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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도살성 10

오늘의 쉼터 2014. 11. 13. 15:31

제29장 도살성 10 

 

 

 

“의직이 연거푸 패하고도 좌평에 그대로 있는 것은 자칫 벼슬의 가치를 떨어뜨려 위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하물며 전장에 나가서는 상급자가 내린 군령을 하급자가 좇아야 하는데 군령이 바로 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군율을 칼날같이 세우겠는가?”

이어 그는 의직의 벼슬을 달솔로 강등시키고 정복을 새롭게 위사좌평에 임명했다.

팔족의 신망이 두터운 의직을 갑자기 좌평에서 폐하자 많은 신하들이 낙담을 금치 못했다.

그러자 의자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이렇게 말했다.

“출정에 앞서 모든 장수는 군령장을 써놓고 나가야 한다.

패하고 돌아오면 누구를 막론하고 목이 달아날 판인데 그깟 좌평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러니 부디 공을 세워서 돌아오라.

공을 세우고 오기만 하면 10명이든 20명이든 모두 좌평으로 삼아서 천하에 부러운 것이 없도록

만들어주리라!”

그는 낙담한 의직에게도 따로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일렀다.

“너도 좌평에서 폐한 것을 너무 괘념치 마라.

이번에 싸우고 돌아오면 그 공과에 따라 지위의 높고 낮음을 다시 정하여 조정의 면모를 일신할 것이니 오늘의 수치를 만회하려거든 반드시 적을 죽이고 김유신의 목을 취하여 돌아오라.”

이때 백제가 일으킨 군사는 어림잡아 3만여 명,

모두가 도성 근교에 배치된 5방(五方) 소속의 맹졸들이었다.

의자는 병관좌평 은상을 필두로 정복, 윤충, 의직, 정중, 자견 등의 달솔 장수와 부여나(扶餘奈),

부여군(扶餘?), 상영(常永), 무수(武守), 계백(階伯), 정무(正武) 등의 은솔 장수를 총동원해

신라의 입당로인 석토성(石吐城) 부근을 치도록 했다.

백제로선 가히 전력을 기울여 회심의 승부수를 띄운 셈이었다.

장수들은 지고 돌아오면 목을 쳐도 좋다는 군령다짐에 서명한 뒤 은상을 따라 도성을 떠났다.

석토성은 좌우로 여섯 개의 자성을 거느린 중부 권역의 거대한 장성이었다.

특히 석토성 근교에는 만노군과 도살군 등 소문난 철산지(鐵産地)들이 널려 있어서

이곳을 모두 얻는다면 적의 입당로를 막는 것은 물론, 엄청난 양의 철기까지 노획할 수 있었다.

은상은 이참에 쇠를 녹여 병기구를 만드는 신라의 요지를 빼앗아 남역에서 잃은 땅만큼

중부 권역을 장악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웅진성에 이르자 군사를 크게 몇 패로 나눈 다음 장수들에게 말했다.

“석토성은 성곽이 높고 견고해서 무턱대고 쳐서는 이기기 어렵지만 탕정(湯井:아산)과

대목악(大木岳:천안) 등으로 나뉘어 친다면 적이 분산되어 일이 한결 수월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3만이나 되니 석토성을 취하는 것은 식은죽먹기다.

그런데 문제는 석토성을 얻은 다음이다.”

어느덧 50줄에 접어든 은상은 싸움터에서 이름을 떨친 명장답게 노련한 시선으로 뒷일을 예측했다.

“석토성에 봉화가 오르면 신라에서는 틀림없이 김유신이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와 성을 되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설칠 게 뻔하다.

이때 우리 군사가 성문을 닫아걸고 시석으로 응수한다면 수성(守城)에는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모두 군령다짐까지 해두고 나왔으므로 목숨을 지키려면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게 유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많은 장수와 대병이 출정해 기껏 석토성을 치고 돌아가는 것이 무슨 공이 될 것이며,

그 정도로는 대왕의 노여움이 결코 가라앉지도 않을 것이다.

대왕을 달래고 불안한 민심을 다스리려면 만인이 찬탄할 대공을 세우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은상의 제안에 장수들은 이구동성 그렇게 하자고 입을 모았다.

제장들의 동의를 구하고 나자 은상은 비로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석토성을 근거로 도살군과 만노군을 쳐서 아우르고 그 군사를 그대로 몰아 당항성까지,

더 나아가 한산까지 진격하자는 실로 야심에 찬 계획이었다.

“매사는 처음 마음먹기에 달렸다.

10리를 가려는 자는 5리만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만

백 리를 가려고 나선 자에게 10리쯤은 길도 아니다.

제장들은 처음부터 마음을 크게 가져라!”

그렇게 다짐을 둔 은상은 휘하의 장수들을 호명하며 군령을 내렸다.

