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도살성 2
대야벌에서는 곧 양측 군사들 간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김유신은 백제군의 저항이 만만찮은 것을 보고 대야성을 수복하기엔 역부족임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군은 대야성을 남역 평정의 교두보로 확보한 뒤 전날 남악에 설치한
군사와 기계를 거의 대야주로 옮겨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항차 김유신이 대야성과 남악을 노린다는 점을 안 뒤로는 백제 남역의 전군이 대야주에
새롭게 보강되어 있었다.
그 바람에 대야성을 칠 때만 해도 1만에 불과하던 윤충의 군사가 해마다 늘어나서
이때는 무려 7, 8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교전이 시작되고 하루가 지나자 남악 본진에 주둔하던 윤충이 친히 3만이나 되는 원군을 이끌고
대야성에 당도했다.
백제 진영에서 울리는 북소리는 가히 천하를 집어삼킬 만큼 우렁찼다.
제아무리 싸움은 숫자로 하는 법이 아니라고 큰소리를 치고 나온 김유신이었지만
기껏 5천의 향군들로 예닐곱 갑절이나 되는 적군을 상대하기엔 벅찰 수밖에 없었다.
윤충의 원군이 당도한 그날 밤, 유신은 가만히 김문영을 불렀다.
“윤충이 대병을 이끌고 나타났으니 천만다행이다.
너는 오늘밤에 마군 1백여 기만 남겨놓고 나머지 군사를 모두 데리고
전날 의직의 군사를 잡아죽인 옥문곡의 매복지로 가라.
그곳에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렸다가 내가 윤충을 유인해 데려가면 한 놈도 남김없이 모두 주살하라.”
신라에는 지세가 여인의 음부를 닮은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 가운데 죽은 선덕여왕이 우소(于召)의 군사를 주살한 곳은 부산 골짜기의 여근곡이었고,
의직의 군사를 물리친 곳은 옥문곡이었다.
두 곳 모두 기묘하게 흘러내린 계곡 양옆으로 무성한 수풀이 자리잡고 있어서 군사를 숨기고
매복책을 쓰기엔 가히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튿날 김유신은 군사를 내지 않고 하루해를 그냥 보냈다.
적은 숫자였으나 제법 기세 좋게 달려들던 신라군이 갑자기 아무 기척이 없자
윤충은 몇 번이나 성루에 올라 신라군의 동태를 관찰했다.
그러나 어제까지만 해도 왁자지껄하던 신라군 진영에선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구나. 정말 김유신이 왔더냐?”
윤충이 궁금해하며 지수영에게 물었다.
“틀림없이 김유신이라고 적힌 대장기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물러갈 리가 없는데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알 수가 없구나.”
윤충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지수영이 웃으며 말했다.
“저들의 숫자가 기껏해야 5천 명쯤 되지 싶었습니다.
제아무리 김유신이라도 장군이 3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나타났는데
무슨 수로 싸울 엄두가 나겠습니까?
우리 군사의 위세만 보고도 기가 질려 달아난 게 틀림없습니다.”
지수영의 말에도 일리가 없지는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김유신을 죽여 후환을 없애겠다고 잔뜩 벼르고 왔던 윤충으로선
일순 맥이 풀리고 허탈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렇다면 내가 너무 많은 군사를 데리고 왔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혼자 올 것을 그랬다.”
하루가 조용히 지나간 뒤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여전히 신라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윤충은 자신이 데려온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남악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했다.
점심밥을 지어 먹고 막 채비를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사비의 철부지 어린아이는 들으라!
신라 장군 김유신이 대야성을 찾으러 왔다!
어서 성문을 열고 영접하지 않는다면 모조리 잡아죽일 것이니 기회를 놓쳐 후회하지 말라!”
성문 밖에서 내지르는 고함소리에 놀라 보니 한 장수가 새하얀 말 한 마리에 올라앉아
제법 호기를 부리는데 뒤에는 고작 1백 명도 안 돼 보이는 군사가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윤충이 보니 과연 전에 만났던 김유신이었다.
그는 너무도 기가 막혀 한참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망설이고 계십니까? 제가 나가서 저놈의 목을 따오겠습니다!”
지수영이 칼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가만 좀 있어봐라.
김유신이 무슨 계책을 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자 지수영은 딱하다는 얼굴로 윤충을 바라보았다.
“허허벌판에서 창칼로 싸우는 마당인데 무슨 계책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의심하는 윤충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적군은 우리 대병을 보고 저희들끼리 싸운 게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달아날 놈들은 모두 뿔뿔이 달아나고 남은 것이 고작 저것들입니다.
저 혼자 나가도 저쯤은 능히 무찌를 수 있으니
장군께서는 성루에 편한 자리를 만들고 구경이나 하십시오.”
지수영의 3형제는 모두 무예가 뛰어났다.
그는 가지내현(은진)에서 오랫동안 관수를 지낸 시덕의 둘째아들이었는데,
가지내현 사람들은 관수가 불사를 깊이 봉양하여 슬하에 덕장(德將)과 용장(勇將)과 지장(智將)을
고루 두었다며 부러워하곤 했다.
덕장은 지수영의 형인 지수은(遲受恩)을, 지장은 막내인 지수신(遲受信)을 가리키는 말로,
지수은은 사비 도성을 지키는 방군의 장수로 있었고, 막내 지수신은 아직 나이가 어려
고향에서 아버지의 관수 일을 돕고 있었다.
3형제 가운데 용맹스럽기는 단연 지수영이었다.
윤충도 지수영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더는 만류할 생각이 없어졌다.
“나가서 싸우되 만일 도망가는 기색이 보이거든 뒤쫓지 말라.
너는 김유신을 모르지만 나는 안다.
저 자의 꾐에 빠지면 비록 살아나더라도 개망신을 당하기 십상이다.”
윤충으로부터 주의를 받은 지수영은 내심 코방귀를 뀌며 말을 달려 나갔다.
“그놈의 주둥이를 닥치지 못하겠느냐?”
지수영이 대갈일성 고함을 지르며 성문 앞에서 김유신과 칼로 맞섰다.
이어 두 사람은 제법 화려한 검술을 선보이며 말머리를 어울러 10여 합을 싸웠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뒤에서 구경하던 신라군들이 일제히 달려나와 지수영을 공격했다.
이를 본 윤충도 군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사태를 좀더 관망하기 위해 남악에서 데려온 비장 사마걸(斯摩杰)을 불렀다.
“너는 어서 정병들을 데려가서 지수영을 도와라.”
하지만 윤충은 사마걸에게도 지수영에게 했던 당부를 잊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달아나는 김유신을 쫓아가서는 안 된다. 명심하라!”
명을 받은 사마걸이 맹졸 3백여 명을 이끌고 달려나가자
양측 군사들 간에 모처럼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윤충의 예상대로 김유신은 얼마 안 있어 곧 휘하의 군사들을 데리고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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