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도살성 1
죽을 고비가 끝나는 곳에 기뻐할 일이 있다고 했던가.
온군해의 대신 죽음으로 겨우 화를 모면한 김춘추가 천신만고 끝에 압량주 관사에 당도했을 때
김유신은 또 한번 누구도 넘보지 못할 위국지공을 세우고 춘추에게 줄 귀한 선물까지 마련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앞서 당나라로 떠나는 춘추 부자와 중악 아래에서 헤어져 압량주로 돌아온 뒤 무슨 까닭에선지
날마다 술을 마시고 풍악을 울리며 한 달 가량이나 노는 일로 세월을 탕진했다.
명분이야 한 해 간격으로 나란히 세상을 버린 부모의 기년제(朞年祭)를 지낸다는 것이었지만
날짜도 맞지 않는 데다 슬퍼해야 마땅할 제사에 풍악까지 동원하니
아무리 이름난 장수일지언정 주민들의 입초시에 오르내릴 것은 당연지사였다.
유신의 속셈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일생을 따라다닌 소천조차도,
“그놈의 상수살이 고질병이 또 도진 모양일세.
저 병에는 어른들의 꾸짖음이 특효인데,
이제 양친마저 구몰하신 뒤라 약도 구할 수가 없으니 큰일났네.”
하며 흉보는 향군들 앞에서 혀를 차대곤 했다.
유신이 그렇게 해서 보고자 한 것은 압량주 주군(州軍)들의 진심이었다.
이들은 김유신이 압량주 군주로 부임한 뒤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독하기로 소문난 훈련도 훈련이지만 백제가 쳐들어오고 싸움만 벌어졌다 하면
제일 먼저 찾는 것이 김유신이요,
압량주 향군들이라 불만을 가지려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걸핏하면 전쟁터를 제 집처럼 드나드는 사람이 어찌 반드시 무사귀환만 할 것인가.
패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긴 싸움에서도 부상을 당하거나 죽어서 돌아온 자가 적지 않으니
당자보다는 그 식솔들이 나라에 장수는 김유신뿐이고 군사는 압량주 군사뿐이라며
자주 원망 섞인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군주가 너무 잘나서 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생겼다는 부녀자들의 쑥덕거림이 유신으로선
무심히 넘길 소리만은 아니었다.
여자들의 원성이 높아지면 결국은 그것이 민심이 되고,
민심이 떠나면 군사들의 사기도 꺾이게 마련이었다.
싸움은 전장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집안에서 시작되는 거라는 게 유신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달포 가량이나 연일 술을 마시고 풍악을 벗삼아 노는 일에만 열중하자
처음에는 좋아하던 군사들도 차츰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몇 해 동안 훈련장을 드나들며 거의 하루도 손에서 창칼을 놓아본 적이 없던 향군들은
어느 순간부터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하고 마음도 덩달아 조급해졌다.
싸움에 많이 동원됐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적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뜻이었다.
학문이든 기예든 무릇 사람이 힘써 닦아야 하는 것이 모두 그렇지만,
하루만 멀리하면 웬만큼 무술에 숙달된 자도 감각이 무뎌지고 손이 서툴게 마련이었다.
연일 훈련장을 드나들며 매섭게 단련한 몸으로도 싸움터에 나가면 참변을 당하는 예가 적잖은
판국인데 달포 가량이나 놀고 나니 제 칼을 잡아도 도무지 남의 칼만 같고,
그러구러 차츰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우리가 이렇게 놀아도 되나? 백제군이 쳐들어오면 누가 대신 막아주기라도 하느냐고?”
“막아주긴 누가 막아줘? 결국엔 김유신이고 우리 압량주 맹군들이지.”
“그렇다면 이거 야단나지 않았나?
이젠 말을 타도 내 말이 아닌 듯하고 창칼도 손 따로 마음 따롤세.”
“누군 안 그런가. 노는 것도 좋지만 이제쯤은 다시 훈련을 했으면 좋겠네.
이대로 전쟁에 나가면 개죽음을 면치 못할 걸세.”
향군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걱정스럽게 쑥덕거렸다.
집에서도 내외간에 더러 다음과 같은 소리가 오가곤 했다.
“오늘도 관사에서 잔치를 연대요.
어서 가서 실컷 얻어먹고 구경도 하고 옵시다.”
“당신이나 가게. 난 훈련장에 나가볼 참이야.”
“소집령도 없었는데 훈련장엔 왜 나가요? 그놈의 훈련 없으니 살 것 같은데.”
“이 사람아, 거 철없는 소리 좀 작작 해. 훈련을 어디 남 좋으라고 하나?
군주 하자는 대로 하다간 압량주 장정 다 죽게 생겼네.”
“그게 무슨 말씀이오?”
“군주가 논다고 백제가 안 쳐들어오나?”
“그러지야 않겠지요.”
“그럼 우리가 훈련 안했다고 나라에서 다른 군대를 내보내고 우리한테는 쉬라고 하겠나?”
“……글쎄요만 그럴 리도 없지 싶소.”
“그럼 훈련도 안하고 이대로 전쟁터에 나가는데 무슨 재주로 살아오겠나?”
“……듣고 보니 그렇소. 어서 훈련장에 나가우!”
달포 만에 압량주의 민심은 급격히 달라졌다.
고을 사람들은 급기야 김유신의 나태함을 꼬집으며 드러내놓고 비방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사람들이 편안히 있은 지 오래 되어 한번 싸워볼 만한 여력이 생겼는데
장군이 게으르니 어찌하면 좋은가!”
김유신은 주에 나도는 이 말을 듣자 드디어 때가 왔음을 알고 금성으로 가서 여주를 알현했다.
이번에 그가 노린 곳은 원한의 땅 대야주(大梁州:합천)였다.
“지금 압량주의 민심을 보니 큰일을 한번 낼 만합니다.
백제를 쳐서 대야주 전역에 보복하기를 청하오니 대왕께서는 윤허해주십시오.”
승만 여주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내 비록 장군의 재주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은 군사로써 대적을 상대하다가
위험한 일이라도 만난다면 어떻게 하겠소?”
그러자 유신은 두 번 절하고 대답했다.
“싸움터의 승부는 숫자가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군사들의 사기에 달렸습니다.
옛날 은(殷)나라 주왕(紂王:殷나라 마지막 임금)에게는 억조창생이 있었지만
인심과 덕을 잃었기 때문에 주(周)나라 열 사람의 난신이 뜻을 합친 것만 같지 못했습니다.
지금 신의 주병(州兵)들은 모두 한뜻이 되어 생사를 같이할 수 있으니
백제를 두려워할 까닭이 없나이다.”
임금의 윤허를 얻은 그는 곧 압량주로 돌아와 군사들을 훈련시켜 불시에 대야성을 공격했다.
김유신을 상대한 백제 장수는 윤충의 부장인 지수영(遲受泳)이었다.
그는 남악(지리산) 군영으로 사람을 보내 윤충에게 김유신의 침공 사실을 알린 다음
성군 5천 명을 이끌고 김유신을 맞아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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