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도살성 20
이세민의 장례가 끝나고 이치가 보위에 오른 중국에는 새 당주의 등극을 축하하는
각국의 사절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의 정리란 본래 그런 것이었다.
선대의 각별했던 우의(友誼)를 그대로 이어가기 위해 신라에서도 당연히 사신을 파견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신의 격이었다.
국사를 생각하면 김춘추보다 더 적임자는 없었다.
그러나 생전에 아버지와 절친했던 사람이 초상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무작정 아들의 등극을 축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생판 남을 보내자니 대를 이어서 자별한 친분을 유지하기엔 아무래도 부족하고
미숙한 점이 많을 듯했다.
이 사정을 제대로 설명하자면 당시 신라의 국정 변화를 부연할 필요가 있다.
앞서 당과 동맹을 체결하고 돌아온 뒤 김춘추는 장안에서 이세민과 했던 약속대로
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점차 당나라 식으로 바꾸자고 임금과 조정을 설득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며 반대하는 사람도 물론 없지는 않았지만
일생을 외교에 몸담았던 춘추의 뜻은 달랐다.
“당이 군사를 일으켜 번국을 아우르는 것은 자신들의 제도와 문물을 널리 펴서
스스로 제국의 위엄을 갖추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제도와 문물은 옷과 같고 사직은 몸과 같습니다.
옷은 얼마든지 갈아입을 수 있지만 몸에 병이 들거나 상처가 나면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체의 안위를 걱정하는 형편입니다.
당조의 제도와 문물을 따르는 것은 우리가 몸을 지키려고 여름에 여름옷을 입고
겨울에 겨울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몸을 지키려고 옷을 갈아입는 것은 조금도 흉이 아니올습니다.”
춘추는 또 이런 말도 했다.
“근본이 다른 두 나라가 뜻을 합쳐 운명을 같이할 때는 마땅히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고 받으려고만 든다면 바깥에서 조력자를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우리 스스로도 그 바탕이 떳떳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은 예로부터 백제나 고구려와는 달리 우리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양적의 침략을 당할 때마다 스스로의 일처럼 나서서 우리 편을 들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당나라에 아무것도 해준 게 없습니다.
해마다 조공사를 보내고 안부를 묻는 일은 백제도 고구려도 한결같이 해온 일이므로 특별할 게 없습니다. 하물며 이제 다시 군기를 약정하고 20만이나 되는 대병을 청해 양적을 토벌하려면 우리 스스로
토벌하려는 나라와는 다른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당주한테도 군사를 일으킬 명분이 설 것이고, 남편과 자식을 싸움터로 보내야 하는
당나라 백성들도 우리나라에 대해 수고를 무릅쓰고 지킬 가치가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옷은 필요할 때 입었다가 절기가 바뀐 뒤에 벗어버리면 그뿐입니다.
당복을 입고 손에 아홀(牙笏:상아로 만든 신표)을 든다고 우리나라 사람이 당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나이까?”
춘추의 이와 같은 주장은 상대등 알천의 동의와 임금의 후원을 얻어 곧 조정공론이 되었다.
그리하여 관리들은 춘추가 이세민에게 얻어온 진귀한 의복을 본떠 중국의 의관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고, 얼마 뒤에는 진골로서 벼슬을 사는 사람은 빠짐없이 손에 아홀을 잡도록 하라는 왕명이 내렸다.
또한 경술년(650년)에는 법흥 대왕 이래로 사용하던 독자적인 연호를 과감히 폐지해 태화(太和) 대신
영휘(永徽)라는 당나라 연호를 그대로 따랐다.
자신과 마주 앉아 천하의 일을 의논하던 이세민은 비록 죽었으나 춘추는 생전에 그와 맺은 약속과
신의를 변함없이 지켜나갔다.
