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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도살성 21

오늘의 쉼터 2014. 11. 15. 06:59

제29장 도살성 21 

 

 

 

“당에 가거든 이번에 백제 군사를 크게 격파한 사실을 자진해서 알리는 게 좋다.

백제의 숙위 사신인 부여복신은 머리가 비상하고 영특한 인물이다.

만일 자신들이 먼저 쳐들어온 사실을 빼고 패한 일만을 크게 부각시켜

침소봉대(針小棒大)한다면 새 당주는 오히려 우리를 나무랄지 모른다.

매사는 처음과 시작이 중요하다.

새 당주가 우리나라와 백제의 관계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장래는 크게 달라진다.

당나라 형편에서 백제와 우리는 마찬가지다.

양국이 모두 당조를 극진히 섬기는 데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쪽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

이 점을 늘 명심해라.

당이 우리와 여기까지 온 것은 대부분 선주와 아버지의 각별한 인정 덕분이었다.

부디 선대의 교유를 이어 양국이 더욱 우호하고 돈독히 지낼 수 있도록 힘과 지략을 다해라.

너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긴 대화의 말미에 춘추는 새 당주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법민에게 물었다.

그러자 법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사해 만국에서 진귀한 방물들이 답지할 것이니 물자로써 특별한 선물을 마련하기란 어렵습니다.

소자의 소견엔 대왕께서 어필로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바치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마침 당에서는 5언으로 음률을 맞춰 짓는 시가가 크게 유행하고 있으니

5언시(五言詩)로 태평가를 짓는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법민의 제안에 춘추는 돌연 크게 무릎을 쳤다.

“옳거니, 그게 좋겠다! 과연 네 생각이 여러 모로 아비를 앞지르는구나!”

이튿날 입궐한 춘추는 사신으로 법민을 천거하고 아울러 선물 얘기도 전했다.

춘추의 뜻은 그대로 임금과 조정의 결정이 되었다.

이에 뛰어난 문장 몇 사람이 달라붙어 새 당주의 등극을 축하하는 태평송을 짓고

여주는 그것을 받아 새로 짠 비단에 어필로 적었는데,

그 5언시의 내용이 대략 이러했다.

 

대당(大唐)의 큰 업이 비로소 열리니
황제의 지략은 더욱 높고 창대해지누나
무기를 거두고 군사를 쉬게 하니 천하가 안정되고
문치를 닦으매 백왕이 뒤를 잇도다
하늘에 통한 뜻은 귀한 비를 내리게 하고
다스리는 물체마다 광채를 머금었구나
깊은 인덕은 일월과 벗하고
순환하는 운수는 당나라의 시대를 열어놓았다
나부끼는 깃발은 어찌 그리 혁혁하며
징소리 북소리는 어찌 그리 우렁찬가
바깥의 종족으로 명을 어기는 자
칼날 위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순풍은 어둡거나 밝은 곳을 가리지 않고
먼 곳과 가까운 곳에 두루 서기를 비치도다
사철은 이미 옥촉처럼 고르고
칠요의 광명은 만방을 순행하는데
산악의 정기는 어진 재상을 내리고
황제는 정사를 충신과 양신들에게 맡기니
오삼(삼황오제)의 덕이여, 부디 하나로 이뤄져
우리 당나라 황실을 영원히 밝게 비추소서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衣定 修文繼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運邁時唐
幡旗何赫赫 鉦鼓何湟湟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疑幽顯 遐邇競呈詳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維嶽降宰輔 維宰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그 무렵 당나라 식자들 간에는 과연 5언시가 크게 유행했다.

새 당주 이치도 5언시에 매우 관심이 커서 한가할 때면 곧잘 시문을 짓곤 했다.

법민은 장안에 숙위하고 있던 둘째 아우 문왕을 앞세워 황궁을 찾아갔다.

신라사가 왔다는 말에 이치는 공무의 순번을 바꿔가며 법민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춘추공은 돌아가신 선제께서 피를 나눈 형제처럼 아끼시던 어른이다.

선제의 영구를 붙잡고 통곡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먼길을 달려와 피곤하실 테니 어서 안으로 뫼셔라.”

아직 아버지를 여읜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이치였다.

“송구하오나 이번에 온 신라사는 춘추공이 아니라 김법민이라는, 춘추공의 아들입니다.”

