동 대왕 말년에 지은 왕흥사(王興寺)의 당우보다 더 장엄하고 미려했다.
때는 바야흐로 태후가 죽고, 민간에선 흉년의 고통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을 때였다.
공역이 시작되고 석 달쯤 시일이 흘러간 5월,
난데없이 어디선가 성마(붉은 말) 한 마리가 북악(北岳:성주산)의 오합사에 들어와 미친 듯이
절간을 뛰어다니며 울다가 5, 6일 만에 죽었다.
기변이었다.
기변 중에도 끔찍한 흉변이었다.
주역을 읽거나 도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신성한 붉은 말이 검은 까마귀가 모이는
오합사에 나타나 날뛰다가 죽은 것을 가리켜 왕이 죽거나 나라가 망할 징조라는 해석을 내놓곤 했다.
이 소문은 수일 뒤 의자왕의 귀에까지 이르렀다.
임금은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노발(怒髮)이 충관(衝冠)한 기색으로 당장 태자 융을 불러들였다.
“네가 이 어려운 때에 태자궁을 화려하게 꾸몄다는 게 사실이냐?”
융은 격노한 왕의 질문에 잠시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바마마께서 지시한 일이라고 들었나이다.”
그는 사실대로 아뢰었으나 왕의 노여움은 더욱 커졌다.
“너의 궁전이 내 궁을 위압한다는 것도 사실이더냐?”
그제야 융은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일은 이미 수습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어마마마께 알아보십시오. 그러면 소자에 대한 의심이 모두 풀릴 것입니다.”
“시끄럽다, 이놈아! 너의 궁전을 수리한 일을 왜 왕비에게 묻는단 말인가?”
의자는 용좌에서 성큼성큼 걸어 내려와 무릎을 꿇고 엎드린 태자의 앞에 우뚝 버티고 섰다.
“대궐 남쪽에 망해정이라는 전각도 필시 네가 지었으렷다?”
융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왕의 질문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아비의 왕업이 망하라고 왕궁에는 망해정을 짓고,
네 궁궐을 왕궁보다 더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급기야는 나라가 망할 거라는 요사스런 헛소문까지 지어 퍼뜨리니
그러고도 네가 자식이냐?”
격분한 왕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아들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태자의 오라관이 머리에서 굴러 떨어지자 왕은 그것을 발로 짓밟고 분을 이기지 못해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옛날에 수나라의 미치광이가 권세를 탐내어 제 아비를 살해하고,
죽은 당주 이세민이란 놈도 형제를 죽이고 아비를 협박해 보위에 올랐다더니
이제 보니 네놈이 바로 그런 놈들과 유사한 족속이다!
인의를 숭상하고 예도를 중시하는 우리 백제에,
그것도 하필이면 내 슬하에서 너와 같이 불충한 놈이 생길 줄은 차마 몰랐다.
어찌 너를 용서하랴?
사지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천하에 몹쓸 놈이 바로 너다!”
말을 마치자 의자는 융이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유사에게 명했다.
“저 희대의 패륜아 융이란 놈을 금일로 태자에서 폐하고
그 처첩과 자식들도 모조리 대궐에서 쫓아내어 두 번 다시는 짐의 눈에 띄는 일이 없도록 하라!
여죄를 추궁하고 죄상을 샅샅이 적간한다면 참수해야 마땅할 일들이 수없이 드러날 것이로되
짐은 아직 모후를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해 피를 보는 일이 탐탁찮다.
그 대신 저놈이 사는 집은 두 칸을 넘지 못하게 하고,
그 울타리에는 죄인의 거처임을 알리는 금표(禁標)를 설치해 만인이 침을 뱉고 지나다니는
개가 오줌을 누게 하되 관할 관수에게 엄명해 사람과 물자의 출입을 엄금토록 하라.
만일 금표를 넘어 출입하는 자가 있다면 참수형으로 다스릴 것이다!”
융으로선 토혈을 할 정도로 억울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융이 폐위되어 궐 밖으로 쫓겨나자 은고는 임금을 설득해 성정이 불같은
둘째 왕자 태를 제쳐두고 매사에 고분고분한 셋째 왕자 효를 태자로 삼게 만들었다.
은고가 뜻을 세우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국정이 은고의 치마폭에서 놀아나고 있는 한편에선 병관좌평 임자의 사저가 찾아오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거렸다.
은고의 위세가 높아지면서 임자의 세도도 덩달아 높아진 덕이었다.
‘궐 안에는 은고, 궐 밖에는 임자’라는 말이 나도는가 하면,
임자를 통하면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소리가 가랑잎처럼 무성한 소문이 되어 백제 전역에 휘날렸다.
병관좌평 위에 상좌평이 있었으나 세간에선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상좌평보다
후광의 위세가 태산 같은 병관좌평을 더 알아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신기한 것이 권세의 움직임은 무지렁이 백성들이 더 빨리 알아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임자란 위인은 본래부터 말수가 적고 뜻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좋은 일에도 웃지 않고 슬픈 일에도 울지 않으니 1년 3백 날 표정이 한결같은 자가 임자였다.
그런 임자를 가리켜 복장(腹腸)에 비수를 숨긴 자라는 이도, 속이 텅텅 비었다는 평도 있었는데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임자는 어떤 일에도 남과 의논하는 법이 없었다.
매사를 혼자 생각해 혼자 처리하니 주위에서 더욱더 그를 알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을묘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동맹 제안을 받아들일 때도 임자는 좌평 여섯이 모인 자리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으니 성충이 병관좌평의 뜻은 어떠하냐고 두 번씩이나 거듭 같은 말을 물었다.
그러자 임자는 마지못해 입을 열고,
“병부의 사정이 아직 군사를 일으킬 때가 아니라고 들었지만
거병하는 일을 어디 내 사정만 가지고야 말할 수 있습니까?”
하며 서두를 꺼냈지만
그 뒤로는 다시 입을 다물어 자신의 뜻이 어떤가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