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신라 2
조천성에서는 비록 신라군이 패했으나 김유신이 출정한 인근 도비천성(刀比川城:양산면 비봉산성)
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유신은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조천성에서 도망쳐온 군사들을 통해 듣자
그 작전을 그대로 역이용해 일거에 도비천성을 함락시켰다.
도비천성 성주는 김유신의 군대가 왔다는 말만 듣고도 혼비백산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고,
그 군사들도 고함소리 한 번에 새떼처럼 흩어졌다.
그런데 유신이 도비천성을 손쉽게 장악하고 났을 때였다.
비장 김문영이 유신을 찾아와 말했다.
“포로로 붙잡힌 백제 군사 한 명이 장군께 시급히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백제 군사가 내게 무슨 할말이 있다는 게냐?”
“글쎄올시다. 반드시 장군을 만나야만 입을 열겠다니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자신은 본래 신라 사람이라 하옵고,
포로로 붙잡혀 백제인이 되었는데 전에는 부산(夫山:진해)에서 벼슬도 살았답니다.
그의 말을 다 믿을 것은 아니지만 말씨에 신라 흔적이 역력하니 생판 거짓말도 아닌 듯합니다.”
유신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문영에게 그 포로를 데려오라고 일렀다.
이때 문영을 따라온 자는 전날 부산 현령을 지냈던 조미압(租未押)으로,
그는 무신년(648년)에 백제 장수 의직이 요거성 등 10성을 공취하고 옥문곡까지 쳐들어왔을 때
붙잡혀 사비의 고관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유신을 만난 조미압은 자신이 겪은 저간의 사정을 간략히 설명한 뒤 이렇게 말했다.
“도살성 패전 이후에 백제 조정은 급격히 쇠잔해지고 있습니다.
임금은 주지육림에 파묻혀 정사를 잊은 지 이미 오래고, 나라의 중신이란 것들은
뒤로 재물만 챙길 줄 알았지 국정을 전혀 헤아리지 않습니다.
소인이 종살이를 하고 있는 집의 주인은 작년에 좌평이 된 임자(任子)라는 자인데
그 역시 권세를 이용해 벼슬을 팔고 귀족들과 결탁해 제 앞가림에만 전력을 쏟으니
그런 나라가 어찌 온전할 수 있겠나이까.
갑은 을과 뒷거래가 있고 을은 병과 비행을 모의하는데 병과 갑이 또 다른 일로 맺어져
왕을 등쳐먹고 세상을 속이는 것이 백제의 실상입니다.
임금은 왕비의 치마폭에 휘감긴 지 오래요,
한두 사람 충신이 있다 해도 나머지 만조가 속속들이 썩어서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세도만 있으면 물자는 풍족하고 재물은 넘쳐나서 나라의 근본이 썩어가도 썩는 줄을
알지 못합니다.
소인이 여기까지 나온 것도 임자네 아들의 군역을 대신해 나온 것이니
죽어나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뿐입니다.”
조미압은 열변을 토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파도에 모래처럼 허물어지는 도비천성의 군사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만일 장군께서 계림의 장정들을 모조리 끌어모아 한판 결전을 벌인다면
7백 년 사직의 숙원을 반드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백제의 실상을 알고 나자 유신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네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대왕께서 이미 대계를 세우고 계신다네.
얼마만 더 기다리면 반드시 그럴 때가 올 것일세.”
아울러 유신은 조미압의 됨됨이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잠깐 궁리에 잠겼다가 이렇게 물었다.
“자네가 종살이를 하는 집주인이 마침 좌평 임자라고 하니
그가 백제의 국사를 전담하지 않겠는가?”
귀순한 좌평 정복을 통해 백제 대신들의 면면을 대강 들어 알고 있던 유신이었다.
“그렇습니다.”
“하면 잘되었네. 자네가 임자에게 다시 돌아가서 그 속내를 한번 떠보는 것이 어떠한가?
그도 내 이름을 모르지 않을 터, 앞으로 이처럼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면
백제와 우리나라 가운데 어느 쪽이 망할지 알 수 없으니 만일 백제가 망하면
임자는 내게 의지하고, 우리가 망하면 내가 임자에게 의지하기로 미리 약조하자고 말해보게나.
그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자네는 계속 백제의 실정을 내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달리 해가 있겠는가?”
유신의 부탁을 받은 조미압은 흔쾌한 낯으로 대답했다.
“장군께서 저를 불초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그와 같은 사명을 맡겨주시니 영광입니다.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겠나이다!”
한편 북방의 33개 성을 잃고 사위까지 전사했지만 신라왕 김춘추는 의외로 담담했다.
