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0장 신라 1

오늘의 쉼터 2014. 11. 15. 09:02

제30장 신라 1 

 

 

 

이 무렵, 신라로 눈을 돌린 이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이었다.

요동의 전란 이후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하고 군사를 길러온 그는 도살성에서

백제군이 대패한 뒤로 나제(羅濟) 양국의 싸움이 뜸해지자 장수들과 더불어 대책을 의논했다.

자나깨나 거대 강국 당나라를 정면으로 상대해야 하는 그로선 남쪽에서

두 나라가 계속 피를 흘리며 싸워주는 게 여러 모로 유리했다.

7백 년을 내려온 정족지세(鼎足之勢)가 아니던가.

셋 가운데 둘이 서로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거려야 그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고,

이는 정족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전통적인 활용법이었다.

“백제왕 의자가 김유신이한테 크게 당한 뒤로 아무래도 의기소침해진 게 분명하다.

우리가 군사를 내어 의자를 좀 도와주는 것이 어떠한가?”

당태종이 죽고 그의 유조로 요동에서 싸움이 그친 뒤 얼마만큼 여유를 되찾은 개소문은

서서히 신라에 잃어버린 땅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5척 단신에 보잘것없는 외모였지만 한 치 심장에 천하를 경략할 큰 뜻을 품고

늘 신묘한 지략과 무쇠 같은 정열로 국사를 관장해온 그였다.

입에서 말이 나오면 만조가 긴장하고 5부(五部)를 순시할 때는 성주와 관수들이

오금을 저려하며 명을 받들었다. 입을 닫고 있으면 임금조차 불안해 밥을 먹지 못할 정도였으며,

한번 화를 내면 산천초목이 떨었다. 한번은 개소문이 말갈 지역에 순시를 나간 뒤 왕궁을 지키는

키 작은 군사가 편전의 담장 밑으로 지나갔는데, 이때 군신들은 개소문이 돌아온 줄 알고

다투어 바깥으로 달려나온 적도 있었다.

범이 왔다 해도 그대로 울던 애들이 막리지가 왔다면 울음을 그친다는

우스개마저 민간에 나돈 지 이미 오래였다.

개소문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온화한 표정을 지어도 상대가 겁을 내고 식은땀을 흘리니

하루는 사사로운 자리에서 우보(右輔) 을지유자를 보고,

“자네도 내가 두려운가?”

하고 물었다. 만조를 통틀어 개소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오로지 유자뿐이었다.

유자가 파안대소하며 한참을 웃고 나서,

“두려워하는 게 좋은 게야.”

“좋은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네. 사람들이 왜 나를 두려워하는지 모르겠어.”

“그걸 정녕 몰라서 묻는가?”

“몰라. 자네가 알거든 좀 가르쳐주게나.”

“생긴 꼴이 허가 없기 때문일세.”

“허가 없다니?”

“빈틈이 없어 그렇다고.”

“무슨 빈틈?”

“생각해보게. 사람이란 게 허술한 구석도 있고 누가 허튼소리를 하면

좀 넘어가주기도 하고 그래야 사람인데,

자네는 지나치게 주도면밀한 게 탈일세.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못 살고

하늘에 해가 너무 뜨거우면 초목이 말라죽네.

누가 농을 하면 웃기를 하나, 슬프니 울기를 하나,

아무리 말술을 마셔도 똑바로 걸어서 집에 들어가지,

부정한 일이 눈에 띄면 당장에 목을 쳐서 죽여버리지,

이러니 자네가 아무리 온화한 표정을 지어도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그렇다고 부정한 자를 보고도 그냥 넘어갈 수야 없지 않나?”

“누가 그냥 넘어가랬나? 자네가 물으니 그렇다는 게지.”

둘이 한참을 옥신각신한 끝에 개소문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래도 정사만 잘 다스리면 되지.”

하고 말했다.

그렇지만 유자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북적대고 자신의 옆은 항상 고적하니 생각다못해,

“이보게, 오는 삼월삼짇날 궁중 연회 때는 내가 만취해서 연회장에 그대로 드러누울 테니

자네가 나를 좀 희롱하시게나.”

