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도살성 19
“사비로 돌아가면 우리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날 뿐 아니라
억울하게도 패전의 모든 책임을 덮어쓰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살아서 돌아간 장수들은 우리 때문에 졌다고 입을 모아 간언할 것이며,
임금도 패전의 이유가 필요할 것이므로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아 수모를 다스리려 할 것입니다.
3만 군사를 몰살시킨 죄가 얼마나 가혹할지 짐작하기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론이고 십중팔구 3대 9족을 처형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 없어지는 것이 한결 낫습니다.
우리가 만일 연기처럼 사라진다면 정황을 아는 이가 드물 테니
어쩌면 죽은 군사들과 마찬가지로 충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고,
임금도 전란의 참화 속에서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여길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살 길은 아무리 살펴봐도 그것뿐입니다.
돌아가서 억울하게 개죽음을 당하고 자손들마저 모조리 역적으로 만드느니
신라에 투항해 살 길을 도모합시다.
그럼 우리는 목숨을 얻어서 좋고 사비의 식구들은 나라에서 내리는 보상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식솔들과 후손들의 앞날을 생각하십시오.
신라에 투항해 한적한 산곡간에서 농사나 지으며 산다면 뉘라서 우리의 종적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정복은 부여나의 설명을 듣고 나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살아서 볼 출세와 영예로움은 끝이 났고, 남은 것은 자신의 목숨과 처자식의 앞날이었다.
“군사들의 뜻이 모두 한결같은가?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거나 이탈하는 자가 생겨 이 소문이 임금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날로 만사는 물거품일세.”
“제가 일일이 확인을 해봤습니다.
반대하는 자가 서너 명 있었는데 우리가 투항할 때는 그들을 죽이고 가면 될 것입니다.”
정복은 마침내 항복할 것을 결심하고 기다리다가 김유신이 승전고를 울리며 도성으로 향할 때
개선군이 지나가는 길로 달려나가 머리를 풀고 무기를 바치며 투항했다.
유신은 군사들의 행진을 잠시 멈추게 한 뒤 정복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
“좌평의 뜻은 충분히 알겠소.”
그는 정복을 예우하며 부드러운 표정과 온화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김유신이 항복을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정복도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이번 싸움에서 우리도 1만이 넘는 대병을 잃었소.
비록 전쟁에서 이겼다고는 하나 개선군의 수레에 전사한 장정들의 시체를 산처럼 싣고
돌아가는 마음이 어찌 참담하지 않겠소?
이렇게 돌아가면 죽은 장사(將士)의 노부모와 처자식들은 또 얼마나 가슴이 미어질 것이며,
백제 사람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무슨 수로 달랠 수 있겠소?
좌평께서 1천 군사의 목숨을 염려해 항복한 뜻이 갸륵하고 아름다우니
나 또한 그 뜻을 지켜주고 싶지만 도성으로 데려가면 성난 민심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의문이오.
처지를 바꿔 헤아려보면 내 말뜻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외다.”
정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항복한 신라군이 있어 사비로 달고 간다면 그 안위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김유신이 잠시 끊었던 말허리를 이었다.
“이번에 희생당한 우리 군사는 대부분 석토성과 상주의 향군들이고 나머지는 금성 근교에 사는
병부 군사들이오.
그러니 이곳들만 피한다면 노상참변은 면할 수 있을 것이오.
내가 총관의 인(印)을 찍어 통행증을 만들어드릴 테니
좌평께서는 군사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가시오.
한산주나 국원 소경 근처면 괜찮을 듯싶소.
어디든 자리를 잡거든 그 고을 관수에게 신고하되 만일 어려움이 있으면
나한테 직접 찾아오시거나 사람을 보내도 좋소. 내 기꺼이 도우리다.”
정복은 유신의 너그러운 마음씨와 진심에서 우러나온 심모원려에 크게 감복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장군의 은혜를 평생토록 잊지 않겠습니다.
이 정복이 비록 백제에선 좌평까지 지낸 몸이지만 이처럼 극진한 환대와 보살핌을 받고
어찌 장군의 수족이 되지 않겠나이까?
앞으로 부릴 일이 있으면 꼭 저를 불러주십시오.
마소의 도리를 다해 장군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그는 유신으로부터 상주도행군대총관의 도장이 찍힌 통행증을 받아들자
감격한 나머지 땅바닥에 엎드려 넙죽 큰절까지 했다.
유신이 그런 정복을 일으켜 세우고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전쟁이란 본시 이처럼 만인에게 슬픈 것이오.
어디를 가서 살든 우리가 힘을 합치고 뜻을 모아 이 지루한 전란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버립시다.
그래야 좌평께서도 식구들을 다시 만나지요.
부디 내 말을 명심해주오.”
유신의 당부에 정복은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한번 견마지로를 다짐했다.
도살성의 패전은 백제엔 치명적이었다.
그러잖아도 남역의 악성과 진례에서 잃은 군사가 4만이나 되어 국기가 흔들리고
민심이 흉흉하던 차인데 다시 3만 명이 넘는 도성의 정군과 나라의 이름 있는 장수가
거의 죽거나 적군에 사로잡혔으니 그 피폐한 사정이야 중언부언할 것이 없었다.
무신(648년)과 기유(649년) 연간에 전사한 백제군이 도합 7, 8만에 포로로 붙잡혀간 군사까지 합치면
손상된 병력은 얼추 10만에 육박했다.
10만 군대면 백제 군사력의 절반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의자왕은 패하고 돌아온 장수들을 모조리 옥에 가두고 연일 폭주(暴酒)를 일삼으며 괴로워했다.
마음 같아선 다시 군사를 일으켜 아예 신라의 도성으로 쳐들어가고 싶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화닥거리고 피가 머리로 역류했다.
선왕 때부터 얻어맞은 개새끼처럼 늘 도망만 치던 신라군을 보며 자란 그에게 패전의 치욕과 수모는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에는 동원할 군사도, 명을 받들 장수도 없었다.
물려받은 기업과 선왕이 남긴 유지를 떠올리면 괴로움은 더했다.
삼한일통(三韓一統)과 남역 평정의 대업을 이루기는커녕
하루아침에 사직위허(社稷爲墟)를 걱정해야 할 딱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는 술이 아니고선 무엇으로 그 울분을 달랠 수 있으랴.
술에 취하면 또 생각나는 것은 아리따운 여자였다.
대궐의 아리따운 여자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술잔을 채우고 갖은 교태와 아양으로
왕의 환심과 성총(聖寵)을 다투는 순간만은 아무리 괴로운 일도 슬그머니 놓아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의자는 점점 폭주와 황음(荒淫)의 나락으로 빠져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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