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도살성 8
얼마 뒤인 기유년(649년) 4월,
이세민은 당조의 중신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황궁의 내전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24년에 걸친 화려한 ‘정관의 치세(貞觀之治)’도 막을 내렸다.
태종문무대성황제(太宗文武大聖皇帝), 흔히 당태종으로 불리는 이세민.
그는 비록 형제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위압해 제위에 오른 원죄는 있었지만
중국이 자랑하는 역대 군주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후세의 사가들이 묘사한 태종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그는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발해 어진 군주가 되려고 노력했고,
간언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바로잡으려 했으며,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을 아꼈고, 형법을 신중하게 사용해 법제를 보존시켰다.
또한 문화를 중시해 풍속을 아름답게 가꾸고, 백성들이 농사철을 놓치지 않게 했으며,
군주와 신하가 서로 거울이 되어 시종여일 선행과 선정을 베풀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그 스스로 매우 근면하고 검소했다.
그래서 그가 집권한 시기에는 경제, 문화, 군사, 예술, 학문 등 다방면에 실로 위대한 발전이 있었고,
중국은 유사 이래 가장 찬란한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특히 태종 대에 당나라 군대는 남쪽으로 북부 베트남까지 영토를 확장시켰고,
중앙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으며, 파미르 고원 서쪽에까지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그가 욕심을 부렸다가 취하지 못한 곳은 오직 고구려밖에 없었다.
이세민이 다스렸던 당대(唐代)는 한반도와 일본, 베트남, 페르시아와 서아시아인들까지
천하 도처에서 몰려드는 모든 이방인들이 한결같이 환영과 환대를 받던 개방사회이자 열린 시대였고,
수도 장안은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교역 장소였다.
당태종의 언행과 사상을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는 당시의 사회상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관리들은 대부분 스스로 청렴한 생활을 하며 근신했다.
왕공이나 후비, 공주의 집안, 세도가나 간사한 무리를 엄격히 통제했다.
이들은 국법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일반 백성들을 침범하거나 억누르지 못했다.
상인이나 여행객이 벽지에 투숙하더라도 강도를 만나지 않았고,
천하가 잘 다스려졌기 때문에 감옥은 항상 비어 있었다.
말과 소는 산과 들에 자유롭게 방목하고,
외출할 때는 몇 개월씩 문을 잠그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해마다 농사가 풍작이었으므로 쌀 한 말이 3, 4전에 불과했으며,
나그네는 장안에서 영남까지, 산동에서 동해까지
모두 입을 것과 먹을 것을 길에서 공급받을 수 있었다.
산동마을로 들어서면 더욱 후한 대접을 받았으며,
떠날 때는 길에서 필요한 것들을 다 주었다.
이러한 다스림은 모두 옛날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관 후기의 상황은 이전 시기보다 못했고,
태종 본인 또한 사치와 방만함을 처음같이 경계하지 않았다.
좋은 후계자를 두지 못한 것도 당조의 황금시대가 정관의 치세로 끝나버린 큰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만년에 수많은 충신들의 간언을 뿌리치고 직접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한 것은
그가 죽은 뒤 정권의 기반이 심하게 흔들리고 급기야 이치의 후비인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실권을 장악하는 빌미가 되었다.
태종 이세민은 죽음이 목전에 닥쳤을 때 태자 이치와 조정 중신들을 불러들이고
요동의 전역(戰役)만은 파하라는 유조(遺詔)를 남겼다.
“요동으로는 가지 마라. 알겠느냐?
어떤 일이 있어도 요동에서 다시 전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반드시 내 말을 명심하라.”
이세민은 꺼져가는 숨결을 가쁘게 몰아쉬며 몇 차례나 힘주어 강조했다.
그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이 이룰 수 없음은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았다.
이치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을 받들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9장 도살성 10 (0) | 2014.11.13 |
---|---|
제29장 도살성 9 (0) | 2014.11.13 |
제29장 도살성 7 (0) | 2014.11.13 |
제29장 도살성 6 (0) | 2014.11.12 |
제29장 도살성 5 (0) | 2014.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