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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장 전란 20

오늘의 쉼터 2014. 11. 11. 17:13

제28장 전란 20 

 

 

한편 김춘추는 그로부터 장안에서 보름여를 더 머물며 이세민과 함께 내년에 일으킬

동맹군의 세부 계획을 짰다.

장안에서 대병을 일으키는 시기는 내년 3월로 하고, 내주에서 5월에 배를 띄워 6월초

백제 해역에 당도한다는 게 양측의 계산이었다.

얘기가 깊이 논의되자 당나라에서는 장군 이적과 태자가 불려와 배석했고,

춘추는 한질허를 불러 동맹군의 전술을 협의했다. 모든 논의가 끝나 군기(軍期)까지 정해지자

춘추는 자신의 굳은 마음을 보여 상대를 안심시키고 또한 상대로 하여금 어떤 경우에도

변심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또 한번 신라 관인의 복장을 중국 제도에 따라 고칠 것을 청했다.

이세민은 크게 기뻐하며 자신이 가진 진귀한 의복들을 꺼내 김춘추와 한질허에게 주고,

조명(詔命)을 내려 춘추에게는 특진3)을, 춘추의 셋째아들 문왕에게는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의

높은 벼슬을 내려 자신의 곁에 머물도록 했다.

김춘추가 귀국하기 전날, 이세민은 조칙(詔勅)으로 3품 이상의 모든 관리가 참석하는

궁중 연회를 베풀어 또다시 춘추에 대한 우의를 과시했다.

춘추는 앞으로 동맹군이 움직이려면 수차례 사신이 오가고 의논할 일이 생길 것이므로

한질허에게도 장안에 머물 것을 지시한 뒤 혼자 귀국선에 올랐다.

“어서 오십시오, 나리. 장안에 가셨던 일은 잘되었습니까?”

두어 달 만에 보는 온군해가 한층 건강해진 모습으로 물었다.

“암, 잘되었네. 내가 수십 번 당나라를 들락거렸지만 이번처럼 좋은 때가 없었다네!

사람 셋을 떨궈놓고 가도 오히려 배가 더 묵직할 겔세!”

춘추는 그때까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춘추가 기뻐하는 것을 보자 온군해도 영문을 모른 채 함박웃음을 지었다.

“편안히 계십시오. 당항성까지는 소인이 안전하게 뫼시겠나이다.”

온군해는 해포에 흩어진 수부들을 소집해 배를 띄우고 쏜살같이 돛을 올려 심해로 나왔다.

하지만 무사히 당항성에 도착할 줄 알았던 이들이 뜻밖의 사태를 만난 것은

고구려 해역에 인접해 얼마만큼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이때 고구려의 해역 방비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삼엄했다.

당나라 장수 설만철과 배행방이 압록수를 거슬러 박작성을 어지럽힌 뒤로 내주 근처 오호도에

산더미 같은 병기구와 식량이 차곡차곡 쌓인다는 급보가 잇달아 장안성으로 전해지자

막리지 개소문은 수군을 갑절이나 보강하고 당조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런 개소문의 귀에 상인을 가장한 장안의 첩자들로부터 김춘추에 관한 소식이 들려왔다.

김춘추가 신라 사신으로 장안에 왔는데 황궁에서 연일 시끌벅적한 잔치가 벌어진다는 거였다.

뿐만 아니라 김춘추가 당조의 특진 벼슬을 받고 그 아들이 좌무위장군에 봉해져서

황제 곁에 숙위한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눈치 빠른 개소문이 이를 그냥 넘길 리 만무했다.

“무슨 모사를 꾸미고 있는지 모르지만 김춘추는 위험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다.”

개소문은 그렇게 단언하고 해역을 지키는 수군들에게 말했다.

“순라선과 전선을 띄워 신라사가 드나드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신라배가 나타나면

이를 샅샅이 조사하라. 그 배엔 틀림없이 김춘추가 타고 있을 것이니

그를 붙잡거든 몸은 바다에 버리고 목만 취하여 내게 가져오라.”

