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전란 18
“저희가 대국의 문물과 제도를 그대로 따르지 못한 것은 대국의 허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형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돌아가는 대로 임금께 말하여 관인의 의관과 복장부터
대국의 것으로 바꾸겠나이다.”
우선 그렇게 이세민의 환심을 사고 나서 춘추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그런데 형님께서는 백제를 멸한 뒤 과연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겠는지요?”
한순간에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이세민은 속셈을 들키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이내 호탕하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춘추의 의심을 일축했다.
“이제 보니 아우님은 나를 진심으로 믿지 않는구려.
양국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를 함께 치는 마당인데
어찌 그 국토와 백성들을 갈라 하지 않겠소?
그렇게 물으니 섭섭하외다.
분명히 약조하거니와 양국을 평정하면 백제 토지는 모두 신라에게 주겠소.
백제 토지뿐 아니라 평양 이남 땅까지 모두 신라에게 주어
영원히 편안하게 복록을 누리고 살도록 하겠소!”
양심에 찔린 탓이었을까.
이세민은 평양 이남의 땅까지 신라에게 주겠다고 공언했다.
춘추로선 뜻밖의 소득을 얻은 셈이었다.
“이미 말씀하셨듯이 형님께서는 만국의 옥백과 자녀를 모두 거느리셨고
만승의 위엄을 갖추신 분이니 새삼 변방의 산천과 토지를 탐내실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뜻만 같으면야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을 의심하겠나이까?
그러나 대국의 장수와 우리나라 장수들은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대국의 신하와 우리나라 신하들도 마찬가집니다.
향기로운 말은 여러 입을 거치면서 거칠게 바뀌고 아름다운 뜻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추하게 변하기도 합니다.
춘추가 걱정하는 일은 그것이지 어찌 형님의 숭고한 덕업과 변함없이 진실된 마음이겠나이까?”
춘추는 이세민의 앞에 엎드려 다시금 눈물을 글썽였다.
이세민이 그런 춘추를 일으켜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우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우리가 이 자리에서 동맹의 결의를 맺고
그 결의한 바를 서면으로 남기는 게 어떻겠소?”
“좋습니다. 어찌 형님의 뜻을 거역하오리까.”
이세민은 곧 내관을 불러 지필묵을 들이도록 했다.
내관이 종이와 필묵을 들이자 춘추가 붓을 들어 직접 두 사람이 의논한 바를 적었다.
양인이 서로 말을 맞추고 뜻을 합친 뒤 동맹 서약문 2부가 완성되자
춘추가 돌연 손가락을 입에 넣고 약지를 우지끈 깨물었다.
“형님을 섬기는 저의 단심을 만대에 남기기 위해 저는 먹이 아니라 피로 도장을 찍겠나이다.
이것이 우리 조정에 전해진다면 대국을 따르려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뜻이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일월성신과 만년사직을 걸고 의기투합하는 마당이었다.
한 사람이 피를 뚝뚝 흘리며 혈인(血印)을 찍는데 상대라고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내 어찌 아우님의 혈인 위에 먹을 찍겠는가?”
이미 붓을 들었던 이세민도 쾌히 필묵을 내던지고 와락 손가락을 깨물었다.
나당동맹(羅唐同盟)은 이렇게 맺어졌다.
두 사람은 동맹문을 1부씩 나눠 품에 지닌 채로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동맹을 체결한 뒤 이세민은 이를 매우 흡족하게 여겼다.
어차피 백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로지 고구려를 멸하고 연개소문만 발 아래 꿇어앉힐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던 그였다.
그러나 이미 전쟁 준비는 모두 끝난 상황이었다.
조정의 격론으로 차일피일 출병 날짜를 미루고 있었을 뿐,
황제의 마음은 오래전에 확고하여 격론의 와중에도 병기구와 군량을 실은 수레가 끊임없이
내주(萊州)로 향하고 있었다.
전쟁을 시작할 때도 그만둘 때도 황제에게 필요한 건 명분이었다.
어제까지 전쟁을 일으키려고 작심했던 사람이 뚜렷한 명분 없이 갑자기 그만두면
사람들은 그 반복을 탓할 것이었고, 향후 황제의 명령도 그만큼 권위가 서지 않을 것이었다.
그를 따르던 신하나 백성들일수록 어쩌면 연개소문이 겁나서 출병하지 못하는 거라고
빈정댈지도 몰랐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이세민이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춘추는 병석의 노신 방현령의 집을 다시 찾아갔다.
방현령은 이미 병이 깊어 위독한 상태였다.
춘추는 병마가 덮쳐 죽어가던 방현령의 말라빠진 손을 붙잡고 황제와 별궁 별채에서 나눈
은밀한 대화를 대강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노신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장안의 중신들이 하지 못한 일을 대신께서 하셨소.”
그는 정관의 향기로운 치세를 연 재상답게 죽음을 코앞에 둔 처지로도
춘추가 찾아온 까닭을 능히 헤아렸다.
“군사를 물리고 조정 대신들을 설득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할 터,
내가 나라를 위해 마지막으로 할 일이 그것인가 보오.”
방현령은 춘추가 있는 자리에서 아들을 불렀다.
“지금 천하는 태평하고 사람들은 모두 머물 곳을 얻었다.
그런데도 황제께서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것은 나라의 큰 해로움이다.
나는 오래전에 이 사실을 알았지만 병중에 있는 몸이라 아직 한 마디도 아뢰지 못했다.
만일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한을 품은 채 구천을 떠돌 것이다.”
그는 아들에게 쓸 것을 준비하도록 이른 뒤 혼신의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붓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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