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전란 10
늙은이가 일행을 이끌고 찾아간 곳은 이웃의 한성바지네 집이었다.
춘추와 유신은 영문도 모르고 그 집에 들어가 저녁 대접도 융숭하게 받고 잠잘 곳도 얻었지만
밥상을 물리고 주안상까지 받아서 제법 착실히 얘기를 나눈 뒤에도 질허와 법민이 돌아오지 않으니
그제야 문왕에게 두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
문왕이 두어 번 머뭇거리다가,
“형이 다 알아서 한다고 두 어른께는 걱정을 끼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으니 제 꼴이 지금 우습습니다. 말씀을 드리면 고자질을 하는 셈이니 그냥 모르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하고는 없어진 두 사람이 곧 올 거라는 소리만 거듭했다.
그러구러 다시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 기별이 없자 유신이 먼저,
“이젠 우리 얘기도 거의 동이 났구나.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우리가 너한테서 들은 말을 모르는 척하고만 있으면 될 게 아니냐?”
은근한 말투로 꼬시며 문왕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춘추도 웃으며,
“그래 모르는 척하마. 무덤에 갈 때까지 우리 셋만 알자꾸나.”
하니 저도 걱정이 되는지 자꾸만 바깥을 내다보며 속을 태우던 문왕이 드디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양 잔뜩 목소리를 눅인 채 영감한테서
들은 얘기들을 모조리 늘어놓았다.
“설화현(舌火縣:화원) 현령이면 적보(赤普)라는 자일 겝니다.
시속이 어지러우니 탐리들이 더러 생겨 민간에 억울한 일이 적잖을 것이오.
적보라는 자도 위화군 에선 꽤나 조명이 높은 인물이지요.”
유신이 아는 듯이 말하자 춘추가 고개를 끄덕이며,
“저도 아는 자입니다. 돌아가신 선친과 사이가 깊었던 한돈 공의 아들이지요.”
하였다. 유신이 한돈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며,
“말술을 마시던 그 한돈을 말씀하십니까?”
하고서 만노군에 살던 어릴 적의 일을 떠올렸다.
한돈이 용춘 과도 친했지만 취산 몽암의 옛정을 못 잊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서현에게도 가서 성보와 말술을 마시고 돌아가곤 했다.
그는 금성에서 4품으로는 제일 높은 대사 벼슬까지 지내고 죽었는데,
그가 다시 벼슬을 살 때 재취로 들인 여자한테서 낳은 아들이 바로 적보였다.
적보가 죽은 제 아버지를 그대로 빼다 박아서 술도 말술이고, 성질도 급하고,
기운도 제법 쓸 줄 알았으나 그까짓 거야 닮아도 크게 해될 것이 없었지만
내 것 네 것 안 가리고 욕심 많은 것은 분명한 허물이라,
제 아버지 살았을 때부터 외관 현령으로 나돌면서 태산 같은 재물을 모으고 살았다.
춘추와 유신이 한돈과 적보 얘기를 한참 나누고 있을 때 질허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오니
춘추가 무덤까지 비밀로 하겠다던 약속은 까맣게 잊고,
“왜 이리 늦었나? 어떻게 됐어?”
하고 만사를 아는 듯이 물었다.
질허가 벌써 들어서면서 빙그레 웃더니 신을 벗고 상머리에 앉으며,
“나리 큰 자제께서 여간 영특하고 대차지 않으십니다.
장안이 아니라 세상천지 어디에 내놔도 걱정할 게 없겠습니다.”
춘추에게 침이 마르도록 법민을 칭찬하고는 현령과 징발관이 관사 앞에서
법민의 바지춤을 부여잡고 손이야 발이야 잘못을 빌고 있다고 덧붙였다.
“어떻게 했기에 그 욕심 많은 탐리들이 자진해서 죄를 빌던가?”
유신이 궁금하여 물으니 질허가 자꾸 웃어가면서,
“관사에 찾아가 불쑥 한다는 소리가, 자신은 조부에서 나온 관리인데 돈 받고
군역에 대신 보낸 자들을 나라에서 알았으니 대역자 한 사람당 말 30마리 값을 셈하여
징출(徵出)하라고 호통을 칩디다.
그리곤 조정에서 적간한 설화현의 대역자 명부라며 생판 낯선 이름들을 끝도 없이 불러대니
만일 그렇게 치자면 수천 마리 말 값으로도 모자랄 판이었지요.
징발관이 하도 억울하니 제 손으로 대역자 명부를 가지고 와서 따지는 웃지 못 할 진풍경까지
벌어졌습니다.”
“허허, 그랬더니?”
춘추도 재미난 표정으로 질허를 재촉했다.
“징발관이 갖다 바친 대역자 명부를 품에 넣고 관사 바깥으로 나와선 이제 소문으로만
떠돌던 부패의 물증을 잡았으니 탐관오리 명줄 끊기는 것은 조석간의 일이라며 웃으니
그제야 사태를 알아차린 현령과 징발관이 사색이 되어 바지춤을 붙잡고 늘어지지 뭡니까?
제가 한 일이라곤 고의춤에 차고 있던 품주대사 신표와 직인을 빌려드린 것밖에 없습니다.”
“적보가 아주 된통 걸렸구먼.”
유신이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춘추도 흡족한 얼굴로 질허에게 술 한 잔을 권한 뒤에,
“젊은 혈기에 너무 과하게 다루지나 않을지 모르겠네.”
하고 걱정스럽게 말하니 질허가 받은 술을 마시다 말고,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을 겁니다.
제가 관사로 갈 때 이미 밝은 날 해결을 하라고 권했더니 뭐라는 줄 아십니까?
비록 탐리의 죄는 미우나 백주 대낮에 백성들이 다 알게 떠벌리면 장차 관령이
제대로 서지 않을 것을 걱정하십디다.
저한테도 자식이 있지만 20세 청년의 입에서는 듣기 어려운 말이지요.”
하며 또 한번 법민의 사려 깊은 것을 칭찬했다.
그러구러 밤이 깊어 법민이 돌아오자 춘추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양 시치미를 떼고,
“너는 대체 어디를 갔다가 이토록 늦게 오느냐?”
하니 법민이 질허와 문왕을 번갈아 살피고는,
“별일 아닙니다.
그저 모처럼 바깥에 나오니 신바람이 나서 동네를 좀 쏘다니다 왔을 뿐입니다.”
하고 끝까지 말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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