접객을 맡은 관리의 말에 이치는 잠시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춘추공의 자제라면 좌무위장군 김문왕이 있지 않는가?”

“문왕이 지금 같이 왔는데 신라사 김법민은 문왕의 맏형이라고 합니다.”

“오호, 그래?”

“어찌 하오리까?

알현을 청한 번국 사신들이 앞에 있는데 그래도 순번을 바꾸오리까?”

이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김문왕이 이미 선제로부터 벼슬을 받았으니 그는 내신(內臣)이다.

내신의 형을 먼저 보는 것이 어찌 수상하랴.

어서 안으로 들게 하라.”

이치와 법민의 운명적인 상견은 이러했다.

법민은 이치 앞에 엎드려 두 번 절하고 등극을 축하하는 예를 표했다.

인사를 받고 나자 이치가 물었다.

“춘추공은 무양하시오? 어찌하여 같이 오지 않으셨소?”

“아뢰옵기 민망하오나 저희 아버지께서는 선제를 여읜 충격과 슬픔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해 침식과 거동이 순조롭지 아니합니다.

폐하의 등극을 기뻐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이나 마땅히 기뻐해야 할 자리에서

자칫 눈물이 나올까 염려하여 제가 대신 왔나이다.

 

감히 바라옵건대 제 아버지의 불충을 너그럽게 용서하소서.”

 

법민의 말에 이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불충이라니 당치 않소.

나 또한 아직은 수시로 설움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는 형편이니 어찌 춘추공의 마음을 모르겠소?

짐은 두 어른이 일생을 두고 변함없이 나눠온 친분과 우애를 잘 알고 있소.

아버지뻘 되는 어른을 만나 모처럼 슬픈 감회를 달랠까 하여 회포가 설레었는데

편찮다는 소식을 들으니 심란하구려. 병환이 깊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제가 떠나올 때 마을 앞에까지 전송을 나와서

선대의 아름다운 법을 잘 이으라는 당부가 있었나이다.”

 

이어 법민은 여주가 비단에 쓴 시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글을 받아 읽어내려가던 이치의 안색이 점점 환해졌다.

 

“어쩌면 이리도 시문이 장하고 아름다운가! 근고에 보기 힘든 미문이로다!”

 

글을 다 읽고 난 이치의 기쁨은 법민의 예상을 초월했다.

한번 감흥이 발동하면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새 당주 이치의 성품이기도 했다.

그는 당석에서 조정 백관들을 불러들이고 글을 돌려가며 읽혔다.

이미 황제가 감동하여 읽으라는 글인데 백관들이 무덤덤한 반응을 보일 턱이 없었다.

글을 읽고 난 백관들마다 찬사와 칭송을 쏟아내자 이치는 더욱 흥분해 소리쳤다.

 

“짐이 이웃나라 사신으로부터 값진 선물을 헤아릴 수 없이 받았으나

이처럼 극진한 마음이 서린 진품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오!

과연 신라는 백국 가운데 으뜸이요,

그 예절이 형식과 겉치레에 얽매이지 않고 진실무위(眞實無僞)를 펴 보이는 데가 있소.

선제께서 왜 그토록 신라를 아끼고 신라사를 각별히 우대했는지 오늘에야 명확히 알겠소!”

 

감격한 이치는 법민에게 대부경(大府卿)의 벼슬을 내리고 만조의 중신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제께서 춘추공과 나눈 우의는 평시에는 지란(芝蘭)이 서로 다투며 향을 냄과 같았고,

먼길을 달려와 만날 때는 떨어졌던 수어(水魚)가 재회한 듯 기뻐했으며,

천하 대사를 의논하고 안팎을 정벌할 때가 오면 서로 꾀를 내고 힘을 보태는 것이

금석(金石)보다 굳세었으니,

춘추공이 아니면 어찌 현무문의 성거(盛擧)가 있었을 것이며,

정관의 요순지절을 열고 아울러 오늘날 짐의 천하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제 세월은 무정하여 홀연히 선제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춘추공은

먼 곳에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여 오는데,

다행히 대부경과 짐이 이처럼 만나 선대의 지고지순한 사귐을 이어가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감개무량한 일인가!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뒤를 잇고 후대로서 선대의 뜻을 좇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뜻을 받들어 더욱 깊고 넓은 우의를 다져나가는 것은 실로 착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짐은 대부경과 더불어 인간 세상에 또 하나의 미담을 만들어 후세에까지 남기고자 하니

대신들은 우리 두 사람의 뜻을 꺾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어 그는 사신을 접대하는 신하를 불러 특별히 덧붙였다.

