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전란 17
“신라가 비록 한쪽 바다 끝 벽지에 있으나 대국을 섬겨온 지 오래인데,
근년에 백제가 더욱 강하고 교활해져서 번번이 국토를 침략하고 작년과 금년에는
대대적인 군사를 일으켜 국경 깊이 쳐들어와서 수십 성을 빼앗아가니
우리로선 조공하고 조회할 길조차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여제(麗濟)가 동맹을 맺은 뒤로 더욱 성하게 날뛰는 것은 그들 두 나라가
대국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야 대국의 황군이 요동에서 회군한 뒤 백제가 더욱 날뛸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고구려에 패하고 돌아왔으니 동맹국인 백제까지 당을 얕잡아본다는 말이었다.
이세민은 춘추의 말에 크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김유신이란 장수가 말하기를 대국에서 고구려를 치려면
군사를 수륙 양쪽으로 내게 마련인데, 육로로 내는 군사는 아무리 많아도 소득이 없으므로
결국엔 수군을 강화할 수밖에 없으나 이 또한 고구려의 수군이 막강하므로
백 번 군사를 내어도 백 번 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나이다.”
춘추의 말이 계속될수록 이세민의 안색은 점점 더 흙빛으로 변해갔다.
대병의 출정을 앞두고 찬반 격론에 휩싸인 그로선 백전백패를 단언하는 춘추의 장담이
여간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하지만 친정에 나섰다가 실패한 경험을 반추하건대 귀에 거슬리는 말이 하나도 틀린 구석이 없으니
반박할 형편도 아니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이세민의 낙담하는 기색을 살피던 춘추가 다시 끊어진 말허리를 이었다.
“하오나 김유신의 생각을 빌려 말씀드리면 대국에서 고구려를 칠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주에서 수군을 내되 고구려 해역으로 가지 말고 곧장 백제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일순 이세민의 침울한 표정에 한 가닥 놀란 기운이 감돌았다.
“백제로 내려간다고?”
“그렇습니다.”
춘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국의 군사가 백제로 내려와 우리와 동서 협공으로 백제를 멸하고,
그런 다음 양국 군사를 그대로 돌려 육로를 통해 평양성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평양의 장안성은 우리 국경에선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립니다.
양국 군사가 날짜를 맞추고 계책과 용병을 서로 협의한 뒤 한날 한시에
구름같이 의병을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친다면 양적을 멸하여
그 사직을 땅에 묻는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럼 우리는 사직의 오랜 화근인 백제를 멸하여 좋고,
대국 역시 요동의 골칫거리를 일거에 토벌할 수 있으니
대업을 성취한 다음엔 서로가 두 다리를 뻗고 베개를 높이하여 화평하고
안락한 세월을 보낼 수 있지 않겠나이까?
또한 그렇게만 되면 양국 국경이 인접한 까닭에 조공이나 조회할 일이 생겨도
한나라를 오가듯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지 않겠나이까?”
이세민은 춘추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철썩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쳤다.
출병을 결심한 뒤로도 끊임없이 요동의 양도(糧道)를 걱정하던 그에게 춘추가 말한 계책은
오랜 고민거리를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묘책이요 탁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 험난한 요동을 거쳐갈 일도 없었고,
신라의 원조를 받을 것이므로 군량과 마초를 걱정할 이유도 없었다.
“참으로 절묘한 계책일세! 김유신과 같은 장수가 왜 우리 조정엔 없는가?
나도 풍편에 그의 명성이 높은 것을 몇 차례 듣긴 했소만 과연 혜안과 식견이 남다르구려!”
“유신이 비록 재능과 지략이 좀 있긴 하오나 번국 벽지의 장수일 뿐입니다.
아무리 김유신인들 황제의 태산 같은 위엄을 빌리지 않으면
어찌 쉽사리 인국(?國)의 우환을 없애겠습니까?
그 스스로가 이미 잘 알고 있나이다.”
“계림은 참말 군자의 나라요!”
이세민이 활짝 갠 얼굴로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고구려를 먼저 치고 그 다음에 백제를 치거나,
또는 양쪽 군사가 계림의 서안에서 만나 남북을 동시에 치는 것은 어떠하오?”
“그것은 안 됩니다.”
“어째서 그렇소?”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여제(麗濟) 양국은 이미 지난 계묘년(643년)에 공수 동맹을 맺은 바 있습니다.
만일 양국을 같이 친다면 그 둘은 힘을 합쳐 사생결단으로 나올 것입니다.
화살도 하나를 부러뜨리긴 쉬우나 둘을 같이 부러뜨리려면 힘이 몇 갑절은 더 드는 법이올시다.
또한 고구려는 비록 공수 동맹을 맺었으나 형님께서 요동을 친정하실 때 백제가 군사를
원조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백제를 먼저 치면 고구려는 지난 일의 앙갚음으로 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순서를 논하자면 반드시 백제를 먼저 치고 그 다음에 고구려를 쳐야 합니다.”
이세민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우리 군사를 얼마쯤 내면 되겠소?”
“20만이면 너끈할 것 같습니다.”
“우리 군사의 식량은 신라에서 대야 할 게요.”
“물론입니다.”
“시기는 언제쯤이 좋을 듯싶소?
병장기와 식량을 준비하여 차질 없이 대업을 수행하려면 두어 해는 필요하지 않겠소?”
“내년 가을쯤이면 좋을 듯합니다.”
“우리야 기왕 고구려를 치려고 오호도에 병기와 식량을 잔뜩 쌓아두었으니
내년 봄이라도 무방하지만 신라에서 20만 대병을 먹일 양식이 한 해 가지고 마련이 되겠소?”
“그럼 오호도에 쌓아둔 식량을 조금 나눠주시지요.”
“그래도 되고……”
“그렇다면 내년 봄이라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그사이 조금씩 흥분이 가라앉은 이세민은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백제를 치고 연하여 고구려를 친다면 그들 양국을 모두 수중에 넣을 수도 있겠고,
잘만 하면 신라까지 당의 변방으로 만들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차제에 귀국이 우리의 문물과 제도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어떠하오?”
그 말 한 마디로 춘추는 이세민의 속셈을 훤히 알아차렸다.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춘추는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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