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전란 11
이튿날 일행이 일찌감치 조반을 얻어먹고 하룻밤 신세진 집을 나와 얼마만큼 왔을 때였다.
“보십시오, 나으리! 저 좀 보십시오!”
일행이 뒤를 돌아보니 어제 본 영감이 헐레벌떡 말을 타고 쫓아왔다.
“왜 그러시오?”
법민이 앞에 나가서 묻자 영감이 급히 말에서 내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제 자식 놈이 간밤에 무사히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게 모두 나리 덕택입니다요!
오늘 집에서 귀환한 자식 놈을 위해 잔치를 열려고 하니 부디 하루만 더 머물고 가십시오!”
“뜻은 고마우나 우리는 길이 바쁜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지나는 길이 있으면 다시 들르지요.”
“그럼 젊은 나리님 존함이라도 좀 일러주고 가십시오.”
“허허, 그저 김 아무개입니다.
사람이 무사하면 저도 그걸로 족합니다.”
법민이 한사코 이름조차 밝히기를 꺼리자
영감은 애운한 얼굴로 몇 번이나 법민과 일행들을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조정 일을 보시는 분들인 듯한데 혹시 김유신 장군을 아시는지요?”
하며 물었다.
저만치 말을 타고 앉은 김유신을 힐끔 돌아본 법민이,
“알긴 압니다만 그건 왜 물으십니까?”
하니 영감이 화들짝 반색을 하며 제가 타고 온 말을 손으로 가리키고 주절주절 얘기가 길었다.
일행들은 무한정 기다릴 수 없어 발길을 재촉했다.
법민도 다른 얘기 같았으면 그냥 돌아섰을 테지만 하필이면 화제가 말 얘기요,
바로 전날 춘추가 유신의 말을 보고 걱정하던 것이 떠올라 급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영감의 얘기를 끝까지 들었다.
그 사연인즉 워낙 구구하여 다 옮길 수는 없고 요점만 말하면
그 말을 부디 김유신 장군한테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말은 놀랍게도 진귀하기로 이름난 백설총이였다.
영감이 그 말을 공산에서 발견한 것은 지난봄이라고 했다.
그때 말은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였는데,
그냥 놓아 키우면 얌전하다가도 주둥이에 재갈을 물리고 등에 안장만 올렸다 하면
길길이 날뛰는 것이 선불 맞은 범도 당하기 어려울 정도라
아무도 길들이지 못할 우환덩어리라는 거였다.
“저놈이 등에 올렸다가 땅에 패대기친 사람만도 어림잡아 20명은 되지 싶습니다.
말깨나 다룬다는 사람은 모다 저놈한테 죽지 않을 만큼 심한 봉변을 당했지요.
날이 갈수록 준마 태가 명확하니 보는 사람마다 탐을 내어 웃돈을 주고 데려갔다가도
사흘을 못 넘겨 고개를 쩔쩔 흔들며 다시 가져와서 아직 주인다운 주인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말 주인은 따로 있을 거라며 옛날에 김유신 장군이
백설총이 목을 친 일을 거론합디다.
그 소리를 여러 사람한테 듣고 말을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목에 거무스름한 테가 둘러져 있는 게 어쩌면 그때 죽은 백설총이가 주인을 잊지 못해
다시 환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싶었습니다.
그래 언제고 압량주로 김유신 장군을 찾아가서 말을 진상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그만 자식 놈 일이 생기는 바람에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저자에 떠돌던 천관녀와 백설총이의 옛일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던 법민은
영감의 설명을 들으며 말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외로 꼰 채 제법 거벽을 치며 여차하면 발길질이라도 할 태세로
뒷발을 땅에 문질러댔다.
생김새나 하는 짓으로 봐선 틀림없는 준마요 명마였다.
게다가 목덜미를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영감이 말한 대로 거무스름한 테가 둘러져 있어
신통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람이든 말이든 집에 과분한 것을 데리고 살면 우환이 생기는 법이올시다.
곰곰 돌이켜보면 저 말이 내 집에 오면서부터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많았습지요.
이제 자식이 무사귀환을 하고 보니 더욱 저 말이 겁이 납니다.
가시는 길에 압량주에 들러 김유신 장군께 저 말을 좀 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제가 데려가지요 그럼.”
법민은 조심스레 말고삐를 붙잡았다.
말이 곁눈질로 법민을 보면서 대가리를 쳐들고 뻗대려는 것을 영감이 말 궁둥이를 손바닥으로 툭 치며,
“이놈아, 얌전히 따라가거라! 너를 옛 주인한테 데려다줄 분이시다!”
하고 버럭 고함을 치니 신통하게도 말이 대가리를 푹 떨구며 따라가려는 시늉을 하였다.
법민이 영감과 헤어져 급히 일행과 합류한 뒤 말 얘기를 전하는데 어린애처럼 신바람이 나서
입에 거품을 물었다.
춘추는 엉덩이가 빠개진 과하마를 가리키며,
“그러잖아도 그놈의 말이 찌그러진 나귀처럼 보여 안쓰러웠는데
하늘이 이를 알고 준마를 내리신 모양입니다!”
하고 제 일처럼 좋아하니 유신이 웃으며,
“장인께서 선물한 말이라 허락을 받고 갈아타려고 기다렸습니다.”
하고는 법민이 끌고 온 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유신이 백설총이한테 가까이 다가와 그 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니
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흡사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대로 있었다.
“네가 나를 알겠느냐?”
유신이 팔을 들어 말목에 난 검은 자국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자
말이 고개를 쳐들고 히히잉, 울음을 토했다.
“인석아, 내가 너를 그렇게 보내고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흰말만 보이면 네 생각이 나서 두 번은 더 보는데,
이렇게 돌아와주니 참으로 고맙구나.
너도 할 일이 남았으니 이승에 돌아온 게지.
다시는 너를 서운하게 안 만들 테니 너도 그만 나를 용서해주려무나.”
유신은 사람한테 말하듯이 다정하게 속삭인 뒤 과하마의 등에서 제구를 가져다 백설총이 등에 얹었다.
말은 두어 번 뒷발질을 해댔을 뿐 별다른 저항은 하지 않았다.
유신이 익숙한 솜씨로 땅을 박차고 백설총이 잔등에 훌쩍 올라탔다.
그는 새 말을 탄 채 싱글벙글 웃으며 몇 바퀴를 돌았다.
“이 모두가 장한 조카를 둔 덕택일세! 고맙네, 큰조카!”
어느새 법민에게 다가온 유신은 마상에서 덥석 조카를 얼싸안았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춘추조차 유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점점 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장가를 들던 날보다 더 기뻐합니다그려!”
춘추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신은 말과 함께 여기저기를 바쁘게 뛰어다녔다.
제 형과는 달리 백설총이에 얽힌 일을 전혀 듣지 못한 문왕이 춘추의 곁으로 와서
살며시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큰 외숙이 흰말 타고 좋아하는 모습이 꼭 개원(愷元:문왕의 넷째 아우)이가
제 등을 타고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개원이는 저렇게 좋아하면 꼭 오줌을 싸던데.
아버지, 우리가 돈을 모아 진작에 흰말 한 마리를 사드릴 걸 그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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