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도살성 13
“불쌍하기는 피아가 다 마찬가지일세.
우리 군사들도, 백제 군사들도 따지고 보면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는가?
옛말에 장수가 3대를 가면 천벌을 면치 못해 멸문(滅門)을 당한다고 했는데
그 말의 뜻을 오늘에야 알 것 같네.
무고한 장정들을 끌고 나와 양쪽 공히 시체로 산을 만들었으니
그 죄가 어찌 작다고 하겠는가?”
“싸움을 먼저 건 쪽은 백제가 아닙니까?
죄를 따지자면 의자왕과 백제 장수들에게 있지 어찌 장군에게 있겠습니까?”
진춘의 말에 유신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반드시 이번 싸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세.
우리가 이렇게 살아온 게 7백 년 아닌가?
양국의 사직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면 이같은 일은 천년 만년 계속될 걸세.
어느 세월에나 불쌍한 것은 죄 없이 죽는 백성들이요,
양국 가운데 누구의 죄가 더 큰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네.
흔히 나라에서는 백성을 위해 싸움을 한다지만 이런 곳에서 한번 고요히 생각해보게.
백성들은 어느 나라에 가서도 이처럼 참혹하게 죽지는 않을 걸세.
적이 망하든지 우리가 망하든지, 어쨌든 어느 한쪽은 필히 망해야 하네.”
나이 든 장수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유신의 뜻에 공감했지만
뒤에 합류한 젊은 장수들은 노장의 비애를 선뜻 헤아리지 못했다.
“우리 군사가 비록 많이 죽었지만 적군도 마찬가집니다.
어찌 우리가 망할 수 있겠습니까?”
흠돌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소리치자 진주도 덩달아 목청을 높였다.
“그렇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끝이 보이지 않던 적군의 숫자가 이젠 대충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지쳤다면 적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테니 내일 해만 뜨면
제가 은상과 그 부하들의 머리를 반드시 장군께 갖다 바치겠나이다!”
김유신은 젊은 장수들의 결연한 표정을 보자 허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이들은 모두 김유신을 하늘같이 여기고 아버지처럼 따르던 장수들이었다.
“너희들은 여기서 만일 살아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내가 원망스럽지 않겠느냐?”
“무엇이 원망스럽겠습니까? 오히려 장군을 따라 나왔다가 죽는 것은 영광입니다!”
문충의 대답에 진주와 흠돌도 지지 않고 덧붙였다.
“공연한 걱정일랑 거두십시오! 우리는 이번 싸움에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들판에 누운 우리 군사의 시신을 보더라도 어찌 한 뼘인들 물러설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오직 장군께 심려를 끼쳐 죄송할 뿐입니다!
살아남은 군사들도 모두 저희들과 뜻이 같습니다.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울 것입니다!”
그러자 젊은 장수들을 대변해 유신의 아우인 흠순이 입을 열었다.
“간악한 백제를 쳐서 그 종족을 멸하는 것은 우리 계림의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지난 7백 년 역사가 어느 한 시절도 편안한 세월이 없었다 하지만 또한 역대를 상고하건대
오늘처럼 적이 창광하여 날뛰던 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장군께서 우리 군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적군까지 불쌍히 여기신다면
자칫 우리가 적의 칼날에 종족을 멸하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저희는 아무도 장군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백제와 신라의 사직이 하나가 되어 하루빨리 이런 싸움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태산 같지만
그렇게 하려면 기필코 백제의 사직을 끌어내려 땅에 묻어야 합니다.
그때까지는 어제의 장수가 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오늘의 장수가 할 것이고,
오늘의 군사가 못한 일은 내일의 군사가 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부디 심기를 편히 가지소서.”
흠순은 열변을 토하며 형을 위로했다.
유신은 한결 밝아진 낯으로 젊은 장수들을 돌아보았다.
“너희가 그처럼 말하니 내 마음이 가볍구나.
그러나 우리가 만에 하나라도 여기서 패한다면 적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날뛸 것이고,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다시 일으키기 어려운 침체의 나락으로 빠져들 공산이 크다.
양국의 앞날이 남은 4천 명의 어깨에 달려 있으니 어찌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겠느냐?
내일은 모두 출정을 미루고 적의 동태를 한번 유심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석토성 구원에 실패했을 때 닥칠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당주 이세민이 급사한 뒤로 든든한 의지처(依支處)를 잃고 심란해하던 신라였다.
그런 차에 김유신마저 백제에 패한다면 신라로선 이제 믿을 데가 하나도 없어지는 셈이었다.
이름이 높아질수록 그만큼 책임 또한 커지는 법이었다.
유신은 이세민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양어깨가 더욱 무거워짐을 느꼈다.
자신이 출정한 싸움에선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이튿날 신라군은 교전 이후 처음으로 군사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신라군이 출정하지 않자 백제 진영에서도 내려던 군사를 거두어들였다.
이 무렵 은상을 비롯한 백제 장수들도 절반이 넘는 대군을 잃고 당황하기로는
신라군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점고를 해보니 남은 군사는 불과 1만여 명, 예상 외로 적의 반격이 드세고 악착같아서
갈수록 기운이 빠지던 그들이었다.
하물며 군령다짐에 목까지 걸고 나온 장수들이 아니던가.
“저토록 많은 군사를 몰살시켰으니 석토성을 얻은 공은 이제 공이 아니오.
만일 이대로 돌아간다면 대왕은 우리가 써놓고 온 군령장을 코앞에서 흔들어댈 게 틀림없소.”
“적의 입당로를 끊거나 김유신의 목을 베거나, 둘 중 하나는 취해야 우리 목이 온전할 것이외다.”
장수들은 은상이 머무는 군막으로 찾아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석토성을 취할 때만 해도 드높았던 백제군의 사기가 도살성 앞에서 열흘간 혈전을 치르며
여지없이 꺾여버리고 말았다.
백제 장수 가운데 가장 당황한 이는 바로 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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