“윤충은 부여군, 상영과 함께 5천 군사를 이끌고 탕정으로 가서 석토성 서문을 공격하되

홀숫날에는 성을 치고 짝숫날에는 군사를 쉬게 하기를 세 번에 걸쳐 되풀이하였다가

마지막 짝숫날에는 전력으로 성을 쳐라.

그러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성을 취하고 나면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고 도살성(道薩城:천안) 서쪽으로 오라.”

윤충 다음으로 은상은 정중과 자견을 불렀다.

“그대들은 군사 5천을 이끌고 대목악으로 돌아가라.

대목악을 지나면 석토성의 자성이 둘 있는데 전날 서동 대왕께서 낭성을 취할 때

쓰셨던 화공을 쓴다면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석토성 동문으로 가서 성을 공격하되 홀숫날에는 군사를 쉬게 하기를

두 번 되풀이했다가 마지막 짝숫날 전력으로 성을 쳐라.

그대들 역시 성을 취한 다음엔 곧바로 윤충의 군사와 합류해 도살성으로 오라.”

정중과 자견이 군령을 받고 물러났다.

다음으로 호명된 이는 의직을 밀어내고 위사좌평에 오른 정복이었다.

“공은 부여나와 함께 1천 군사를 데리고 도살군 동쪽으로 돌아가서 강변에 진을 치고

김유신이 원군을 이끌고 나타나기를 기다리시오.

김유신의 군대는 석토성을 되찾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틀림없이 도살성 쪽으로 몰려갈 것이오.

그럴 때 원군이 다 지나가고 난 뒤 갑자기 군사를 내어 적의 후미를 들이친다면

적은 이내 큰 혼란에 빠질 게 틀림없소.

공은 후미에서 달아나는 적을 모조리 참살한 뒤 그 병력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거든

급히 만노군으로 진격하시오.”

마지막으로 그는 무수와 계백을 불렀다.

“너희도 마군 1천 기를 이끌고 먼저 석토성의 남문으로 가서 싸움을 걸되

적이 군사를 내어 쫓아오면 싸우는 체하며 도망갔다가 적이 물러가면

다시 성문에 가서 약을 올려라.

그럼 적군은 우리를 얕잡아보고 제일 먼저 남문으로 몰릴 것이다.

나는 모레쯤 정무와 함께 그곳에 당도해 너희와 합류할 것이니

그때까지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하라.”

군령은 모두 내렸지만 유일하게 아무 명령도 받지 못한 사람이 의직이었다.

의직은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은상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장군마저 나를 능멸하시는구려. 아아, 도무지 분통이 터져 살 수가 없소!”

그러자 은상은 온화한 얼굴로 의직에게 말했다.

“나는 공이 편전에서 지나친 수모를 당해 혹시라도 항심을 잃을까 염려가 될 뿐

다른 뜻은 추호도 없소이다.

우리가 모두 대공을 세우고 돌아가면 공의 허물도 함께 덮일 것이니

너무 서운하게 여기지 말고 후군에서 이탈하는 군사나 없는지 감독해주시구려.”

은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의직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이제 장군의 계책을 들어보면 우리 군사가 대공을 세우고 돌아가는 것은

손바닥을 마주치는 일보다 오히려 쉬울 것 같소.

그런데 유독 나만 뒷전에 물러나 있다가 남이 세운 공을 가로채라니

어쩌면 10년이나 중신들의 상석에 나란히 앉았던 장군이 이토록 나를 모욕할 수 있소?

과연 이런 대욕을 겪고도 살아란 말씀이오?

차라리 나는 이 자리에서 칼을 물고 자결하는 편이 훨씬 낫겠소!”

격분한 의직은 말을 마치자 실제로 칼끝을 입 속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은상이 황급히 그런 의직을 만류했다.

“아, 알았소! 알았으니 그만두시오!

공을 위하자고 한 일이 도리어 그처럼 모욕이 되었다니 내 생각이 모자랐던 듯하오.”

그리고 나서 은상은 의직에게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이번에 김유신이 나오면 그를 석토성 앞이나 도살성 밑으로 유인해 죽일 작정이오.

김유신의 목을 베는 일은 반드시 공에게 맡길 테니 화를 참고 기다려보시오.

나 역시 정복의 말이 귀에 거슬렸던 사람이외다.

내가 왜 정복에게 1천 군사만 내어줬는지 공이 정녕 모르신단 말이오?”

화적패인 길지의 아들로 병관좌평에까지 오른 은상은 뜻밖에도

팔성 귀족 출신의 의직과 사이가 각별했다.

의직은 사석에서도 은상의 무예를 늘 칭찬하여,

“내가 칼로 당하지 못할 인물은 병관좌평밖에 없다.”

하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그 덕택으로 팔족들 사이에서도 은상의 신망이 비교적 두터웠다.

은상의 속뜻을 알고 난 의직은 비로소 뽑아 들었던 칼을 도로 칼집에 넣고

입맛을 다시며 분통을 누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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