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도살성 4
백제군들은 꿈에도 예측하지 못한 돌발상황 앞에서 크게 당황했다.
5만이라는 소리가 차마 믿어지지 않았지만 한가롭게 복병의 숫자나 헤아릴 형편이 아니었다.
5천이든 5만이든 엄청난 숫자이긴 마찬가지였고,
당장은 사방에서 우박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꼼짝없이 계곡에 갇혀버린 그들로선 시시각각 매서운 풍뢰소리를 내며 날아드는
수천 개의 화살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
화살은 사람과 말을 가리지 않았다.
열에 아홉은, 사람이 쓰러지고 말들이 길길이 날뛰는 아수라장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말이 놀란 싸움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이 마군들이었다.
기세 좋게 쫓아왔던 백제 장수들은 부하들을 돌볼 겨를도 없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만 급급했다. 단신으로 아수라장을 탈출한 몇몇 장수들이 가까스로 부상한 말을 달래어 왔던 길로 되돌아 나오려고
할 때였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 어디로 달아나느냐?”
별로 크지 않은 호통소리와 함께 그들의 앞을 막아선 이는 다름 아닌 김유신이었다.
가슴까지 늘어뜨린 긴 수염에 보검 한 자루를 든 채 백설총이를 타고 앉은
김유신의 늠름한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김유신이 점잖게 말하자 지수영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닥쳐라! 장수가 어찌 손에서 칼을 놓고 목숨을 구걸하겠는가!”
그는 제법 호기롭게 칼날을 세워 달려들었으나 김유신은 슬쩍 몸을 피했다가
지수영의 뒷덜미를 답삭 낚아채어 말 아래 떨어뜨렸다.
“기백은 가상하다만 지혜롭게 판단하라.
사태를 보아 진퇴와 생사를 가늠할 줄 아는 것도 장수의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다.”
무기마저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지수영으로선 더 이상 대적을 하려야 할 방도가 없었다.
누구보다 큰소리를 치고 나온 지수영이 기운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당하는 것을 본
다른 장수들은 순간 한결같이 전의를 상실했다.
조금만 더 달아나면 후군의 세력을 얻을 수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유신에게 사로잡힌 백제 장수는 모두 여덟 명이었고,
옥문곡에서 전사한 백제군은 1천 명쯤 되었다.
마군을 이끌고 간 장수들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자
뒤에서 기다리던 보군들은 모두 대야성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김유신은 곧 대야성으로 사람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날 우리 군주 김품석과 그 아내의 유골이 지금 그대 나라 옥중에 묻혀 있다.
그런데 그대의 비장 여덟 명이 내게 사로잡혀 무릎을 꿇고 살려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여우도 죽을 때는 옛날 살던 곳으로 머리를 향한다고 하니
내가 차마 이들을 죽이지 못하고 있거니와, 앞서 말한 두 내외의 뼈를 우리에게 보내고
산 사람 여덟과 바꿔 가는 것은 어떠한가?”
윤충은 김유신의 뜻을 전해 듣자 자신이 함부로 처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즉각 대궐로 사람을 파견해 임금의 품의를 구했다.
“또 김유신인가!”
의자왕은 마침 어전 조례에서 이 말을 듣고 몹시 안색을 붉혔다.
“도대체 이놈을 잡아죽이지 않고는 내가 하루도 편할 날이 없겠구나!”
“이는 틀림없이 우리를 희롱하려는 김유신의 교활한 술책입니다.
오래전에 죽은 망자의 뼈를 가져가고 여덟 명이나 되는 장수를 돌려보낼 턱이 없습니다.”
김유신과 싸워본 좌평 의직이 목청을 높여 말했다.
“김유신은 속임수에 능하고 잔꾀가 많은 자입니다.
우리가 유골을 보내면 그 역시 우리 장수 여덟을 죽여 시신으로 돌려보낼 공산이 큽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옵니다.”
은상도 의직의 뜻에 동조했다.
그러자 성충이 나섰다.
“그렇지 않습니다.
뼈를 돌려보내면 우리 장수들은 무사히 돌아올 것입니다.”
임금은 성충이 확신에 차서 말하자 그 까닭을 물었다.
성충이 공손히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김유신이 지금 요구하는 것은 실로 치밀한 계략에서 나온 제안입니다.
그는 오래전에 죽은 신라 군주의 뼈와 우리 장수 여덟을 교환해 세 가지 이득을 보려는 것입니다.
첫째, 신라 군주의 뼈가 우리나라의 살아 있는 장수 여덟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신라인의 민심을 위로하고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한 책략입니다.
둘째로 살아 있는 적장을 돌려보냄으로써 천하의 의로움과 정당함이 신라에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약간 사적인 일입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전날 죽은 대야성 성주의 처는 김춘추의 딸입니다.
그런데 김유신은 김춘추와 처남매부간이요,
다른 한편으론 옹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김춘추와 관계를 세상에 과시하려는 뜻도 포함돼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성충의 예리한 지적에 의자왕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실로 양난 곡경이 아닌가?
그의 속셈을 안 이상 선뜻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여덟이나 되는 우리 장수들의 목숨이 그까짓 유골만도 못하다는 셈이니
당장 우리 군사의 사기가 떨어지고 조정에 비난이 쏟아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구나.
상좌평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임금이 묻자 성충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김유신이 그와 같은 제의를 하는 순간 이미 그가 얻을 것은 다 얻은 셈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장수 여덟 명의 목숨입니다.
마땅히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의 좌평 충상(忠常)이 나서서 양론을 중재했다.
“신라인의 해골을 묻어두어서 아무 이득이 없으니
상좌평의 말대로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만약 김유신이 신의를 지키지 않고 우리 장수들을 살려 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은 저쪽에 있고 의로움과 정당함은 우리에게 있으니 무엇을 더 근심하겠나이까?”
의자왕은 충상의 간언을 받아들여 윤충이 보낸 사자에게 김품석 내외의 유골을 찾아
김유신에게 보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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