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도살성 7
“원로에 고생이 심하셨지요? 소인이 지난 며칠간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릅니다요.”
“장군께 얘기를 들었네. 해역에서 봉변당할 것을 자네가 미리 아셨던가?”
춘추가 제 옆자리를 소천에게 내어주며 물었다. 소천이 묻는 말에 답은 아니하고,
“좋은 일에는 항상 마(魔)가 끼는 법이지요.
나리께서 무사히 돌아오신 것을 뵈니 이제야 두 다리를 뻗고 편히 잠을 잘 수 있겠습니다.”
하며 춘추가 내어준 자리에 앉았다.
유신이 춘추로부터 들은 얘기를 간략히 전한 뒤에,
“이제 남은 일은 군기를 약정하고 군사를 내는 것뿐이야.
길일 잡는 거야 본래 자네 소관이니 어디 한번 날짜를 짚어보게나.
내년 3월이 어떨까 싶네만.”
하자 소천이 별안간 춘추 앞에 놓인 술잔을 끌어다가 홀짝 비운 뒤에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인이 아비한테서 천문을 배워 보기 시작한 후로 대사를 점치면 열에 다섯이 맞고 다섯은 틀렸습니다. 그러니까 소인의 말은 절반만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소천은 우선 그렇게 전제한 뒤 얘기를 시작했다.
“지금 천문에 나타난 바로는 백제보다도 더 급속히 빛을 잃어가는 곳이 당나랍니다.
얼마 전부터 새벽녘만 되면 서북방에 흰 별이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가
그 가운데 제일 큰 별이 갑자기 빛을 잃고 숨어버리곤 하는데,
이는 당주의 운세가 다해가는 조짐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서쪽의 성운은 비록 세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아직도 그 빛은 구름을 뚫고 내려와 땅에 그림자를 만들 정돕니다.
내년 3월의 일을 미리 장담할 수는 없으나
천문의 어디에도 아직 대전(大戰)의 조짐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면 혹시 당주의 천수가 끝난다는 말인가?”
유신이 묻자 소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변란이 일어날 수도 있고 수명을 다할 수도 있는데
지금 당의 성성한 국세를 보면 그 화가 당주 한 사람의 신상에 국한된 것이지
당나라 전체의 변란은 아닌 듯합니다.”
“이상하네. 당주의 건강이 비록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그처럼 급하게 잘못되다니,
혹시 그러다가 기운이 되살아날 수도 있는가?”
춘추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묻자 소천이 대뜸 큰 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천지간의 조화란 너무도 오묘해서 완전히 빛을 잃고 사라졌던 별도 며칠 만에 나타나
주변의 어떤 별보다 밝게 빛나는 수도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얼마 전에 바로 나리께서 그러셨습니다.”
하지만 한창 들떠 있던 사랑채의 분위기는 앞날을 예언하는
소천의 말 때문에 돌연 침통하게 변해버렸다.
“당주가 살았을 때 군사를 내어야 일이 수월한데……”
춘추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후위를 이을 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유신이 묻자 춘추는 난색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태자는 이치(李治)라고 하는 당주의 아홉번째 아들입니다.
태자로 있던 승건(承乾)이 다섯 해 전에 폐위되고 나서 진왕으로 있던 이치가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나이도 아직 어리지만 그 아버지와는 한입으로 말할 수 없는 자입니다.
하긴 당조를 통틀어 누가 지금의 당주와 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당주는 가히 불세출의 영걸입니다.
치밀하면서도 대범하고, 강함과 유함을 두루 갖춘 인물로
그를 능가할 이가 당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당주가 살았을 때 군사를 내지 않는다면 만사는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큽니다.
게다가 이치와 같은 어린애가 보위에 오른다면 설령 동맹군을 내더라도
조정의 탐욕스러운 장수와 신하들에게 휘둘릴 게 뻔하므로
백제 땅을 우리한테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아, 당주가 죽는다면 실로 큰일입니다!
백제는 물론 평양 이남의 땅까지 우리에게 주기로 한 당주의 맹세는
모조리 허무한 약속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낙담하여 어쩔 줄을 몰라하는 춘추에게 유신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직 당주가 죽은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서 소인이 명백히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요?
열에 다섯은 빈틈없는 헛소리라구요.
그저 절반만 믿으십시오, 나리!”
말을 꺼낸 소천도 민망한 얼굴로 덧붙였다.
하지만 소천의 말은 그로부터 두어 달 뒤 현실로 나타날 기미를 보였다.
신라에서는 춘추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년(649년) 정월부터 중국의 의관을 썼다.
두말할 것도 없이 당나라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군량을 비축하고 병장기를 끌어모으느라 한창 여념이 없을 때
돌연 당나라에서 한질허가 귀국해 이세민이 위독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전쟁 준비에 몰두하던 신라 조정은 크게 당황했다.
춘추는 곧 한질허와 같이 허겁지겁 당나라로 달려갔다.
이세민의 나이 겨우 쉰 살. 아직 죽음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구려 친정(親征)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후 그는 자주 병상 신세를 졌고,
안질과 내종(內腫), 한질(寒疾) 따위로 고생이 심했다.
그는 병상에 누워서도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내가 지금 죽으면 세상 사람들은 요동에서 패한 일을 거론할 것이다.
그것은 나한테도 지우지 못할 치욕이지만 그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태자의 일이다.
만일 내가 요동에서 패한 까닭에 죽었다면 태자는 천하의 비웃음을 의식해
반드시 이를 보복하려 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라는 다시 전란에 휩싸일 것이다.
태자를 위해서도 나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이세민은 병상을 찾아온 춘추에게도 그와 비슷한 소회를 털어놓았다.
“고구려를 치고 연개소문을 사로잡는 것은 반드시 내가 해야 할 일이오.
아우님과 더불어 맹세한 대사를 남겨두고 나는 결코 눈을 감을 수 없소.
일어날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 법이오.”
하지만 결연한 의지와는 달리 병태는 점점 위중해졌다.
3월이 되자 이세민은 병문안도 받지 못할 만큼 상태가 나빠졌다.
결국 그는 온몸에 가득히 퍼져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일을 마치지도 못하고 먼저 가서 미안하오.”
춘추를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이세민은 병상에서 사색이 완연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춘추는 백골처럼 앙상하게 변한 이세민의 손을 맞잡으며 통한의 눈물을 뿌렸다.
지난번처럼 어서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말은 이제 무의미했다.
생사가 갈리는 판에 이승의 일을 더 말해 무엇하랴.
춘추는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부디 마음을 편히 가지시라는 당부로 하직 인사를 대신했다.
국경을 넘나들며 맺은 양인의 특별한 30년 인연은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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