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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도살성 14

오늘의 쉼터 2014. 11. 14. 13:46

제29장 도살성 14 

 

 

 


선왕 때부터 신라군과 대적하며 무공을 세운 은상은 그사이 부쩍 달라진 양측 군사들의 기세를

누구보다 또렷이 피부로 절감했다.

아군도 예전의 군사가 아니었고 적군도 그러했다.

선왕 때는 비록 지금만큼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군사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면

해보자는 결의가 뜨겁고,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 같은 게 있었다.

그 후끈한 열기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까지 그대로 이어져서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상대할 때도 결코 식지 않았다.

그때의 군사들은 옆에서 싸우는 동료를 돌아볼 줄 알았고,

동료가 죽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나갔으며,

날이 어두워 진중에 돌아와서도 죽은 동료를 생각하며 밤새 바득바득 이를 갈곤 했다.

하나가 죽으면 그 빈자리를 여럿이 다투어 채우고자 했으므로 웬만한 싸움에선 몇 사람이

희생된 뒤에 군대가 더욱 강해지고 용맹해졌다.

그때는 1백 명이 할 수 있는 일이면 50명으로도 능히 해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병관좌평으로 내정을 보필하다가 10년 만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와보니

사정은 그새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군사들은 단순히 시키는 일만 할 뿐이었고, 곁에서 싸우던 동료가 죽어도

제 목숨 지키기에만 바빠 어떻게든 자세를 낮추고 몸을 사렸다.

희생이 크면 싸우고 돌아와 불만 소리가 높았고,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무엇하러 하느냐며 임금과 조정을 싸잡아 욕하는 소리가

군막 밖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전쟁터에 데려간 군사들은 흡사 꼭두각시와 같았다.

동(東)을 치라면 오로지 동만 칠 줄 알았다.

남이나 북에 설혹 공을 세울 자리가 있어도 시선을 피하고 나서기를 꺼리니

장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지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적의 후미를 치도록 일을 맡긴 정복의 군사들이었다.

정복의 1천 군사는 도살군 동편으로 돌아가 강변에 진을 친 뒤

김유신이 원군을 이끌고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당초의 예상대로 김유신의 군대가 성안에 머물지 않고 성밖으로 나와 진을 치자

석토성의 본진과 성원상접이 어렵다는 이유로 군사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후미를 들이친다지만 어떻게 1천 군사로 1만이 넘는 대군을 공격하느냐는 게

그들의 항변이었다.

시초만 해도 정복은 칼을 뽑아 들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편장으로 데려간

부여나조차 고개를 절절 흔들었다.

“이곳에선 적군에 가려 본진의 움직임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만 군사를 내었다가 적이 반격을 가해오면 그땐 떼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군사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여나는 사뭇 목청을 낮춰 이렇게 속삭였다.

“협공을 지시하면서 겨우 1천 군사를 내어준 병관좌평의 속셈을 장군께선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병관좌평이 의직공과 친분이 두텁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닙니다.

일이 성공하면 공은 저들의 것이요,

실패하면 장군 한 사람이 모든 죄를 뒤집어쓸 판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뒤쪽으로 돌려놓은 패전용 군사들입니다.

지고 돌아간다면 우리를 패전의 명분으로 삼을 것이 뻔한데 장군께서는 어찌 화를 자초하려 하십니까?”

예전 같지 않기로는 신하와 장수들의 사이도 마찬가지였다.

손익을 계산하고 실리를 따지는 영악한 인물은 많았으나 예전처럼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또한 세태가 변하고 인심이 바뀐 탓이었다.

어려운 시절, 군막에서 지은 설익은 잡곡밥을 한 개의 숟가락으로 나눠 먹으면서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던 동료애는 늙은 신하들의 회고담에나 나오는 얘기였다.

포의지교(布衣之交)나 굴기지사(?起之士)의 깊고 끈끈한 사귐은 사라지고

오로지 이해득실에 따라서만 친분이 생기고 별도의 무리가 형성되었다.

정복은 부여나의 말을 듣고 크게 격분했다.

“저런 죽일 놈들을 보았나! 그렇다면 내 어찌 앉아서 당할 수만 있겠느냐?”

