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도살성 3
싸움에 도취한 백제군들이 신라군을 추격할 태세를 취하자
윤충은 급히 성루에서 징을 쳐 군사들을 불러들였다.
“그것 봐라. 이건 틀림없이 김유신이 짜놓은 계략이다!
그렇지 않고야 저토록 쉽게 도망갈 리가 있겠느냐?”
윤충은 씩씩거리며 성으로 돌아온 지수영과 사마걸을 보고 말했다.
그러자 지수영이 잔뜩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장군이 보시기에 김유신이 쉽게 도망갔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우리 군사들의 용맹함을 당하지 못해 패주한 것이오! 그렇지 않소, 사마 장군?”
“그렇습니다. 김유신은 힘과 숫자가 모자라 도망간 것이지 일부러 달아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마걸도 지수영의 말에 동조했다.
사마걸까지 자신의 편을 들자 지수영은 신이 나서 지껄였다.
“도대체 대장군께서는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씀이오?
설사 저들이 잔꾀를 부리는 거라고 쳐도 그렇지요.
기껏해야 여기 나타난 적군이 5천 명이었소.
그런데 3만 5천이나 되는 대군을 가지고도 김유신이란 이름 석 자에 벌벌 떨고 있으니
보기가 민망합니다.
잔꾀나 술수도 양측 군사가 엇비슷한 호각세에나 통하는 것이지
예닐곱 갑절이 넘는 군사를 가지고 뒷일을 겁내다니 한심스럽소.”
윤충은 지수영의 방자한 소리에 왈칵 울화가 치밀었다.
“말을 삼가라! 네 감히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느냐?
튀어나오는 대로 지껄이다가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우선 호통을 쳐서 지수영을 제압하긴 했지만 윤충은 께름칙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과연 3만 5천이나 되는 군사를 가지고도 김유신 하나를 겁낸다는 게 당대 최고 장수라고 자부해온
그에겐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이튿날이 되자 김유신은 또다시 전날만큼 되는 군사를 이끌고 나와 대야성 앞에서 약을 올려댔다.
“비겁자 윤충은 들어라!
너는 옛날 가혜나루에서 죽을 뻔한 것을 살려보냈더니
이젠 은혜도 모르고 군사를 내어 대적하려 드는구나!
우리 군사 중에는 비록 너 같은 허깨비의 위세를 보고 달아난 이가 없지는 않으나
여기 나온 맹졸들은 하나같이 너의 정체를 잘 아는 일기당천의 용사들이다.
곧 원군이 당도하면 어찌 너를 다시 살려주겠느냐?”
윤충의 안색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할 때 지수영이 말했다.
“그것 보십시오.
여기 왔던 놈들은 모두 달아나고 남은 것은 저것들뿐입니다.
김유신은 원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틀림없으니
어서 벼락같이 급습해 죽여버리는 게 상책입니다!”
사마걸을 비롯한 휘하의 장수들도 출정을 권하긴 지수영과 마찬가지였다.
“좌평 의직마저 김유신에게 번번이 당했으니
이럴 때 장군이 김유신을 죽여 공을 세운다면 얼마나 빛이 나겠습니까?
더 이상 주저할 일이 아닙니다!”
사태를 관망하던 윤충은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좋다.”
그는 휘하의 장수들을 모두 불러 군령을 내렸다.
“너희는 각기 군사 1천씩을 이끌고 달려나가 김유신을 상대하되 만일 그가 달아나면
끝까지 추격해 반드시 목을 가져와야 한다!
김유신의 목을 취하는 사람에겐 따로 포상할 것이고,
임금께 말해 평생을 걱정 없이 지낼 만한 벼슬과 재물도 내릴 것이다.
장수들은 열 길로 추격병을 만들고 공을 다투되 복병을 만나더라도 결코 당황하지 말라.
복병이라고 해봐야 전부 5천을 넘지 않을 것이다!”
윤충은 휘하의 장수 10명에게 1천씩 군사를 내어주고 일시에 적을 뒤쫓아
참살할 것을 명한 뒤 특별히 지수영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가 김유신의 목을 자루에 넣어 왔으면 한다.
설마 그렇게 큰소리를 탕탕 치고 나갔다가 쫓겨서 돌아오지는 않겠지?”
그러자 지수영이 목청을 높여 웃었다.
“만일 쫓겨서 오거든 장군이 내 목을 치시오.
그 대신 내가 김유신의 목을 자루에 넣어 오면 장군은 무슨 약속을 하시겠소?”
“대왕께 받은 말 20필을 모두 주마.”
“나는 목을 걸었는데 말 20필은 약하오.
말은 주지 않아도 좋으니 대신 장군의 애첩인 두리(斗利)를 내게 주시오.”
순간 윤충은 와락 노여움이 치솟았다.
두리는 윤충이 남악에 와서 얻은 산골 처녀였는데,
인물이 곱고 특히 살결이 백옥 같아서 보는 사람마다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윤충은 이내 노기를 누그러뜨리고 웃으며 말했다.
“알았다. 그리하마!”
이리하여 지수영을 비롯한 백제 장수 10명이 각기 1천씩의 군사를 이끌고 성문으로 달려나갔다.
혼비백산한 김유신은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게 섰거라! 서지 못하겠느냐?”
“비겁하게 달아나지 말라! 나불거리던 주둥아리는 어디로 갔느냐?”
백제 장수들은 저마다 공을 다투며 눈에 불을 켜고 김유신을 뒤쫓았다.
유신은 미리 계획한 대로 이들을 모두 옥문곡으로 유인했다.
윤충의 군사들에게 옥문곡의 지형은 매우 낯설었다.
그들은 어디가 어딘지도 알지 못한 채 오로지 김유신을 추격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달아나는 군사와 추격병들의 거리가 차츰 좁혀지는가 싶을 때였다.
평지를 돌아 으슥한 산길로 접어든 백제군의 시야에서 갑자기 믿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도주하던 신라군들이 감쪽같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어서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 어느 순간부터 휘하의 마군들만을 추려 김유신을 뒤쫓던
백제 장수들은 급히 말머리를 잡아채고 사방을 어지럽게 두리번거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김유신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보다 열심히 김유신을 쫓아온 지수영이 부하들에게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언뜻 기이하게 생긴 계곡과 계곡 양옆의 무성한 숲뿐이었다.
그러구러 사마걸을 비롯한 동료 장수들도 차례로 나타나 지수영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소?”
“글쎄올시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홀연 종적이 묘연해졌소.”
이들이 추격하던 대상을 잃어버리고 계곡 근처에서 우왕좌왕할 때였다.
“백제군은 들으라! 이곳은 의직의 군사가 이미 참패한 곳이다!
어찌 한 놈인들 살려보낼 수가 있겠는가!”
계곡 양옆의 무성한 숲에서 돌연 한 장수가 나타나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압량주의 5만 용사가 이곳에서 무덤을 파고 너희를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양편 숲에서 구름같이 궁수들이 일어나 화살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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