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도살성 15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신라군의 막사엔 과연 유신의 말처럼 낯선 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도살성 동편 강가에서 열흘간이나 움직이지 않았던 정복의 군사들이었다.
정복과 부여나는 연일 도살성 쪽에서 들려오던 함성과 고각(鼓角) 소리가
그날따라 한 번도 나지 않자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비록 화가 나서 군령을 따르지 않았지만 날짜가 지날수록 불안감도 깊어졌다.
신라 병영에 염탐꾼을 보내자는 것은 부여청의 장자인 부여나의 꾀였다.
“무턱대고 본진으로 사람을 보냈다가 만일 병관좌평이 군령 어긴 일을 묻는다면 둘러댈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적군의 사정을 알아본 뒤에는 여러 가지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정복은 휘하의 군사 가운데 몇 사람을 신라인 복장으로 위장시켜 도살성으로 잠입시켰다.
백성들로 위장한 정복의 염객들은 군영을 기웃거리며 군사들이 나누는 얘깃소리를 들었다.
“내일이면 석토성을 되찾는 건 물론이고 나머지 적군도 몽땅 요절을 낼 수 있겠지?”
“이르다뿐인가. 원군이 2만이나 오면 이참에 백제놈들 도성까지 한달음에 쳐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2만 군사가 갑자기 어디서 생겼나?”
“어딘 어디야? 북쪽 국경에서 뒤로 빼낸 군사들이지.”
“만일 그 사이에 고구려가 쳐내려오면 어떻게 하려고?”
“이 사람아, 지금 그게 문젠가? 어떻게든 백제부터 요절을 내고 봐야지.
김유신 장군이 어떤 사람인데 부하들을 이렇게 죽이고도 가만있을 것 같애?”
병영의 군사들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삼삼오오 군막 근처에 둘러앉아
알 수 없는 소리들을 주고받았다.
처음엔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듣던 염객들이 점점 눈알이 커지고 안색이 변했다.
“어쨌거나 내일 모레면 끝장날 일일세.”
“백제놈들이라면 자다가도 이가 갈려. 일이 여기까지 왔다면 이참에 아주 끝을 봐야지.”
눈에 보이는 신라군들마다 자신에 찬 얼굴로 새파랗게 결전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개중에는 의분을 못 이겨 벌떡 일어나서 서쪽 하늘에 대고 크게 고함을 지르는 이도 있었다.
“이놈들아, 잘 자라! 오늘이 너희 인생에 마지막 밤이다!”
사정을 알아차린 염객들은 급히 도살성을 빠져나와 허둥지둥 자신들의 병영으로 돌아갔다.
10여 명이나 되는 염탐꾼으로부터 한결같이 가공할 소식을 전해 들은 정복과 부여나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책에 골몰했다.
“석토성으로 시급히 사람을 보내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여나의 제안에 정복도 반대하지 않았다.
앙심이야 그대로였지만 본진이 망하면 그들 역시 안전하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정복은 급히 석토성으로 전령을 파견해 내일 적진에 원군 2만이 당도한다는 사실을 은상에게 알렸다.
이튿날 새벽에 소식을 들은 은상은 대경실색하면서도 일변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신라가 동원할 군사는 빤한데 어디서 갑자기 2만이나 되는 원군이 온다는 말인가?”
“고구려 국경에 배치한 군사들을 뒤로 빼돌렸다고 합니다.”
그제야 은상도 점점 안색이 굳어졌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 그렇다면 정말 큰일났구나! 대체 이 노릇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는 장수들을 모조리 깨워 의논을 해보았지만 뚜렷한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
“가거든 위사좌평에게 군사를 모두 이끌고 이쪽으로 합류하라고 일러라.
창칼 든 군사 하나가 아쉬운 판국이다!”
은상은 정복이 군령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꾸짖을 여유도 없었다.
전령이 말을 타고 떠나자 그는 장수들에게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가지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비록 적군의 숫자가 많다 한들 무슨 위협이 되겠는가?
전장의 비겁함은 살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대들은 휘하의 군사들이 반드시 필사의 각오를 하도록 단속하라.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백제군은 이른 아침부터 군사들을 횡렬로 늘여 세우고 바짝 긴장한 채 신라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아침이 지나고 낮이 되어도 신라군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적보다 많은 군사를 가지고도 백제군은 되레 맹수의 공격을 걱정하는 약한 짐승의 무리처럼
신라군의 눈치만 살폈다.
백제군의 철통 같은 방비는 해가 중천을 넘어가 어느덧 승석 때가 되도록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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