 

“앞으로 대부경이 입조하면 밤낮을 가리지 말고 짐에게 연통할 것이며,

순번과 비표도 생략하라.

야반 3경에도 대부경이 오면 만날 것이니

이는 앞서 선제께서 춘추공을 대접한 관례를 짐이 그대로 좇는 것이다.

알겠는가?”

 

법민을 만나보니 새삼 죽은 아버지가 그리웠던 탓일까.

이치는 과분할 정도로 법민을 환대했다.

그러나 법민은 당조의 분위기가 아직 군사(軍事)를 논할 때가 아님을 알고

더 이상 깊은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신라에서 연호를 영휘로 고친 것과 선제와 맺은 약속에 따라 문물과 제도를

꾸준히 당나라 식으로 고쳐나가는 것을 알리고,

백제가 먼저 쳐들어왔으나 이를 격파했다는 사실 정도를 고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동안 백제와 신라, 양국 간에는 특별한 전란이 없었다.

도살성 격전 이후 양쪽 모두 희생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신라의 승만 여주는 본래 정사에 뜻이 없던 사람이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정사를 잘 다스렸다.

밖에서는 김유신의 공이 높았고, 안에서는 상대등 알천의 보필이 눈부셨다.

알천은 공평무사(公平無私)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으로 벼슬이 높아져도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았고,

아랫사람을 거두는 도량이 탁월했으며, 충신과 악신을 구별하는 눈이 놀랍도록 밝았다.

한번 양신이라는 판단이 서면 단번에 요직으로 끌어올려 조정에 신생 국가와 같은 활기를 불어넣었고,

그렇게 뽑아 쓴 사람이 자신의 사저에 찾아와 인사라도 할라치면 엄하게 꾸짖어 돌려보내거나

문을 닫고 만나주지 않았다.

그것은 알천의 조부였던 숙흘종의 처신이었다.

 

신해년(651년) 2월에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개명하고 젊은 장수 죽지를

일거에 파진찬으로 승차시켜 집사중시(執事中侍)로 삼은 뒤 국사의 기밀사무를 맡겼는데,

죽지가 고마운 나머지 야간에 술 한 병을 들고 알천의 집을 찾았다.

죽지도 성품이 곧고 맑은 사람이라

그저 술잔이나 나누며 나랏일을 의논하고자 찾아왔던 것인데

알천의 태도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자네가 이제 봤더니 아주 우스운 사람이구먼?

할 말이 있거든 대궐에서 하고 앞으론 두 번 다시 내 집을 사사로이 찾지 말게.”

그는 김춘추의 둘째 아들인 인문(金仁問)을 역시 파진찬으로 삼아 당나라에 조공사로 파견한 뒤

그대로 머물러 숙위하게 했고, 이듬해인 임자년(652년) 정월에는 역시 아찬에 불과하던

박천효(朴天曉)를 단번에 파진찬으로 올려 좌리방부령(左理方府令)으로 삼았다.

천효가 감격한 나머지 알천에게 인사를 가려 하자 집사중시 죽지가 웃으며,

 

“상대등 어른 집에 찾아갈 생각일랑 아예 말게.

내가 작년에 난생 처음 눈물을 흘리며 술 한 병을 혼자 마셨다네.”

 

하고는 먼저 경험한 일을 일러주어서 천효는 요행히 낭패를 모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알천의 올곧은 처신이 늘 이처럼 차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번 의심이 든 사람한테는 일부러 더욱 자상하게 대하며

지나치는 말로 슬그머니 잘못을 지적해주곤 했다.

징계할 일이 있으면 몰래 찾아가 스스로 사직을 청하도록 권유해

물러나는 자가 부끄럽지 않도록 하고, 대사(大事)가 있어 양론이 쟁쟁할 때는

나이 많은 대신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의견을 물었다.

