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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도살성 16

오늘의 쉼터 2014. 11. 14. 14:01

제29장 도살성 16 

 

 

 

“원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니 이럴 때 우리가 먼저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녁밥을 지을 무렵 흥수가 말했다.

하지만 은상으로선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만일 그랬다가 혹시라도 대병을 만난다면 헤어날 방법이 없지 않소?”

“어차피 한판 결전은 불가피한 일이 아닙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뒷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소.”

“뒷일이라니요?”

흥수의 질문에 은상은 잠시 눈을 감았다.

미리 무슨 느낌을 받았던 것일까.

잠시 뒤 그는 눈을 뜨고 흥수에게 말했다.

“공은 후군을 이끌고 뒤에 합류했으니 소임을 다하지 않았소?

하니 지적공과 함께 지금 당장 도성으로 돌아가시오.”

돌연한 말에 흥수가 깜짝 놀랐다.

“적을 코앞에 두고 어찌 돌아가란 말씀입니까?

우리도 미리 군령다짐을 하고 나오긴 장군과 마찬가집니다!”

그러자 은상은 사뭇 근엄한 소리로 일렀다.

“이 싸움은 피차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벌판에서 창칼로 승부를 겨루는 백병전이오.

무기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그대들 두 좌평이 있어봐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소.

그러니 돌아가시오.

만일 대왕이 군령다짐을 말하거든 모든 책임을 나한테 전가하면 될 것이오.

내가 이미 대왕으로부터 군사의 절도를 위임받아 나왔으니 내 명이 곧 왕명이 아니오?”

흥수는 문득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은상의 말처럼 비록 자신과 사택지적은 칼을 벼린 장수는 아니었지만 병법과 용병에는 누구보다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해온 터였다.

그런데 아직 전란의 승패가 결정나기도 전에 돌아가라니 불쾌감을 넘어 원통한 느낌마저 들었다.

“따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은 출병 이후 맞은 최대의 위기가 아닙니까?

명을 거둬주시오!”

흥수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은상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돌아가라는데 웬놈의 잔소리가 그렇게 많은가?

이것은 군령이다!

전장에서 군령을 어기면 반역이 되는 줄을 그대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

은상의 호통에 흥수는 크게 당황했다.

차마 그렇게까지 나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그였다.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흥수를 노려보던 은상이 사뭇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싸움판을 돌아다니며 나이를 먹은 터라 전세를 읽는 눈이 그대보다 위에 있네.

그런데 이 싸움은 공을 다투는 싸움이 아닐세.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우리 군사 두셋이 적군 하나를 당하지 못하니

어찌 반드시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내가 걱정하는 건 석토성 이후의 일일세.

양식이 떨어져도 밥 지을 사람은 남겨둬야지.

이기고 돌아가면 다행이지만 만일 우리가 무너지더라도

사직을 이어갈 신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제야 흥수는 은상의 깊은 뜻을 알아차렸다.

은상은 대군의 책임자답게 위엄 있는 말투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에 싸워보니 신라군은 과연 예전의 신라군이 아니요,

군사를 부리는 것을 보니 김유신이란 장수도 괜히 허명만 높은 자는 아닐세.

군사를 내었다가 적이 강한 것을 알면 물러날 줄 아는 것도 병가의 지혜가 아닌가.

평시만 같으면 마땅히 여기서 그만둬야 할 싸움일세.

성공해도 얻는 것은 적고 실패하면 잃는 것은 많으니 이런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

그러나 이대로 돌아가면 대왕의 진노를 사서 모든 장수들이 떼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일세.

만일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하거든 자네가 내 말을 꼭 대왕께 전해주시게나.

지금은 신라를 칠 때가 아니라 우리 군사를 기를 때일세.

강한 군사는 하루아침에 기를 수 없고, 강군이 오합지졸로 변하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네.

오늘 군사를 매섭게 기르면 10년 뒤에나 그 결과를 볼 것이지만,

오늘 허약한 군사는 10년 전에서 그 연유를 찾아야 한다네.

자네들은 돌아가거든 부디 이 점을 대왕께 잘 말씀드려 뒷일을 대비해주시게.

그래야 두 번 다시 오늘과 같은 낭패가 없을 것이네.”

흥수는 은상의 충정에 감복해 눈물을 흘렸다.

“일이 정 어려울 것 같으면 이대로 돌아갑시다.

대왕께는 제가 목을 걸고 진언하여 살아날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석토성을 얻고 아직도 휘하에 1만 군사가 있으니 꼭 무공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간곡한 말로 은상을 설득해보았으나 은상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하면 장래가 더 어렵네.

충언이 통하려면 뛰어난 공을 세우거나, 그게 아니면 피가 섞여야 한다네.

이기고 돌아가면 내가 대왕을 설득하겠지만 그러지 못하면 그대가 뒷일을 맡아주게나.

시간이 없네.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떠나게나!”

말을 마치자 은상은 갑자기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고 흥수의 머리카락을 날려버렸다.

흥수가 깜짝 놀라 목을 움츠리는 순간 바닥에 뚝 떨어진 것은 쓰고 있던 오라관과 한 줌의 머리채였다.

은상이 그것을 집어들어 흥수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으로 그대와 지적공의 핑계는 능히 댈 수 있지 않겠는가? 자, 서두르시게!”

그날도 여전히 달은 좋았다. 밤이 되자 김유신은 장수들을 불렀다.

“이틀이나 쉬었으니 다시 한번 싸워볼 때가 되었다.

적군은 우리에게 원군이 도착한 줄 알고 바짝 긴장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 달밤에 군사를 내면 적은 우리 군사의 규모를 잘 파악하지 못해 낮에 싸우는 것보다

오히려 쉬울 것이다.

성루에 횃불을 촘촘히 늘여 세우고 성안의 여자와 노인들을 동원해 북소리를 갑절이나

더 크게 울리도록 한 뒤 군사를 여러 패로 나눠 일시에 분격한다면 백제 잔병들은

싸우지도 않고 달아날 공산이 크다.

잘만 하면 금일 밤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장수들에게 각기 3, 4백 명의 군사를 맡기고 성민들을 동원해 요란하게 북을 치게 한 뒤

불시에 여러 방향에서 백제군을 기습했다.

적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 이른 아침부터 긴장을 늦추지 않고 기다리던 백제군들이

교대로 저녁을 지어 먹고 막 나른함에 빠져 있을 때였다.

“기습이다! 적의 대병이 기습해온다!”

초병의 고함소리가 진중에 퍼지자 은상도 직접 칼과 방패를 챙겨 들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그 역시 군사와 장수들을 독려하며 신라군에 정면으로 맞섰다.

시체가 산처럼 쌓여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는 도살군 벌판에서 또 한 번의 부질없는 싸움이 벌어졌다.

달빛은 가까운 거리의 적과 동료를 간신히 구분할 정도였다.

해맑은 만월은 땅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잔혹한 살육전을 보기 싫었는지 자꾸만 구름 뒤로 숨으며

자리를 피해 다녔다.

그 달빛을 기어이 쫓아가면서 수많은 인명이 또다시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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