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전란 13
장안에 도착한 춘추는 무슨 마음에선지 자신은 입조하지 않고 한질허만을 궐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 무렵 이세민은 건강이 다시 나빠져서 국사를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는 또다시 대병 30만을 일으켜 고구려를 치려고 내주자사 이도유에게 양곡과 병기를
오호도로 옮기라는 조서까지 내려둔 상태였지만 갑자기 기운이 빠지고 신병이 도지는 바람에
논의가 더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그럴 때 신라사가 입조하여 알현을 요청한다는 내관의 전보가 있자 이세민은 심드렁한 얼굴로,
“사신이 누구인가?”
하고 물었다.
내관이 한질허라고 대답하니 이세민의 심드렁한 얼굴이 더욱 심드렁해졌다.
“보시지 않으시겠는지요?”
“오늘은 과히 몸이 좋지 않다.
신라사에게는 국사에 바쁜 일이 많아서 짬을 내기 어려우니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들어오라고 전해라.”
기다리던 질허가 내관의 전언을 듣고 그대로 물러났다가 이틀 뒤에 다시 입조하자
이세민은 사신을 불러 보는 대신 대전 어사(御史:탄핵의 소임을 맡은 관리)를 불러 말했다.
“지난번에 들으니 신라에서는 이번에 즉위한 신왕의 연호를 태화(太和)라고 정했다던데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사용하는지 그 까닭을 물어보라.”
몸이 고달프니 만사가 귀찮고, 만사가 귀찮으니 자연 찜부럭이 이는 것은 황제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사가 황제의 분부를 받고 질허가 기다리는 곳으로 와서 물으니 질허가 잠시 생각하다가,
“일찍이 천조(天朝:중국)가 정삭(正朔:달력)을 우리에게 나눠주지 않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에 날짜를 헤아리고 농사짓는 때를 알려고 선조 법흥왕 이래로 사사로이 연호를 써온 것인데
만일 대조(大朝:당)가 쓰지 말라고 한다면 소국이 어찌 명을 어기겠나이까?”
하고 공손히 대답했다.
어사가 질허의 말을 물어다가 황제에게 전하자
공연히 트집을 잡으려던 이세민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겠구나.”
하지만 이날도 그는 내정이 바쁘다는 이유로 질허를 만나주지 않았다.
질허가 객사로 돌아와 춘추에게 사정 얘기를 전하니 춘추가 대번,
“그렇다면 황제의 건강이 나빠진 게 틀림없네.”
하고서,
“어찌 병석의 환자를 상대하겠는가?
눈빛이 번들거리고 기운이 넘치는 사람과 해야 할 말일세.”
하며 다시 입조를 미루었다.
“장안에선 사람들이 팔자걸음을 걷는다.
이렇게 걷는 것이 당보(唐步)다.
너희도 장안에 살려면 당보를 배워 걸어라.”
춘추는 두 아들에게 그렇게 강조했다.
“장안에서 우리처럼 꼿꼿이 발뒤축을 세워 걸으면 사람들이 전부 쳐다보고 경계한다.
거기다 말까지 더듬거려봐라.
누가 우리한테 속셈을 내보일 것이며 그래 가지고 무엇을 얻겠느냐?
당에서는 당인이 돼야 한다.
당나라 말을 배우고, 당나라 걸음을 익히고, 누가 보더라도 당나라 사람처럼 행세해라.”
춘추는 포목전에 가서 옷감을 떠다 두 아들에게 당복(唐服)을 지어 입힌 다음
좌우에 하나씩 달고 장안의 여러 곳을 두루 돌아다녔다.
구경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시장에 가서 떡도 사먹고, 남의 초상에 가서 절도 했다.
옛날 지기를 찾아다니며 하루 이틀 신세도 졌다.
춘추는 가는 곳마다 크게 환영을 받았다.
한때 장인 노릇을 하던 구칠도 여든이 넘은 나이로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춘추 부자를 얼싸안고 반가워했다.
죽은 위징의 집에 뒤늦은 문상을 가서는 처자와 손을 맞잡으며 눈시울을 붉혔고,
병석의 이정(李靖)과 방현령(房玄齡)을 만나서는 요동의 전란을 걱정하느라
꼬박 밤을 지새기도 했다.
문왕이 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팔자걸음을 걷다가 하루는 제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내 걸음 좀 보십시오. 걷는 것만 보면 누가 저를 신라에서 왔다고 하겠습니까?”
하고는 발끝을 팔자가 아니라 거의 쩍 벌어진 일자로 만들어 어정어정 걸어 다녔다.
춘추와 법민이 배를 잡고 웃다가 법민이 먼저,
“아무도 너를 신라에서 왔다고는 하지 않겠다만 대신에 다리가 성한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겠다.”
하니 춘추가 웃던 끝에 사뭇 정색을 하며,
“장안에선 당보를 배워 걷되 귀선(歸船)에 오르면 다시 신라 걸음을 걸어야 한다.
장안에 도착하면 당인이 되고, 장안을 떠나면 본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버지가 평생을 두고 지켜온 법칙이다.
내가 너희만할 땐 그 사실을 모르고 금성에 가서도 당보를 걸으며 우쭐대다가
화랑들에게 크게 혼쭐이 났으니 너희도 이 점을 각별히 유념해라.
장안에서 당인 노릇을 하는 것은 궁극에는 훌륭한 신라인이 되기 위한 방편이다.”
하고 젊어서 겪은 부끄러운 일까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렇게 달포 가량이 후딱 지나갔다.
장안을 휘젓고 돌아다닌 춘추의 소문은 마침내 당주의 귀에까지 이르렀다.
그사이 탕관들이 끓여 바친 약을 먹고 어느 정도 기력을 차린 이세민은 근신들을 불러 물었다.
“김춘추가 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입조하지 않으니 이상하구나.
지난번에 왔던 신라사가 아직 장안에 그대로 있는지 알아보라.”
명을 받은 신하가 객관으로 질허를 찾아가 황제의 말을 전하자
질허는 춘추가 이미 지시한 대로,
“우리 대신께서는 사신으로 온 것이 아니라 자제들에게 장안의 문물을 구경시켜주고
또한 국학에 가서 석전(釋奠:문묘에서 공자를 제사지내는 예식)과 강론을 참관하려고 왔습니다.
목적이 사사로운 데다 황제께서 공무로 온 사신조차 만나지 못할 만큼 바쁘시니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입조하지 않았을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고 설명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세민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탄식했다.
“김춘추가 온 줄을 알았다면 어찌 신라사를 만나지 않았겠는가.
내가 만국의 사신을 모두 만났으나 그 가운데 깊은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김춘추밖에 없다.
그는 영특하고 총명한 사람일 뿐 아니라 조정 밖의 외신(外臣)이니
요동을 정벌하는 일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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