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8장 전란 15

오늘의 쉼터 2014. 11. 11. 16:20

제28장 전란 15

 

 

 

그는 연신 고함을 지르며 눈물을 그치지 않고 흘려댔다.

이세민은 춘추가 그토록 흥분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신라의 위급함을 알리러 와서도 언제나 조용한 말과 품위 있는 태도로

황제와 조정을 설득하던 그였다.

춘추가 너무 괴로워하자 오히려 이세민이 춘추를 위로했다.

“처음엔 상처가 깊고 환부가 얼어서 고생이 심했지만 이젠 많이 아물었소.

과히 상심하지 마오.”

그는 주안상 앞으로 진객의 손을 이끌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그칠 듯하던 춘추가 다시 흑흑 흐느끼며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못나고 우리 신라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래 둘도 없이 존귀하신 형님이 천하의 개망나니 개소문 따위에게 이같은 봉변을 당한 것은

이유와 책임이 하나에서 열까지 저와 신라에 있습니다.

저는 이런 줄도 모르고 자식들과 팔자 좋게 유람이나 나왔으니

형님께서는 이 아둔하고 철없는 동생을 소리 높여 꾸짖어주십시오.

춘추는 이런 환대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춘추가 무릎을 꿇으며 사죄하는 소리를 듣고 이세민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찌 아우님의 잘못이겠소. 그만 눈물을 거두고 재회의 기쁨을 나눕시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가슴이 더 무겁습니다.

차라리 호통을 치시면 제 마음이 편하겠나이다.”

춘추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는 이미 천하를 제압하여 발 아래 두신 터에 잡초도 자라지 않는

요동의 박토 몇 뼘이 무슨 탐이 났을 것이며,

그 너머 티끌만한 화외(化外)의 땅에서 주야가 뒤바뀌고 소가 왕이 된다 한들

이미 우주를 밝힌 형님의 덕업에 무슨 해가 되겠나이까?

개소문이 주군을 시해하고 동료를 살해한 죄는 삼라(森羅)에 쏟아지는 찬란한 태양 아래에서

나뭇잎 하나의 그늘조차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만천하의 재물과 만백성의 따르고 섬김이 모두 천자이신 형님께 있는데,

그런 형님께서 지존의 높은 계단을 내려와 스스로 활과 창을 손에 쥐고 요동 정벌에 나선 까닭은

우리 신라가 해마다 고구려와 백제에 시달림을 당하기 때문임을 춘추가 어찌 모르겠나이까?

존망과 생사가 걸린 위급한 때를 당하여 맨발로 만리 뱃길을 달려와 황궁의 문을 두드린 것이

무릇 몇 번이며, 신라의 7백 년 사직이 아직 망하지 않은 것은 그때마다 형님께서 위엄을 드러내어

양적을 호되게 꾸짖었기 때문입니다.

정관 이후 저와 신라가 형님께 의지해 사직을 보전한 것은 갓난아이가 어미젖에 의지해

목숨을 이어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형님께서는 그들 양국이 동맹을 맺고 우리를 궤멸시키려고 하자

분연히 대병을 일으켜 만승의 위엄과 본때를 보여주시니 평양과 사비에선 노루 떼와 이리 떼가 놀라

도망가고 길에선 행인이 사라져 인적마저 묘연하게 되었나이다.

이에 춘추는 자식들을 데리고 모처럼 한가로운 때를 얻어 유람을 나왔던 것인데,

정작 존안을 봉견하매 존귀하신 용안에 흉까지 진 것을 보니

그 마음이 어찌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치자 춘추는 다시 목청을 높여 흐느꼈다.

이세민이 겸연쩍게 웃으며 그런 춘추를 달랬다.

“아우님의 말씀처럼 내가 몇 해 전 요동 정벌에 나섰던 것은 산천과 토지를 탐내서도 아니고,

옥백(玉帛)과 자녀 또한 모두 내가 가진 터이므로 새롭게 얻을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신라가 여제(麗濟) 양국에 몰려 늘 그 침해를 입는 까닭에 편안한 세월을 보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제 신라의 국경이 편해지고 아우님이 그 덕으로 한가로움을 얻었다니

비록 눈에 흉은 졌으나 내 마음이 한량없이 기쁘오.

이런 날에 어찌 아우님과 더불어 여흥을 즐기지 않을 수 있겠소?”

이세민은 크게 기뻤다.

자신의 동정(東征)을 신라에 대한 은전으로 아는 춘추의 태도가

남에게 선심 베풀고 우쭐거리기 좋아하던 그의 성품에 불을 질렀다.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춘추에게 잔을 권하고 자신도 모처럼 술로 목을 축였다.

여흥이 무르익자 이세민은 당조의 중신들을 불러 춘추에게 소개하고 함께 어울릴 것을 권했다.

춘추가 데려간 문왕도 제법 어른스럽게 예를 갖추며 황제에게 절을 했다.

이세민은 흐뭇한 얼굴로 문왕의 인사를 받고,

“네가 몇 살이냐?”

하고 물었다.

“열일곱입니다.”

“호, 열일곱이면 다 컸구나. 그래 아버지를 따라와서 장안 구경은 실컷 했느냐?”

“네. 여러 곳을 다녔나이다.”

“너희 나라보다 구경할 것이 많더냐?”

“신기한 것도 많고 배울 점도 많았나이다.”

“장안에 와서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이더냐?”

“여러 가지가 다 좋았으나 지금 폐하를 알현하는 이 일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기쁜 일입니다.

어찌 감히 다른 구경에 비하오리까?”

“허허허……”

이세민은 문왕의 대답을 듣고 더욱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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