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전란 9
그 집은 마을에서 제법 집칸이나 장만하고 사는 번듯한 6두품의 집이었다.
유신과 춘추는 뒤에 있고 한질허가 법민과 문왕을 데리고 가서 먼저 주인을 만나 잠청을 넣으니
늙은 주인이 짜증 섞인 얼굴로,
“방은 내어드릴 수 있으나 집에 우환이 생겨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요기는 못할 게요.
그래도 좋다면 들어오고 아니면 딴 데 가서 묵으시오.”
하고 말했다.
산 밑에 사는 촌영감이 사신의 행차를 구경한 적이 없어 비범한 차림새를 보고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질허가 난감한 얼굴로 법민과 문왕을 돌아보며,
“어떻게 하지요?”
하니 열일곱 먹은 문왕이 먼저,
“그럼 딴 데로 가십시다.”
하는 것을 법민이 나서서,
“무슨 우환이 생겼기에 이 큰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까?”
하고 주인영감에게 공손히 물었다.
영감이 법민의 행색을 아래위로 쓰윽 훑어본 뒤에,
“얘기를 하면 도령이 해결을 해주겠소?”
하고는 갑자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인지 들어봐야 해결을 할지 못할지 알 게 아니오?”
책 많이 읽은 질허가 문득 괘씸한 생각이 들어 따지듯이 묻자
영감이 당초의 정나미 떨어지던 태도와는 달리 수월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본래 공산에서 말을 놓아 키우는 사람인데 지난봄에 아들놈을 군역에서 빼려고
현의 징발관(徵發官)에게 방법을 알아보니 준마 세 마리 값을 물라고 합디다.
시세로는 좀 비싼 듯했지만 긴말 오가는 것이 귀찮아 그 값을 물고 아들놈이 군역에서 빠졌는데,
두어 달쯤 지난 뒤에 난데없이 말값 흥정을 새로 하자면서 이번엔 다섯 마리 값을 물어내지 않으면
곱징역을 살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지 않겠소?
이유를 물었더니 내 자식놈 대역(代役)으로 나간 사람이 요거성 앞에서 백제군에게 부상을 입었는데
보상을 안 하면 금성 병부에 가서 고변을 하겠다고 우긴다는 게요.
그걸 막지 않으면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자신과 고을 현령까지도 쫓겨날 판이라며
어찌나 거벽을 치는지 할 수 없이 전 재산을 털어 입막음을 했지요.”
영감이 잠시 말허리를 끊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내 자식 놈 대역 나갔다가 부상을 입었다는 사람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를 찾아와선 징발관이 당초 약속한 말 한 마리 대역 값을 아직도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하지 뭡니까?”
“그럼 그게 다 어떻게 된 게요?”
질허가 얼른 사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묻자 영감이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을 쳤다.
“말 여덟 마리를 징발관과 현령이 짜고 다 먹었단 소리지.
세 마리 흥정에 두 마리를 구전으로 먹고 것두 모자라 내게 있지도 않은 말로 비라리를 쳐서
또 다섯 마리 값을 후려내니 그런 게 도적놈, 역적 놈들이지 무슨 아전이고 관수요?
그 뒤로 사정을 알아보니 군역 때문에 그 놈들한테 당한 집이 한두 집이 아닙디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내가 그 길로 관아에 달려가 현령을 상대로 따졌더니
글쎄 그 현령의 처사가 말 여덟 마리 값을 다 돌려주면서 대신에 우리 집의 아들놈을 붙잡아다가
옥에 가둬버리고 말았소.
죄목은 군역에서 무단으로 빠졌다는 게요.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딨소 그래?”
“듣고 보니 사정은 안됐소만 노인장도 과히 떳떳한 건 없지 싶소.
만인한테 공평한 군역을 어찌하여 재물로 빼려는 생각을 했단 말씀이오?”
질허가 책망하듯 묻자 영감이 침통한 어조로,
“그래서 이런 곡경에 빠지고도 혼자 끙끙대기만 하지요.”
하고는,
“내게 본래 아들이 넷이나 있었는데 위로 셋을 모두 군역에 보냈다가 잃었소.
백제에 잃고, 내란에 잃고, 이제 남은 거라곤 막내아들놈 하나라
그 자식마저 잃을까봐 겁이 나서 그랬소.”
하는데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질허도 그 말을 듣고는 더 따지지 못했다.
“그럼 옥에 갇힌 아드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잠자코 있던 법민이 물으니 영감이 한숨에 섞어 대답했다.
“국법에 군역을 무단으로 빠진 죄가 크니 군주의 품의를 받아 참수한다고 합디다.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지요.
그 바람에 내 처는 자식놈 얼굴이나 보러 간다고 옥사로 갔고,
며느리는 혹시 살아날 길이 있는지 알아본다며 양주(良州) 관아에서 하리(下吏) 일을 보는
저희 백부를 만나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당장 가서 그 현령 놈을 칼로 찔러 죽여 버립시다, 형님!”
문왕이 대뜸 소리쳤다.
그는 영감이 처음 말을 꺼낼 때만 해도 군역을 뺀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시큰둥했으나
영감의 입에서 자식 셋을 잃었다는 소리가 나온 뒤로 태도가 돌변했다.
문왕의 철없는 소리에 법민도 웃고 질허도 웃었다.
“왜 웃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 제 나라 백성을 괴롭히는 탐리(貪吏)와 오리(汚吏)라고 아버지가
분명히 말씀하셨단 말이오!”
성질 급한 문왕이 억울하다는 듯이 법민과 질허를 번갈아 바라보는데,
영감이 문왕의 말에서 무슨 감을 잡았는지,
“혹시 내 아들놈을 살려줄 수 있습니까? 어디서 오시는 무얼 하시는 분들이오?”
하며 비로소 정체를 묻고 나왔다.
춘추와 유신은 뒷전에서 꽤나 오랫동안 기다려도 일행이 돌아오지 않으니 무슨 사정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한참 만에 문왕이 웬 늙은이 한 사람을 데리고 나타나서,
“저 노인을 따라가면 하룻밤 묵을 데가 있을 겁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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