언제고 적기가 오면 중단된 논의를 다시 거론해 새 당주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는 후일의 대비와
방책인 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선주(先主)와 호형호제하며 지내던 사람이 불과 1년 만에 후주(後主)의 등극을
칭송하기엔 인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조정 중신들 가운데는 김춘추가 사신으로 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모양새가 과히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가 김춘추를 대신하느냐는 거였다.
춘추가 그 문제로 한창 갈등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 아버지께서는 가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춘추의 장남 법민이 말했다.
그는 당나라의 국상이 끝나고 춘추가 귀국할 때 함께 배를 타고 돌아와 집에 있었다.
“대신에 소자를 사신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럼 도의와 인정에도 어긋나지 않고 우리가 얻으려는 것도 능히 얻을 수 있습니다.”
법민의 말을 듣고 춘추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러자 법민이 물었다.
“전에 선주가 살아 계실 때 제가 배탈을 핑계삼아 궁중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일을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오냐.”
“그때 소자가 아버지를 모시지 않았던 것은 바로 오늘과 같은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춘추는 장성한 아들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선대의 고아한 사귐을 후대가 잇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때는 소자나 문왕이 없어도 아버지께서 혼자 대사를 주관하시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습니다.
제가 따라가면 기름진 음식으로 한껏 배를 불릴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벌써 장안에선 선주가 요동에서 돌아온 뒤로 자주 환후에 시달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소문이 저자에 쫙 깔려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와 문왕을 데리고 문정공(文貞:위징의 시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자제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황제의 안부를 걱정했고,
위국공(衛國公:이정)과 양국공(梁國公:방현령)의 집에서도 식구들은 앓아 누운 주인보다
오히려 선주의 병을 더 근심했습니다.
그래서 소자는 선주가 일찍 돌아가실 경우를 가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법민의 말은 이어졌다.
“본래 고아한 사귐이란 상대를 진심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버지와 선주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소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후손들이 선대의 뜻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잘 가꾸기만 한다면 대를 이어갈수록
얼마든지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전날 제가 황궁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은 선주를 모신 몸으로 그 아들의 시대에 어울리기가
자칫 난처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잘 아시다시피 저는 선주를 한 번도 알현한 일이 없습니다.
이제 만일 제가 사신으로 간다면 굳이 슬픈 얼굴을 할 이유도 없고,
그러므로 마음껏 후주의 등극을 축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후주 또한 선대의 아름다운 사귐을 익히 알고 있을 터이니
양국의 관계를 더욱 각별하고 돈독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나이까?”
춘추는 법민의 혜안에 혀를 내둘렀다.
비록 자식이지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보다 낫구나 싶었고,
그러구러 오랜 세월에 걸친 당나라 사신의 책무도 이젠 벗어버릴 때가 왔구나 싶어
홀가분한 마음도 들었다.
“백락(伯樂)이 없으니 천리마가 슬퍼하고, 종자기5)가 죽자 백아자(伯牙子)는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어 종신토록 다시 켜지 않았다더니
그 얘기에 담긴 뜻을 오늘에야 알겠구나.
그래, 나는 선주 세대의 사람이다.
선주가 이미 갔는데 내가 무슨 일을 더 하겠느냐.”
말은 비록 씁쓸한 투였으나 춘추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뒷일을 대비하는 너의 지혜가 놀랍다.
앞으로 새 당주를 상대하는 일은 네가 맡도록 해라.
아비는 뒷전으로 물러날 때가 되었구나.”
이 일을 계기로 춘추는 법민을 완전히 신뢰했다.
그는 자식을 자식이라고 여기지 않고 국사를 보필하는
또 한 사람의 신하로 자신과 같은 반열에서 긴한 얘기들을 나눴다.
30년간 당조를 드나들며 터득한 여러 가지 비밀스러운 사실들도 일러주었고,
자신이 아는 대신들의 면모와 세도가의 계보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이미 장안에서 1년이 넘도록 숙위했던 법민은 춘추가 말하는 바를 충분히 알아들었다.
부자간의 밀담은 급기야 밤을 밝히고 문희가 야참을 만들어 들일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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