하고 유자에게 정중히 부탁하므로 유자가 웃으며,

“알았네.”

하고는 약속한 날 연회장에서 드러누운 개소문을 들쳐업고 풍악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런데 일은 전혀 엉뚱하게 돌아가서 그 일이 있고 나자 유자한테까지

군신들이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뒤로도 개소문은 유자의 권고에 따라 더러 웃기도 하고 미리 계산된 빈틈을 보이기도 했으나

별로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사람의 위엄이란 본래 그처럼 타고나는 것이었다.

임금도 대신들도 개소문에게 건의할 일이 있으면 유자와 먼저 상의하거나 유자를 통해

말이 들어가도록 했다.

그나마 유자가 옆에 있다는 건 나라를 다스리는 개소문의 홍복인 셈이었다.

“지금 신라에선 여자 임금이 죽고 김춘추가 임금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언변이 출중하고 성정이 교활해 우리로선 경계할 인물이 틀림없다.

즉위 초에 기세를 좀 꺾어놓아야 두려운 줄을 알지 않겠는가?”

백제를 부추겨 신라를 치자는 개소문의 제안에 고구려 대신들은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당태종의 30만 대병을 일거에 물리친 사람의 말이었다.

“군국사무야 막리지께서 알아하실 일입니다. 저희들로선 그저 명을 좇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고구려 대신들의 한결같은 뜻이었다.

 

개소문은 서해 뱃길을 통해 사비성으로 사신을 보내고 군기를 약정해 신라를 치자며 의자왕을 설득했다. 그가 내세운 명분은 계묘년(643년)에 맺은 양국의 공수동맹이었다.

당태종의 요동 침략 때 백제가 원군을 보내지 않아서 실상 여제(麗濟) 동맹은 유명무실해졌지만

개소문은 과거지사를 거론하지 않고 의자왕을 부추겼다.

동맹을 거론하면 미안한 쪽은 백제였다.

아직 도살성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날마다 이를 갈던 의자왕이 신라를 치자는

개소문의 제안을 거절할 리 없었다.

이듬해 정월,

고구려는 말갈 군사를 동원하고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침공했다.

불시에 침략을 당한 신라는 서쪽과 북쪽, 양갈래로 원군을 급파해 양적에 맞섰으나

북쪽 변경의 무려 33개에 달하는 대소 성곽을 뺏기고 말았다.

양적을 두루 경계해야 하는 신라였지만 거의 해마다 전란에 휩싸였던 백제 국경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북방의 경비가 허술했다.

연개소문이 노린 것은 바로 이 점일지도 몰랐다.

김춘추가 보위에 오른 뒤 치른 첫 전쟁에서 신라의 북쪽 군대는 여지없이 패했다.

뿐만 아니라 김춘추는 자신이 아끼던 사위를 또다시 백제군에게 잃는 두 가지 불상사를

한꺼번에 겪고 말았다.

춘추의 사위 김흠운(金歆運)은 내물왕의 8세손으로 잡찬 달복(達福)의 아들이었는데,

어려서부터 화랑 문노(文努)를 따라다니며 의로움을 배우고 기개를 키웠다.

그때 문노의 낭도들이 용화향도를 본받자고 결의하며 아무개가 싸움터에서 전사해

지금껏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나누고 있으면 흠운은 분연히 눈물을 흘리며 용감하게 싸운

이들을 흠모했다.

동문(同門)의 승려 전밀(轉密)이 일찍이 그것을 보고,

“이 사람은 훗날 적진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고 예언했다.

그 뒤 흠운이 장성하여 벼슬길에 나섰는데,

그 생김새가 수려하고 헌칠하여 보는 사람마다 귀골(貴骨)이라고 탄복을 아끼지 않았다.

춘추가 아직 대신으로 있을 때 서녀의 배필로 흠운을 탐내어 달복과 의논 끝에 성혼을 시켰다.

흠운은 춘추의 첫사위였던 품석과는 달리 사람이 강직하고 의로워서 늘 주변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는 장인이 임금이 되기 전에도 춘추의 사위요,

김유신의 동서인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는데,

장인이 임금까지 되고 나자 더욱 처신에 빈틈이 없었다.