그는 양측에서 사투가 벌어진 열흘 동안 단 한 번도 군사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은상을 비롯한 본진의 장수들은 이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은상이 보기에 아군은 예전의 적군과 같고, 적군은 과거의 아군과 같았다.

하다못해 말뚝에 매어놓은 군막의 끈이 풀려도 아무도 솔선해서 묶는 이가 없었다.

자연히 하나가 비면 열이 빈 것처럼 느껴졌다.

한 곳이 뚫리자 여러 곳이 동시에 무너졌다.

사정이 이러니 같은 조건의 단병접전에서도 백제군의 희생이 훨씬 컸다.

은상은 이 모두가 풍족함에서 연유한 극도의 개인주의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호통을 치거나 벌을 준다고 단번에 고쳐질 것도 아니었다.

제아무리 용맹한 장수와 신묘한 책사가 있다 한들 무력한 군사들을 가지고는 방법이 없었다.

“음식의 단맛이 사람을 병들게 한다더니 겪어보니 과연 그렇구나.

아아, 10년 전만 해도 천하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사비의 강군들이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은상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신라 진영에서 갑자기 군사를 내지 않은 것은 그가 한창 낭패감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백제 쪽에서도 내려던 군사를 거둬들인 이면에는 이같은 속사정이 숨어 있었다.

교전 없이 하루가 지나간 그날이었다.

김유신은 백제군이 나타나지 않자 내심 한 줄기 서광을 본 듯하여 마음이 가벼웠다.

적군의 사정 또한 아군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뜻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잠시 지친 군사와 말을 쉬게 했다가 재거(再擧)를 도모할 일이었다.

그는 도살성으로부터 곡식을 가져와 밥을 짓고 소와 개를 잡아 하루 동안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자 별안간 물새 떼가 동쪽에서부터 날아와 신라군이 쳐놓은 군막 위를 지나갔다.

이를 본 신라군들은 크게 놀랐다.

물은 본래 서(西)쪽을 뜻하는데, 물새가 동에서 서로 날아간 것은 동쪽이 망할 징조라는 게

주역에 근거한 군사들의 해석이었다.

유신이 소천을 불러 묻자 소천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개는 그렇습니다. 망할 징조까지는 아니라도 불길한 뜻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유신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곧 큰 소리로 웃었다.

“역경이 제아무리 신묘한 경전일지언정 어찌 물새가 오고 가는 일까지 알겠느냐?

이는 조금도 괴이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굳이 따지면 흉조가 아니라 오히려 길조다.”

그리고 그는 희색이 만면해 소리쳤다.

“물새가 우리를 돕는구나. 너는 시급히 군사들을 불러모아라!”

소천이 영문을 알지 못해 눈만 끔뻑거리고 섰다가,

“뭣하느냐? 어서 가서 군사들을 모으지 않고?”

유신의 재촉하는 말을 듣고야 군막의 북소리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군사들뿐 아니라 장수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유신의 막사로 모여들었다.

“도살성 동쪽에는 목천(木川)이 흐르고 큰 못이 있는데 예로부터 물새가 많이 날아들었다.

우리가 원군을 이끌고 목천을 돌아올 때도 수면에는 새들이 하얗게 앉아 노는 것을 보았는데,

이제 새들이 급히 날아가는 것은 그쪽에서 물새가 놀랄 만한 인기척이 났기 때문이다.

조금 뒤엔 반드시 백제인이 우리를 정탐하러 올 것이니

너희는 낯선 자가 있어도 모르는 체하고 절대로 누구냐고 묻지 말라.”

유신은 모든 군사들에게 신신당부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오늘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라.

명일엔 구원병이 올 것이다.

한산주 북방의 군사들도 오고 금성 병부에서도 원군이 당도할 것이니

그 숫자가 대략 2만은 될 것이다.

우리는 구원병이 도착한 다음에야 비로소 결전할 것이다!”

유신의 말에 군사들은 일제히 환호를 올리며 기뻐했다.

한 사람이 아쉬운 판에 2만이나 되는 원군이 온다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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