개소문의 명령이 떨어진 뒤로 서해 북쪽에선 날마다 순라선과 전선 수십 척이 번갈아

뱃길을 오르내리며 지나가는 상선이나 고깃배까지도 일일이 매서운 눈길로 감시했다.

이런 사실을 알 길 없는 온군해의 배가 평소에 다니던 뱃길을 따라 해상에 나타나자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 배들은 일제히 경적을 울리고 북을 두드리며 귀국선을 뒤쫓기 시작했다.

“이거 큰일나지 않았는가?”

걱정이 된 춘추가 갑판에 나와 온군해에게 물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우리 해역입니다.”

그렇게 춘추를 안심시킨 군해는 더욱 맹렬히 노를 젓도록 수부들을 독려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해상의 추격전이 한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고구려의 선박들은 싸움을 하기 위해 만든 전선과 민첩한 순라선이었고,

신라 배는 풍랑을 대비해 안전하게 만든 평범한 관선일 뿐이었다.

그조차도 춘추가 군해의 배탈난 것을 염려해 대선으로 바꾸어 타고 나왔으니

갈수록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내가 공연히 고집을 부려 큰 배로 왔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춘추는 점점 가까이 쫓아오는 적선들을 바라보며 가슴을 졸였다.

당나라에 갔던 사신으로 고구려 수군에게 붙잡힌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어서 그 옷을 벗어 저에게 주십시오 나리!”

갑자기 온군해가 소리쳤다.

“옷을 벗으라니?”

“머리에 쓰신 관도 벗어 제게 주십시오!”

“어쩔려고?”

“시간이 없습니다요!”

춘추는 온군해가 원체 급히 서두는 바람에 영문도 알지 못한 채 머리에 쓴 고관(高冠)과

사신의 대례복(大禮服)을 벗어주었다.

온군해는 그것을 받아들자

아랫사람들을 시켜 대선의 고물에 매어둔 작은 배 한 척을 바다에 내리도록 지시했다.

“이런 곤란을 겪게 해서 죄송합니다.

나리께선 마상이로 옮겨 타십시오.

여기서 남쪽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우리 순라선이 보일 것입니다.

뒷일은 모두 제게 맡기시고 나리께서는 빨리 몸을 피하십시오.”

위급함에 처해보면 사람의 진가를 안다고 했던가.

온군해는 의연하게 말하며 얼굴에 가벼운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나 혼자 살아란 말인가?”
춘추가 침통하게 묻자 온군해가 대답했다.

“저희 목숨이야 하나지만 나리 목숨에는 수천 수만의 우리나라 백성들 목숨이 함께 달려 있습니다.

훗날 대공을 세우시거든 이 온군해의 이름 석 자나 기억해주십시오.”

더 이상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춘추는 수부들의 재촉으로 밧줄에 매달려 마상이로 옮겨 탔다.

일엽편주에 몸을 실은 그가 열심히 노를 젓다 말고 힐끔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고관을 쓰고 대례복을 입은 온군해가

뱃전에 단정히 앉아 자신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잘 가시라,

그것이 온군해의 마지막 인사였다.

춘추는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열심히 노를 저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얼마만큼 왔을까.

갑자기 눈앞에 정체불명의 괴선 한 척이 나타났다.

춘추는 기겁을 하며 뱃머리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꼼짝없이 죽게 생겼구나 싶었다.

“잘 다녀오셨는가?”

일순 춘추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다정한 인사말과 함께 뱃머리에서 고개를 내민 이는 다름아닌 두두리 거사, 비형이었다.

“숙부님!”

춘추는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바다가 떠나갈 듯 고함을 내질렀다.

거사가 웃으며 뱃전에서 밧줄을 내렸다.

“재주껏 대롱거리고 올라와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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