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0장 신라 3

오늘의 쉼터 2014. 11. 15. 19:12

제30장 신라 3 

 

 

 

이역의 주막에서 재회를 기뻐하며 하룻밤을 어울리고 난 두 사람은 이튿날 이치를 알현하고

고구려와 백제가 거란의 군사까지 동원해 다시 신라를 쳤으니 구원해달라고 간청했다.

사정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격노했던 이치는 조정 공론이 벌어지고 군사를 일으키는 데

반대하는 신하들이 나타나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더구나 요동으로는 절대 군사를 내지 말라는 선주의 유지까지 들먹이자

이치의 마음은 진노에서 고민으로 바뀌었다.

그는 본래 잘고 심약한 인물이었다.

“구태여 남의 나라 싸움에 말려들 까닭이 없다.

그러나 신라의 애절함도 무시할 수가 없으니 이 노릇을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이치가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태자첨사(太子詹事)로 동궁에 있을 때부터

자신을 가르쳤던 명장 이적이 말했다.

“신라왕 김춘추는 요동 정벌을 금하라는 선제의 유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약간의 군사를 내어 요동을 어지럽힌다면 손해도 없지만

생색도 낼 수 있지 않겠나이까?”

이치는 이적의 제안을 묘책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특히 고구려에 앙심을 품은 이유는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고구려에서만

아직 자신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신이 오지 않은 까닭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는 곧 인문과 양도를 불러 말했다.

“이번에 신라를 침공한 주범은 고구려의 막리지 연개소문이다.

짐이 어찌 이를 용납하랴.

하늘 같은 선제의 유조에도 불구하고 짐은 요동으로 군사를 내어

그대 나라를 괴롭힌 죄를 엄중히 따질 것이니 경들은 그리 알라.

이는 사사롭게는 불충에 해당하는 일인 데다 만류하는 대신들이 적지 않지만

신라를 위해서라면 짐은 못할 일이 없다.

가거든 왕에게 이러한 뜻을 자세히 전해주기 바란다.”

한껏 생색을 낸 이치는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과

영주도독 정명진(程名振)으로 하여금 일단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했다.

3월에 장안을 출발한 소정방은 정명진의 군사와 만나 5월에 요수를 건너갔다.

요동의 고구려 군사들은 당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바짝 긴장했으나

정작 그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는 성문을 열고 나아가 귀단수(貴湍水:만주 신성 서남쪽)에서 맞섰다.

그로부터 사나흘간 계속된 일진일퇴의 공방은 양측 군사들이 각기 비슷한 사상자를 내고 끝이 났다.

어차피 승부를 가리자는 싸움이 아니었다.

소정방과 정명진은 분풀이로 신성 외곽의 촌락 몇 곳을 불태운 뒤

그것을 전과로 삼아 돌아갔을 뿐이었다.

이 일로 김인문은 이치의 처사에 크게 실망했다.

그는 양도를 먼저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자신도 곧 짐을 꾸렸다.

인생을 살다보면 좋은 날 뒤에 궂은 날도 있듯이 나랏일도 이와 마찬가지다.

성쇠지리(盛衰之理), 성기와 쇠기가 톱니처럼 맞물려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 역사의 섭리가 아니던가.

며칠 맑은 날 뒤엔 어김없이 비가 오고, 동남풍이 불고 나면 서북에도 바람이 이는 게 우주의 정법이다. 역대를 상고함에도 그렇지만 한 임금의 당대를 세분해도 신산과 영광은 교차하게 마련이지

처음과 끝이 한결같은 경우야 어디 흔한 일인가.

그런데 저마다 다른 것은 어렵고 힘든 시절을 만났을 때의 처신이다.

개인으로 보면 이것이 사람을 영웅과 폐인으로 구분짓고,

임금의 경우엔 성군(聖君)과 망군(亡君)으로 나뉘는 요체요 갈림길인 것이다.

백제왕 의자는 태생이 대범하고 영특한 인물로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태자로 있을 때는 해동증자라는 별칭으로 불리기까지 했는데,

왕궁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고집이 세고,

역경을 만났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만일 일생을 성세의 임금 노릇만 했다면 그런대로 나라를 잘 다스렸을지도 모를 인물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3국(三國), 당을 포함하면 4국(四國)이 서로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거리던

치열한 각축과 살벌한 전란의 시대, 매사가 뜻대로만 될 리 없었고 어떤 형태로든

역경을 안 만날 수도 없었다.

