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전란 14
이 무렵 3만 군사를 이끌고 내주를 출발한 설만철과 배행방은 전함을 타고 압록수로 들어가서
고구려의 박작성 남쪽 40리쯤 되는 곳에 군영을 치고 한창 고구려 군사와 싸우고 있었다.
요동에 전운이 감돌고 황제가 대병을 일으킬 뜻이 차츰 확고해지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 또한 부쩍 늘어났다.
당조는 다시금 찬반의 격론에 휩싸였다.
이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던 이세민에게는 조정 밖의 믿을 만한 사람이 해주는
냉엄한 평가가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그는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불러 말했다.
“경은 신라사가 묵고 있는 교외의 객관으로 가서 김춘추와 그 자제를 영접하고
짐의 환대하는 마음을 전하라.
그들이 국학에 가서 석전과 강론의 참관을 원하다 하니 경은 짐을 수행하듯이
춘추 부자를 수행해 장안에서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룰 수 있도록 하라.
김춘추는 비록 신라인이지만 짐과는 젊었을 때부터 각별한 교감이 있었고
호형호제하며 지내기를 마치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와 같이 하였다.
어찌 연개소문 따위에 비기겠느냐?”
고구려에 가서 봉변을 당하고 돌아온 이세민에게는 신라와 춘추의 존재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유형이 떠나려고 하자 이렇게 덧붙였다.
“김춘추가 아들을 데리고 장안으로 온 것은 우리나라를 대대로 섬기려는
마음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가 아들의 교육을 그처럼 생각하니
짐이 지은 비문과 저서를 내려 가르치게 하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또한 장안에 묵으려면 경비가 많이 들 것이므로 금백(金帛)을 후히 가져가서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
유형이 분부를 받고 물러나려는데 황제가 다시 불렀다.
“그가 장안에서 볼일을 다 마치거든 나의 기다리는 마음도 함께 전하라.
낮이라도 괜찮고 밤이면 더욱 좋다.
김춘추가 입조한다면 짐은 경우와 때를 가리지 않고 만날 것이다.”
참으로 파격적인 대접이었다.
유형은 황제의 명을 받아 이세민이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그 무렵 당조에서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晉代의 史記)》와 금백을 수레에 가득 싣고
성대히 예를 갖추어 김춘추를 찾아갔다.
유형을 만난 춘추는 황제의 대접에 크게 감동했다.
“황은(皇恩)이 태산보다 높고 창해보다 넓습니다.
저는 그저 유관 삼아 자식들을 데리고 우리나라 사신을 따라왔을 뿐인데
황제께서 이처럼 대은을 내리시니 흔감하여 가히 몸둘 곳을 모르겠소.
유경께서 돌아가시거든 춘추가 백골난망을 노래처럼 지어 부르더라고 전해주시오.”
그러자 유형이 웃으며 말했다.
“대인께서 한가로운 때를 얻으면 직접 입조하여 뜻을 전하시지요.
폐하께서는 대인께서 입조하지 않으시는 것을 매우 서운하게 여기시는 눈치올시다.”
“허허, 이런 난감한 경우가 있나?
나야 장안에 오던 날부터 폐하의 존안을 뵙고 싶었으나 우리 사신에게 들으니
워낙 국사가 바쁘시다 하여 감히 찾아 뵙지 못하였소.
만일 경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내일이라도 당장 입조를 하지요.
자식들 데리고 유람 다니는 일이야 급할 게 뭐가 있겠소?”
“하면 그렇게 하십시오. 제가 알기로 바쁜 일은 거의 끝났지 싶습니다.”
춘추는 안색마저 상기되어 몇 번이나 송구해하다가,
“그럼 내일까지 갈 게 무에 있소? 오늘밤은 어떻소?”
하니 유형이 여전히 웃으며,
“밤이면 더욱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춘추가 유형을 바깥에 세워둔 뒤 의관을 갖추고 법민과 문왕을 불러,
“너희도 나와 같이 황궁에 들어가자.”
하니 문왕은 황제를 뵙게 되었다며 신이 났는데 법민은 갑자기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저는 아침 먹은 게 잘못됐는지 자꾸 속이 뒤틀리고 설사가 납니다.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방귀를 뀌어대고 수시로 뒷간을 들락거리는 것도 참담한 일이니
그냥 대사와 함께 객사에 있으렵니다.”
하였다.
춘추가 허물없이 황제와 어울리는 자리에 법민을 데려가지 못하는 것이 서운하여,
“아주 안 좋으냐?”
“이런 기회에 황제에게 얼굴을 알려두면 좋을 텐데……
가는 길에 의원에게 들러 약이라도 지어 먹으면 어떻겠느냐?”
하고 여러 차례 권했으나 법민이 아무래도 어렵겠다면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문왕만 데려가십시오. 저한테는 훗날 또 기회가 있겠지요.”
하여 하는 수 없이 문왕만을 데리고 대궐로 향했다.
공무가 끝난 시각, 황궁 별전으로 춘추 부자가 들어서자
미리 주안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던 이세민은 양팔을 크게 벌린 채 수년 만에 보는 춘추를 껴안았다.
“어서 오시게, 아우님! 대저 얼마 만의 해후인가?”
“존안을 뵌 것이 꼽아보니 여섯 해인데 10년도 지난 일처럼 아득합니다.”
“나도 그렇소. 그사이 워낙 일이 많아 수십 년은 된 것 같아. 자주 좀 오지 않고?”
“송구합니다.
저 또한 자주 문안을 여쭙고 싶었으나 소국의 일이 많아 뜻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나이다.”
얼싸안고 반색을 하던 춘추가 갑자기 이세민의 왼눈에 난 상처를 들여다보고 기겁을 하며 물었다.
“용안에 무슨 흉입니까?”
“아하, 이거.”
이세민이 상을 찡그리며 겸연쩍게 웃었다.
“요동에 갔다가 얻은 상처외다. 개소문이가 나를 이 꼴로 만들었지.”
이세민의 설명을 들은 춘추는 돌연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개소문이 어찌 형님께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일전에 원병을 청하러 평양에 갔을 때는 저한테도 서운한 일이 많았으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려니 하고 나쁜 마음을 품지 않았는데,
형님한테까지 이런 불경한 짓을 저지른 것을 보면 상종하지 못할 자가 틀림없습니다!
장안에서 밥이나 빌어먹던 놈이 제 나라 군신을 죽이고 새털만한 권세를 손에 쥐니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입니다!
옛날에도 예절을 아는 놈은 아니었지만 차마 이렇게까지 막돼먹은 놈일 줄은 몰랐습니다!
춘추는 분통이 터져 참을 수가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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