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도살성 5
대야주의 한 야산에는 성이 함락될 때 죽은 많은 신라인의 뼈가 몇 개의 무덤에 나뉘어 묻혀 있었다.
백제인들은 그곳을 신라총(新羅塚)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품석 내외만은 따로 무덤이 있었다.
처음 윤충이 이들의 목을 잘라 보낸 뒤 대야성 관사에선 밤마다 소름끼치는 곡소리가 나고
성을 지키는 순라병들 사이에선 어스름 달빛에 목 없는 귀신을 보았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이에 늙은 군인 한 사람이 짚으로 품석 내외의 머리를 만들어 묘제를 지낸 뒤에야 흉문이 가라앉았는데, 그 뒤로 윤충이 귀신의 앙갚음을 걱정해 별도로 무덤을 만들고 비석까지 세워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윤충은 품석 부처의 목 없는 유골을 목관(木棺) 속에 넣어 김유신에게 보냈다.
그러자 김유신은 백제 장수 여덟 명을 약속대로 살려 보내려고 했다.
김문영이 이를 의아해하며 물었다.
“적장을 살려보내면 이들은 다시 창칼을 들고 우리를 해칠 것입니다.
하나라도 더 죽여 없애는 것이 우리 군사와 백성들의 목숨을 하나라도 더 구하는 길이 아닙니까?”
문영의 질문에 김유신은 웃으며 대답했다.
“무성한 숲에 나뭇잎 한두 개가 떨어진들 무슨 손실이 있을 것이며,
큰 산에 티끌 하나를 더한들 무슨 보탬이 될 것인가? 문영은 너무 개의치 말라.”
하지만 이것은 김유신의 또 다른 계략이었다.
그는 지수영을 비롯한 백제 장수 여덟 명을 살려보낸 뒤
즉시 군사들을 이끌고 백제 경내로 쳐들어갔다.
이번에 그가 노린 곳은 거타주 북변, 남악과 인접한 악성(嶽城)이었다.
윤충은 살아 돌아온 장수들을 한창 꾸짖고 있다가 악성에 김유신이 나타났다는 급보를 받았다.
장수들까지 돌려보낸 마당이라 다시 침략을 해오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윤충이었다.
윤충은 문죄하던 장수들을 이끌고 시급히 악성 구원에 나섰지만 승패는 진작에 갈린 싸움이었다.
그러잖아도 김유신이라면 얼굴에 핏기가 가실 판인데 볼모로 붙잡혔다가 가까스로 풀려나
심하게 꾸중까지 들은 윤충의 부장들로선 다시 창칼을 들고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거기 비하면 신라군의 달아오른 사기는 가히 용광로와 같았다.
몇 해 전에 죽은 관수 부처의 뼈까지 찾아오는 김유신에게 군사들은
또 한번 크게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 사람 하나의 목숨은 백제 사람 열 명의 목숨보다 귀하다는
평소 그의 주장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해골 값으로 여덟이나 되는 적장을 흔쾌히 살려 보내자
군사들은 저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싸움터가 아니면 느끼지 못할 감동이었고 생사를 초월한 신뢰였다.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김유신이 틀림없이 시신을 거두고 철저히 보복해줄 거라는
믿음이 생긴 군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웠다.
이들은 마치 아버지를 섬기는 자식들처럼 김유신을 믿고 의지하며 군령을 따랐다.
사기가 꺾인 윤충의 군사들이 맞서는 곳마다 크게 무너진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었다.
김유신의 신라군은 악성 주변의 12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장장 2만 명의 백제군을 잡아죽였다.
게다가 생포한 적군의 숫자도 무려 9천여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악성을 취하고 유례 없는 전과를 얻은 다음에도 김유신은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압량주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금 진례(進禮) 등 9성을 쳐서
9천 명을 참획하고 6백 명을 사로잡았다.
세 번에 걸쳐 남악 근방의 백제군과 벌인 싸움에서 김유신에게 목숨을 잃은 백제 군사는
도합 3만여 명, 잃어버린 성곽은 무려 스물하나나 되었고, 포로로 붙잡힌 사람도 1만에 달했다.
전군을 모두 합해봐야 20만을 조금 웃돌 정도이니 백제로선 근년에 보기 힘든
엄청난 대병의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기험한 남악을 중심으로 비교적 일사불란하던 국경이 북쪽과 동쪽의 광활한 땅을 잃고
그야말로 개 이빨처럼 들쭉날쭉한 형태가 되니 양국의 정세는 당장 조석의 일을 장담할 수 없는
어지러운 혼전의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승만 여주는 군신들과 의논 끝에 대공을 세운 김유신에게 이찬 벼슬을 내리고
상주(上州:지금의 尙州)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본격적인 백제 공략에 나섰다.
오랫동안 수세에 몰렸던 신라로선 김유신에게 백제 정벌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귀로에 죽을 고비를 겪은 김춘추가 압량주 관사에 당도했을 때는 바로 이럴 무렵이었다.
내지에 도착해 거기까지 오는 동안 이미 전국에 떠들썩하게 나돌던 소문을 들은 춘추는
유신을 보자 눈물까지 글썽이며 반가워했다.
무사히 돌아온 춘추를 보고 기뻐하기는 김유신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흡사 오래 헤어졌던 정인(情人)들처럼 다정한 눈길로 두 손을 맞잡은 채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배에서 내려 이곳에 이르는 동안 만나는 이마다 형님이 세운 무공을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백제와 세 번이나 크게 싸워 20여 성을 빼앗고 3만이나 되는 대군의 목을 베셨다구요?
춘추는 눈이 부셔서 형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죽은 큰아이의 유골까지 찾아주셨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춘추는 특히 고타소의 일로 크게 감격했다.
아끼던 딸의 몸 없는 시신을 땅에 묻은 그였다.
요즘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부들부들 치가 떨려 달에 한두 번은 밤잠을 설치곤 하던 그에게
유골이나마 온전하게 수습할 수 있다는 건 마음을 짓눌러온 큰 짐 하나를 덜어내는 일이었다.
“은혜라니 당치 않습니다.
모두가 하늘이 우리 신라를 도운 때문이지 어찌 저의 공이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원로에 역경을 만나지는 않았습니까?
소천이가 며칠간 몹시 걱정을 하던데…… 안색이 과히 좋아 뵈지 않습니다.”
유신이 묻자 춘추는 귀국길에 고구려 군사들에게 당한 봉변을 간략히 설명했다.
유신은 크게 놀라며 새삼스러운 눈길로 춘추를 살폈다.
“괜찮습니까?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생사는 천명에 달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 돌아와 형님의 존안을 다시 뵈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를 대신해 죽은 온군해의 일로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두 사람은 한껏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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