고구려와 말갈, 백제의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흠운은 병부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급보가 당도하고 원군을 일으킬 때 흠운은 누구보다 먼저 장인에게 달려갔다.

이때야말로 자신이 무공을 세워 장인의 국정을 보좌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신을 장수로 삼아 전장으로 보내주시면 기필코 구적을 토벌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춘추는 흠운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의기가 지나치게 강한 데 비해

무예가 썩 출중하지 못한 것이 걱정스러웠다.

“네 마음은 고마우나 싸움이란 기개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임금의 사위로 출정만 하더라도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으니

후군을 따라 종군함이 어떠한가?”

그러자 흠운은 눈물을 흘리며 선봉장으로 삼아줄 것을 간청했다.

“신의 휘하엔 생사고락을 같이하고자 맹세한 예파(穢破)와 적득(狄得)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기당주 보용나(寶用那)도 홀로 능히 천군쯤은 상대할 만합니다.

대군의 후미에 무슨 공이 있겠나이까?

선군의 장수로 삼아주십시오!”

이에 왕은 하는 수 없이 흠운을 낭당대감(郎幢大監)으로 삼고

예파와 적득, 보용나 등과 함께 출정할 것을 허락했다.

때는 아직 한기가 풀리지 않은 이른봄, 흠운은 전장에 도착할 때까지

군사들과 비바람을 맞으며 숙식을 같이했다.

현령 자리 하나만 꿰어차도 대번 콧대가 높아지고 우대(優待)를 바라는 것이

세간의 인심인데 흠운에게는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낭당의 군사들은 이런 흠운의 처신에 감동해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흠운의 군사들은 백제 접경인 양산(陽山:영동군 양산면) 밑에 이르러 병영을 설치하고

조천성(助川城:양산면 비봉산성)으로 진격할 계획을 짰다.

그런데 조천성의 백제군들은 야간을 틈타 신라군의 병영 근처까지 접근해 와서

숨을 죽이며 기다리다가 희부옇게 동이 틀 무렵 갑자기 기세를 올리며 기습했다.

불의의 역습을 당한 신라군들은 크게 놀라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댔다.

미처 무기를 챙겨들 겨를도 없이 엎어지고 자빠지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조천성의 백제군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루에 궁수들을 배치해 화살을 비처럼 퍼부었다.

흠운은 우왕좌왕하는 군사들 사이에서 한 필 말 위에 올라앉아 의연히 창을 거머쥐었다.

흠운을 따라나온 대사 전지(詮知)가 비오듯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황급히 옷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지금 적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므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공이 비록 여기서 죽는다 해도 아무도 알아줄 사람이 없으니 어서 피하십시오!

더군다나 공은 신라의 귀골이요,

대왕의 반자(半子:사위)인데 만일 적군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에게는 자랑거리요,

우리로선 크나큰 수치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흠운은 전지의 손길을 뿌리치며 대답했다.

“장부가 이미 나라에 몸을 맡겼는데 다른 사람이 이를 알든 모르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명예를 구하고자 싸움터에 나온 것이 아니다!”

전지의 뒤를 이어 다시 여러 시중하는 이들이 급하게 만류했지만 흠운은 조금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리곤 가까이 밀어닥친 적진을 향해 창을 휘두르며 달려가 몇 사람을 찔러 죽이고 장렬히 전사하니

그를 보좌하던 대감 예파와 소감 적득도,

“우리라고 어찌 살기를 바랄 것인가!”

하고는 흠운을 뒤따랐다.

문노의 낭도 시절부터 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생사고락을 같이하기로 맹세했던 보기당주 보용나는

세 사람이 모두 죽은 뒤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흠운공은 귀한 몸으로 태어나 이제 임금의 사위로 그 세도가 더욱 번창할 때임에도

스스로 전장에 나와 절개를 지키며 죽었는데 하물며 나 보용나야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인 몸이 아닌가?”

말을 마치자 그 역시 적진으로 달려가 적군 수삼 명을 베어 죽이고 벗들을 따라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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