두 번씩이나 내란을 겪은 신라가 승만 여주 재위 기간인 일고여덟 해 사이에

거뜬히 국세를 회복한 것은 그 공의 절반 이상이 상대등 알천에게 있었다.

물러난 노신들을 원로로 섬기고, 젊은 인재를 뽑아 중용하되 스스로 패거리를 만들지 않았으며,

국법에 정통하고, 임금에게 충직하고, 문무에 두루 해박하면서도 어느 한 쪽을 천시하지 않으니

위로 임금에서부터 아래로 조정 중신들과 만백성에 이르기까지 그의 노고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남해의 섬인 거로 삼현(三縣)을 풍성하고 기름지게 만들었듯이 그가 국정을 총괄한 뒤에는

계림 전역의 살림이 해마다 크게 나아졌다.

“나라는 지킬 만한 가치가 있을 때 나라요,

구적이 쳐들어왔을 때 나라에서 굳이 장수와 백성을 징발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스스로 농기구를 들고 나오면 저절로 강국이 된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정사의 힘이며 조정 중신들이 녹봉을 받아가는 유일한 명분이다.”

이것이 알천의 주관이자 지론이었다.

 


갑인년(654년)이면 승만 여주가 보위에 오른 지 8년째 나던 해요,

알천이 국사를 총괄한 지 역시 그만큼 됐을 때인데,

3월에 접어들자 여주가 큰 병 없이 시름시름 앓더니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돌연 붕어하고 말았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던가.

나이 예순을 넘겼으니 그다지 빠른 죽음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일어난 일이어서 충격이 컸다.

여주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미리 무슨 예감을 했는지 알천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유복한 임금이오.

이제 국법을 고쳐 진골이 보위를 잇게 만들어두었으니 왕사(王事)는 공이 맡고,

군사(軍事)는 김유신 장군이 총괄하고, 외사(外事)는 춘추공과 그 자제들에게 맡긴다면

필히 우리 신라는 전고에 유례가 없는 성대(聖代)를 열어나갈 것이외다.”

이를테면 그것이 승만 여주의 유지인 셈이었다.

임금이 죽자 알천은 편전에 백의를 입고 나와 통곡하며 장사를 주관했다.

만조의 백관들도 여주의 성덕을 기리며 궐문에서부터 곡을 했고,

금성의 백성들 역시 거리로 뛰쳐나와 선정을 베푼 임금의 가는 길을 울음으로 전송했다.

승만 여주는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여 사량부(沙梁部)에 묻혔다.

장례가 끝나자 계림의 영지(靈地)인 남산 우지암에서 곧 화백이 열렸다.

후위를 결정하기 위해 모인 대신들은 모두 10여 명쯤 되었다.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앉자 제일 먼저 알천에게 보위를 이을 것을 권유했다.

“상신께서는 지난번에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사양했지만 이젠 그 이유가 전부 사라졌으니

마땅히 등극하여 지금의 성한 기운을 변함없이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만조를 통틀어 상신만한 적임이 또 누가 있습니까?”

물러난 노신들을 대표해 축건백이 수품이 말하자 지팡이를 짚고 올라온 사진이 덧붙였다.

“나도 상신의 중책을 맡아봤지만 재상의 덕을 논하건대 역대로 알천공만한 이가 없었소.

붕어하신 여주의 유지 또한 알천공에게 있었음을 내가 수차 들었으니

공은 더 이상 사양하지 마시오.”

사진의 뒤로 춘추가 말을 보탰다.

“어찌 노신들의 뜻뿐이겠나이까?

민심 또한 상신께 있나이다.

상신이 아니고선 누구도 오르지 못할 자리이니 사양치 말고 등극하십시오.

만인의 한결같은 추대를 뿌리치는 것은 도리가 아닌 줄 압니다.”

대신들이 이구동성 입을 모았으나 알천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선뜻 수락하지 않았다.

그는 줄곧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화백은 본래 만장일치로 국사를 결정하는 법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는 이가 있다면 그 뜻을 좇을 수 없습니다.”

“반대를 하다니, 여기 그런 사람이 누가 있단 말씀이오?”

알천의 말에 수품이 반문했다.

“아직 유신공이 당도하지 않았습니다.

결정은 그가 도착한 후에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김유신의 모습이 뵈지 않았다.

“유신공의 뜻은 들어보나마나 뻔합니다.