수십 번 군사를 내어 모두 이긴다는 것은 상대가 허수아비가 아닌 다음에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어 차례 적과 싸워 크게 패했다면 은상이 죽어가며 했던 말처럼 시급히 난정을 다스리고

군사를 체계적으로 길러야 옳았다.

그 아버지 서동 대왕이 피폐한 허허벌판에서 시작한 데 비하면 그래도 그는 유리한 편이었다.

만석꾼이 하루아침에 망하지 않는 것처럼 백제는 전대에 닦아놓은 성대한 왕업의 덕으로

아직 물자가 풍족하고 살림이 풍요로운 편이었다.

임금이 정신을 차리고 장구지계(長久之計)만 세운다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백제의 사직을 책임진 의자는 나라는커녕 자신의 내면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스스로 화가 나서 식음이 순조롭지 못했고, 중신과 귀족들이 모두 자신을 흉보는 듯한 자격지심에

빠져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웠으며, 신하들이 건의하는 말도 기분에 따라선 자신을 책망하는 소리로

듣기 일쑤였다.

그는 대궐에서 사람이 둘만 머리를 맞대고 무슨 얘기를 나누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불러,

“무슨 얘기를 그처럼 숙덕거리는가?”

“혹시 내 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왜 그처럼 안색이 변하는가?”

하며 예리한 눈빛으로 신하들의 일거일동을 관찰했다.

도살성에서 크게 패한 것은 군사가 아니라 정작 임금일지도 몰랐다.

의자는 패전으로 실추된 군왕의 위엄을 무서운 얼굴과 호통소리로 다시 세우고자 했다.

신하들을 만나면 하루에도 몇 번씩 화를 냈으며, 기쁜 일이 있어도 웃는 법이 드물었다.

화를 자주 낸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이가 무슨 수로 막중한 국사를 관리할 수 있으랴.

대저 위엄이란 그렇게 해서 세워지는 법이 아니었다.

 

의자는 한때 도살성에서 패하고 돌아온 장수와 군사들을 모조리 옥에 가두었지만

얼마 뒤 상좌평 성충을 비롯한 나머지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이들을 풀어주고

대부분의 장수들은 다시 복직시켰다.

은상이 맡았던 병관좌평 자리는 임자에게 돌아갔고,

의직에게는 위사좌평직을 되돌려주었으며,

전사한 이들의 자리가 많이 비었으므로 정무와 상영,

무수와 계백 등의 은솔 장수들은 모두 달솔 벼슬로 승차시켰다.

그렇게 하고도 임금은 꽤 오랫동안 국정을 돌보지 않고 밤이면 궁녀들과 어울려 폭음을 일삼았다.

임금의 황음무도가 극에 달한 것은 당나라로 간 조공사가 새 당주의 방자한 글을 받아왔을 때였다.

의자는 이치의 편지를 읽고 나자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격분했다.

“네 감히 이따위 글을 받아오고도 사신의 책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느냐?”

극도로 화가 난 의자는 애꿎은 사신에게 화풀이를 해대다가 분을 이기지 못해 목을 베라고 소리쳤다.

“고정하십시오, 전하! 험한 뱃길을 다녀온 사신입니다. 사신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이까?”

성충은 땅에 이마를 박고 강력히 진언해 가까스로 임금을 달랜 뒤 이렇게 말했다.

“당나라의 방약무도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선왕께서도 중국으로부터 이 같은 글을 여러 번 받았으나 그때마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정사에 더욱 매진하여 마침내 오늘과 같은 세대를 열어놓았습니다.

신이 판단하기에 새 당주 역시 우리보다는 신라와 인연이 깊은 듯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계책은 북으로 고구려와 유대를 강화하고

바다 건너 왜국(倭國)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여 당으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탐라(耽羅:제주도)가 이미 우리 수중에 있고,

고구려와 맺은 동맹문의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으니

이젠 왜로 사신을 보내 왜왕과 혈맹의 서약을 할 때입니다.”

하긴 어찌 보면 의자왕으로선 정사에 신물이 날 만도 했다.

자식 같은 자에게 그따위 협박을 당하고도 다시 해가 바뀌면 조공사를 보내야 하는 게 정사요

국정이었다.