신하들은 당장 대병을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를 치자고 입에 거품을 물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왕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오.
지금 군사를 일으키면 성곽 몇 개쯤은 얻을 수 있겠지만 이는 전조에서 수도 없이 해온 일로,
과인은 한낱 돌무더기 몇 개를 얻자고 우리 장수와 군사들을 수고롭게 하지는 않겠소.
한번 일어나면 그 형세가 질풍노도와 같아서 반드시 적을 일거에 궤멸시켜야 하오.
그럴 수 있을 때 움직일 것이니 대신들은 과인을 믿고 맡은 바 소임에나 충실하시오.”
그는 조천성에서 죽은 흠운과 예파에게 일길찬 벼슬을 추증하고
보용나와 적득에게도 대내마 벼슬을 내린 뒤 친히 전사자의 식솔들을 위로하고 국고를 열어
재물을 하사했다.
그리고 남편을 잃은 자신의 딸은 대궐로 불러들여 별궁 하나를 내어주고 그곳에 살게 했다.
전란 직후 춘추는 병부령으로 있던 장남 법민을 세워 태자로 삼고,
당나라에서 돌아온 셋째 문왕을 비롯, 노차, 인태, 지경, 개원 등의 아들을 모조리
이찬과 파진찬으로 삼아 후사에 대비하고 왕실의 위엄을 세웠다.
그런 다음 비로소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해 전황을 알리고 원병을 요청했다.
스스로도 군사를 기르는 한편 어떻게든 이치를 설득해 당나라 군대를 움직여보자는 게
춘추의 속셈이었다.
그렇게 해야 삼한의 오랜 화근인 7백 년 정족세를 끝장낼 수 있을 터였다.
당에 전란을 알리러 입조한 신라사는 김양도(金良圖)라는 젊은 신하였다.
양도는 장안으로 가서 그곳에 숙위하던 임금의 차자 인문을 만났다.
두 사람은 금성에 있을 때부터 잘 알던 벗이어서 서로 허교하며 지낸 사이였다.
“왕자께서는 그간 무양하셨습니까?”
인문을 만난 양도가 갑자기 말을 높이자 인문은 팔을 휘휘 저었다.
“내가 장안에 숙위로 있는 사이에 아버지가 임금이 되었다는 말은 들었으나
공과 나는 어릴 때부터 동문수학한 동무가 아닌가?
공대가 지나치면 아부가 되는 법일세.”
스물셋, 한창나이에 당에 입조해 햇수로 어언 5년째 숙위사로 지내온 인문은
아버지가 임금이 된 줄을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바가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유가의 경전은 물론 장노부도(莊老浮屠:도교와 불교)의 학설까지
두루 통달했고, 필법도 뛰어났지만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활쏘기와 말타기,
향악과 예능에도 숙달한 팔방미인이었다.
한번 관심을 가지면 끝장을 보는 진득한 성격에 성품은 늘 조용했으며,
식견이 넓고 도량이 커서 어디를 가나 벗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춘추의 여러 아들 가운데 가장 아버지를 닮은 아들이 바로 인문이었다.
그는 형인 법민을 지극한 예우로 섬기고 아우들을 잘 다스렸는데,
처음 장안에 숙위로 갔던 아우 문왕이 자주 외로움을 타서
인편에 귀국시켜줄 것을 여러 번 간청하자 하루는 춘추에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당나라 선주와 맺은 약속 때문에 문왕의 고통이 심하니
소자가 대신 숙위로 가겠습니다.”
하고 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가 문왕을 앞세워 이치를 알현하고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는데,
이치가 특히 대국을 받드는 인문의 갸륵한 마음과 그 학문이 높은 것에 반해 당석에서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을 제수했다.
뒷날 춘추가 신라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이 장안에 알려지자 이치는 크게 기뻐하며,
“내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굳이 말하면 이미 오래전에 이렇게 되었어야 할 일이다!”
하고서 그날로 지절사를 파견해 춘추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한 뒤
숙위사 김인문을 궁으로 불러들여 왕자를 대하는 예로 성대한 잔치까지 열어주었다.
인문은 본국의 일이 말할 수 없이 궁금했지만 그럴수록 자신은 더욱 열심히 이치를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왕업을 외조(外助)하려고 애썼다.
삼한 정세를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이치에게 인문의 말 한 마디는 그대로 정설이 되어 굳어졌다.
특히 인문은 해박한 지식과 출중한 언변으로 백제가 걸핏하면 신라를 침략하는 것이 결국은
당에 반기를 드는 역적 행위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천하에 상국의 명령을 어기는 나라는 백제밖에 없을 것입니다.