그라고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나이까?”

예부령 금강이 말했다.

하지만 알천의 뜻이 워낙 확고했으므로 이찬 이상의 대신들은 김유신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구러 밥 한 솥 지어낼 만한 시간이 흘렀을 때 김유신이 잰걸음으로 우지암에 나타났다.

“어서 오시오! 왜 이리 늦게 오셨소?”

수품이 책망하듯 묻자 유신은 겸연쩍게 허허 웃고 나서,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저 산 아래 양갈랫길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렸지 뭡니까?

두 길이 모두 우지암으로 통하지만 조금이라도 가까운 쪽으로 가려고 헤매다가 늦었습니다.”

하였다.

노신 사진이 껄껄 웃으며,

“천하의 명장 김유신이가 산에서 길을 잃다니 묘한 말일세.

그래 왼쪽 길로 오셨소, 바른 길로 오셨소?”

하니 유신이 선 채로 대답하기를,

“왼 길은 수목이 울창하고 꽃들이 만발해 아름답긴 하지만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이요,

바른 길은 거리는 가까우나 풍취가 덜하고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길이라 갈등이 컸습니다.

그러나 국사가 위중하니 풍취를 따질 계제가 아니요,

장수가 어찌 맹수를 겁내겠습니까?

저는 빨리 가는 길로 왔습니다.

아마 왼쪽 길을 택했다면 아직 당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고서 좌중을 살핀 연후에 굳이 김춘추의 옆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바람에 춘추의 옆에 앉았던 금강이 자리를 내어주고 엉덩이를 수품 쪽으로 옮겨놓았다.

유신은 춘추의 옆에 앉은 뒤에야 비로소 알천과 시선을 맞추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눈빛은 그렇게 잠깐 허공에서 만났으나 그 광채는 불꽃이 일 정도로 뜨거웠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짧은 사이에 유신은 눈빛 하나만으로 많은 얘기를 했고,

알천 역시 그랬다.

시공을 초월하고 언어를 뛰어넘는 두 영웅 간의 깊은 교감은 바로 그 찰나에 이뤄졌다.

세속적으로 보면 유신의 행동은 무척 야박한 데가 있었다.

유신에게 알천은 외사촌형이었으며 알천에게 유신은 고종사촌아우였다.

가깝기로 친다면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지만 그보다도 더한 것은 두 사람이

엇비슷한 시기에 벼슬길에 나와 20년 가까이 국사를 의논하며 쌓아온

깊은 신뢰와 서로에 대한 애정이었다.

사석에서 유신은 알천을 깍듯이 형님으로 섬기며 속내를 거짓없이 털어놓았고,

알천 또한 그런 유신을 친동생처럼 아꼈다.

알천이 있어 계림의 국운이 상승한다는 말은 유신이 항시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소리였다.

옛일을 돌아보매 어지러운 시속을 걱정하며 밤새 마신 술이 무릇 몇 말이며,

그렇게 지샌 밤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그간의 정리로 김유신은 당연히 알천의 등극을 돕거나 이를 기뻐해야 옳았다.

알천도 사람인 이상 은근히 그래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김유신은 마지막 순간에 알천보다는 춘추를 택한 것 같았다.

알천의 안색에 아주 잠깐 낙담의 빛이 스치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엷은 웃음으로 바뀌었다.

그 역시 김유신에 못지 않은 불세출의 영걸이었다.

강렬한 눈빛과 눈빛이 한동안 교차한 뒤에 알천이 먼저 희미하게 웃으며

염려 말라는 듯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유신이 그런 알천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필경은 미안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이제 대신들이 다 모였으니 공론을 시작합시다.”

비로소 알천이 입을 열었다.

“여러 중신들께서 부덕하고 용렬한 저를 천거하신 뜻은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재상의 재목은 될지언정 임금의 재목은 아닙니다.

저는 이미 늙었고 덕행도 이렇다 할 것이 없습니다.

임금이 될 자질을 갖추고 덕망이 높기로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그는 진실로 세상을 구제할 큰 영웅이라고 할 만합니다.

상신의 자격으로 천거하건대 춘추공으로 다음 보위를 잇는 것이 마땅합니다.”

알천의 말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춘추였다.

갑자기 안색이 벌겋게 달아오른 춘추가 황급히 팔을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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