일이 잘되면 신이 나지만 안 되는 일에는 맥이 빠지는 이치가 정사를 돌보는 일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계축년(653년)에 의자는 성충의 간언을 받아들여 한동안 소원했던 왜와 우호 관계를

다시 복원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바로 그해,

백제에는 실로 오랜만에 한재가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재야 하늘이 내리는 것이었으나 한 해 가뭄에도 백성들이 굶주리게 된 것은

국정이 그만큼 문란해진 탓이었다.

백제의 풍요로움은 서동 대왕 시절에 대대적으로 설치한 저수지와 제방 공역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런데 농정을 돌보는 관리들은 해마다 계속된 풍작만 믿어 낮잠을 잤고,

시설물은 제대로 손보지 않아 고인 물이 썩고 둑이 터진 제방도 한둘이 아니었다.

흉년이 들어 살림살이마저 어렵게 되자 왕의 권위는 더욱 실추되고 타락한 난신적자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에 내신좌평 사택지적이 편전에서 임금께 고하기를,

“전하, 덕행은 언제나 곤궁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을 망치는 것은 뜻을 이루었을 때입니다.

이제라도 술과 여자를 멀리하시고 어서 옛날처럼 국정을 돌보소서.

전하께서 정사만 바로 살피시면 백제는 다시 수년 안에 강국이 될 수 있나이다!”

하고 말하자 왕은 갑자기 안색이 백변하며,

“이 미친놈아, 비가 오지 않아 망친 농사가 어찌 내 탓이란 말이냐?

네가 나를 능멸하는 마음이 없고서야 어떻게 그따위 망발을 늘어놓을 수 있겠느냐?

어디 한번 아가리를 더 놀려보라, 내가 바로 살피지 못한 정사가 과연 무엇이냐?”

하며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부었다.

지적은 이 일로 크게 마음이 상해 그해 겨울 스스로 사직을 청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의자는 지적이 사직을 청하자 이를 쾌히 허락했다.

“재주가 부족하고 공연히 허명만 높은 자는 자진해서 물러나는 것이 옳다.

그대는 아무래도 고향에 돌아가 닭이나 치는 것이 현명할 듯싶구나.”

성충과 흥수는 대경실색하여 지적을 만류했으나

궐에서 물러나온 지적은 홀가분한 얼굴로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내 소임은 끝났네.

자네들도 명줄을 부지하려면 시급히 그놈의 좌평 자리를 내어놓게나.

괘를 보면 시운은 날로 불길해지지만 자네들이나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네.

자고로 농사가 망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임금은 임금이 아닐세.”

전조에 도인 백파(룰罷)가 서동 대왕에게 천거한 세 사람의 기재 가운데

제일 먼저 물러난 이는 지적이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처신은 초연했으나 그는 임금과 국사를 생각하매

내심 걱정과 고통이 컸던 모양이었다.

낙향한 지 꼭 1년 만인 갑인년(654년) 11월,

지적은 고향인 나지산에서 혼자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풀어낼 길 없는 충정은 가슴에 담아두면 그처럼 무서운 독이 되는가 보았다.

임금은 감정이 풍부하고 인정이 많았다.

지적의 죽음이 알려지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 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울었다.

태자로 책봉되던 해에 지적을 만났으니 20년 넘게 조석으로 대하던 신하였다.

용포를 흥건히 적시도록 울고 난 왕은 유사에 명하여 지적을 대좌평(大佐平)에 추증하고

장사에 쓸 재물을 하사한 뒤 그의 무덤 옆에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천성은 맑고 아름다운 왕이었다.

악재는 겹쳤다.

지적이 죽고 불과 두어 달 뒤인 을묘년(655년) 정월,

선화 태후가 세상을 버렸다.

효성이 지극하던 왕은 모후가 죽자 머리를 풀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태후는 말년에 의자의 왕업을 걱정해 밤잠을 설칠 때가 많았고,

때론 며느리인 은고(恩古) 비와 언성을 높이고 얼굴을 붉히며 다투기도 했다.

그러던 끝에 맞이한 죽음이어서 의자는 더욱 슬펐다.

스스로도 반백의 머리카락에 예순을 바라보던 왕이었으나 부모의 죽음 앞에서는

 어린애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모후의 장례를 지내고 나자 의자는 더욱 만사가 귀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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