역적 고구려와 결탁하고 동맹한 것도 이미 씻을 수 없는 죄인데 해마다 우리 국경을 침범하기를
수십 년간 재미 삼아 해오고 있으니 겉으로 비록 조공사가 다녀가고 대국을 섬기는 척하지만
그 속셈을 어찌 믿을 수 있겠나이까?
우리는 이미 당나라를 좇아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여 따지고 보면 대국의 한 변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를 알고 더욱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은 배역자의 마음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나이다.
신라를 치는 것은 대국을 치는 것입니다. 부디 통촉하여주사이다.”
장안에는 신라 숙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백제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의자왕의 사촌인 부여복신이 숙위로 머물며 당조의 중신들과 나름대로
교분을 쌓아오고 있었다.
도살성 패전 이후 복신은 신라의 김유신이 해마다 자신들을 침략해 전군의 절반을 무참히 죽였다며
오히려 신라를 징벌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이치로선 직접 보지 않았으니 양국 주장 가운데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20년이 넘게 당에 숙위한 복신이 아니라
이제 막 나타난 약관의 청년 김인문이었다.
신해년(651년) 봄,
이치는 백제에서 온 조공사에게 다음과 같은 장문의 편지를 보내 가뜩이나 심란함에 빠져 지내던
의자왕에게 또다시 일격을 가했으니 이는 바로 김인문의 작품이었다.
해동의 삼국은 개국한 지 오래로 강계(疆界)가 서로 견아(犬牙)처럼 맞물려 근대 이래로
틈만 나면 서로 싸움을 일으키니 한 해도 편안할 해가 없고, 삼한 백성들로 하여금
항상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두고 밤낮없이 무기를 쌓게 하니,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짐으로선 애달프고 민망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소.
지난해 고구려와 신라 사신이 나란히 입조했을 때 짐은 서로 묵은 원한을 풀고 화목하게 지내라고
타일렀는데 그때 신라사 김법민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순치(脣齒:입술과 이)와 같아서
서로 의지하며 번갈아 무기를 들고 침략해오니 대성(大城)과 중진(重鎭)이 모두 백제에 병합되어
강토는 나날이 줄어들고 위력은 말이 아니게 쇠락했다는 것이오.
하여 짐에게 청하기를 백제에 조서를 내려 빼앗아간 성진(城鎭)을 모두 돌려주게 하고,
만일 조명을 받들지 않거든 곧 군사를 일으켜 무력으로 빼앗을 것이되,
다만 잃어버린 옛 땅만 되찾으면 서로 화친할 것이라고 하니
짐이 듣기에는 그의 말이 순리이므로 이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소.
옛날 제나라 환공은 제후의 자리에 있었지만 망한 나라를 존속시켜주었는데
하물며 짐은 만국의 주인으로서 어찌 위급함에 처한 번국(藩國)을 구휼하지 않으리요.
한즉 왕은 이미 아우른 신라의 성진을 마땅히 본국에 돌려주시오.
그러면 신라 역시 그들이 사로잡아간 백제 포로를 왕에게 돌려주도록 하겠소.
그렇게 한 뒤 환난과 분규를 풀고 무기를 거둬들이면 백성들은 비로소 편안히 쉬게 될 것이며,
삼국은 전쟁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것이오.
무고한 백성들의 피가 변방에 흐르고, 시체가 강산에 높이 쌓이며,
생업을 중단하고 전쟁에 동원되는 고통을 어찌 사녀(士女)들의 근심하는 바와 같은 반열에서
비교할 수 있겠소.
왕이 만일 짐의 말을 듣고도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이미 김법민의 요청에 따라
그의 뜻대로 결전하게 도울 것이며, 아울러 고구려와 약속해 서로 구원하지 못하도록 조처할 것이오.
만일 고구려가 명을 받들지 않으면 거란(契丹)과 제번(諸藩)으로 하여금 요하를 건너 깊이 쳐들어가
고구려까지 정벌케 할 것이니 왕은 짐의 뜻을 깊이 헤아려 스스로 복을 구하고 양책(良策)을 도모하여
뒤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이제 갓 즉위한 자식뻘의 새파란 당주로부터 이런 글을 받아 읽은 의자왕이 얼마나 격노했는지는
굳이 말할 나위가 없다.
어쨌거나 인문은 그 아버지 춘추가 그러했듯이 이치의 조정과 갈수록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양도가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바로 그럴 무렵이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0장 신라 4 (0) | 2014.11.15 |
---|---|
제30장 신라 3 (0) | 2014.11.15 |
제30장 신라 1 (0) | 2014.11.15 |
제29장 도살성 22 (0) | 2014.11.15 |
제29장 도살성 21 (0) | 2014.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