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도살성 17
밤이 깊어질수록 격전장은 서쪽으로 밀려갔다.
처절한 난전이 이어진 후로 노인네 초저녁잠 한숨 잘 만큼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병관좌평 은상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부하들을 돕다가 싸움터 한복판에서
신라 장수 천존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먼저 알아본 쪽은 천존이었다.
“낯이 익구나. 그대는 살매현 입구에서 속검(速劍)을 쓰던 바로 그 장수가 아닌가?”
휘황한 달빛 밑에서 천존이 알은체를 하자 은상도 잠시 칼질을 멈추고 천존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일세. 그때는 허름한 갈옷에 천한 신분이더니 그새 제법 출세를 한 모양이네그려.”
20년도 훌쩍 넘어선 재회였으나 두 사람은 용케 서로를 알아보았다.
승부를 가리지 못한 싸움은 장수에게는 그만큼 오래 남는 법이었다.
천존이 은상의 대꾸에 돌연 껄껄 웃었다.
“세월이 가면 마땅히 달라지는 게 있어야지. 어쩌면 그대는 하나도 다른 게 없는가?”
“무슨 소리냐?”
“옛날에도 자네는 국경을 넘어와 우리나라를 어지럽히더니 이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역시 그러하니
그 쥐새끼 같은 신세가 어찌 딱하지 않으랴! 아마도 자네는 죽어야 이 짓을 그만둘 모양일세.”
천존의 빈정거리는 말에 은상은 잔뜩 심기가 뒤틀렸다.
“닥쳐라! 그때 가리지 못한 승부는 늘 내 마음에 짐이 되었다.
오늘은 절대로 살려 보내지 않을 테니 그리 알라!”
은상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자 천존도 칼을 고쳐 잡으며 응수했다.
“동감일세. 이번엔 제발 도망가지 말게.”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몇 합 경쾌하게 이어지고 기합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바쁘게 뒤섞였다.
검술로는 나라에서 당할 자가 없다는 두 사람이었다.
은상의 칼날이 혹한의 매서운 바람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자
천존의 칼도 따라가며 춤을 추었다.
시야에 잡히지도 않을 빠른 검법을 구사했지만 양인의 움직임엔
바늘 끝 하나도 파고들 만한 빈틈이 없었다.
더구나 이십 수년 세월에 여유와 노련미까지 더해져서 승부는 더욱 가르기 어려워 보였다.
다만 한 가지 천존에게 유리한 점은 타고 나온 말이었다.
천존의 말 찬간자는 은상의 말보다 움직임이 빨라서 20합 가량 기운을 쓴 후에는
늘 주인에게 공세를 취할 기회를 주었다.
천존은 말 덕을 톡톡히 보면서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양측 군사가 어지럽게 뒤엉킨 난전과 격전의 한복판에서 두 장수는
장장 1백여 합이 넘게 입에 단내가 나도록 싸웠지만 감히 누구도 끼어들거나 거들지 못했다.
그 정도면 싸움은 싸움이라기보다 차라리 눈부신 기예(技藝)에 가까웠다.
상대의 허를 찾아다니는 칼끝의 정교함은 옥좌에 용 비늘을 새기는 장인의 손끝을 압도할 정도였고,
그것을 상대하는 검술의 절묘함 또한 무예를 아는 사람의 눈에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 아름답게 비쳤다.
그러나 슬픈 일은 둘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만약 삼한이 오래전에 일가(一家)였다면 하나의 사직과 한 사람의 임금을 섬기며 천수가 다하도록
공을 다투었을 두 기인이었으나 섬기는 임금과 태어난 곳의 사직이 다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말 한 마디 없이 무려 130여 합을 겨루고 났을 때였다.
양인의 팽팽한 결전은 천존을 발견한 진주가 힘껏 말을 달려 나타나면서 균형이 깨어졌다.
진주도 신라의 젊은 장수 가운데는 첫손에 꼽는 검술의 달인이었다.
그는 은상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천존의 무예를 익히 아는 그로서 꽤나 오랫동안 맞상대를 하고 있으니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구나 하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장군?”
진주는 천존의 안부를 확인한 뒤 재빨리 말을 몰아 뒤에서 은상을 협공했다.
은상은 양쪽에서 날아드는 두 자루의 칼을 상대해 4, 5합을 겨뤘지만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아니 사람보다도 먼저 지친 것은 은상의 말이었다.
진주가 칼끝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은상의 등뒤를 치자 은상은 말등에 납작 상체를 붙이고
고삐를 급히 바른쪽으로 잡아챘다.
그런데 잽싸게 돌아주어야 할 말이 갑자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날 뿐 주인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그를 본 천존의 찬간자가 급히 달려들며 은상의 말머리를 제 이마로 처박자
당장 은상의 왼쪽에 허점이 생겼다.
천존이 그 기회를 포착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천존은 은상의 무예가 아깝다는 생각이 스쳤다.
부부는 살면서 정이 들고 장수는 싸우면서 정이 들게 마련이었다.
그는 단칼에 은상을 죽일 수 있었으나 잠깐 사이에 칼날을 비스듬히 고쳐 쥐고
왼쪽 팔을 내리치는 데 그쳤다.
팔을 베인 은상은 비명도 지르지 않은 채 의연하게 천존을 돌아보았다.
천존은 그를 달래어 항복할 것을 권유해볼 생각이었다.
항복할 의사만 있다면 김유신에게 말해 앞길을 열어줄 수도 있으리라 싶었다.
천존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시선을 맞추고 입술을 달싹거릴 때였다.
어느새 은상의 부상한 왼쪽을 파고든 진주가 매서운 기합과 함께 칼을 휘두르자
거짓말처럼 은상의 머리가 땅에 뚝 떨어지고 말았다.
은상의 목에서 붉은 피가 밤하늘로 높이 솟구치자 주인을 잃은 말이 벌떡 앞발을 쳐들었고,
그 소란에 놀란 천존의 찬간자도 길게 울음을 토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용화산 화적촌에서 두령 길지의 아들로 태어나 영특한 머리와 타고난 검술로
양대를 섬기며 병관좌평에까지 올랐던 백제 명장 은상의 최후가 그와 같았다.
“보아하니 높은 자 같습니다. 혹시 아는 적장입니까?”
진주가 물었다.
“은상이라는 자일세. 소싯적에 만나 승부를 못 가렸지. 아깝구먼.”
“은상이라면 적군의 수괴가 아닙니까? 무엇이 아깝다는 말씀입니까?”
“칼 솜씨가 아깝다는 말일세.”
천존은 안타깝게 혀를 찼다.
진주가 그런 천존을 힐끔 곁눈질로 바라본 뒤 목소리를 높여 웃었다.
“장군과 저도 명활성 축국장에서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했습지요.
그렇다면 이거 제가 괜히 끼어든 셈이군요.
직접 승부를 가리시게 그냥 둘 걸 그랬습니다, 하하.”
진주는 계림의 전통 검법을 배운 장수였고,
천존의 칼 솜씨엔 가야인이 즐겨 쓰던 환도의 검술이 묻어 있었다.
평소에 진주는 천존의 검술을 일컬어 정통이 아니라며 흉을 잡곤 했다.
20년 가량 나이 차는 있었지만 만인이 최고의 검사(劍士)로 인정하는 두 사람 간에는
묘한 경쟁심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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