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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장 전란 7

오늘의 쉼터 2014. 11. 10. 11:26

제28장 전란 7

 

 

 

아버지에게 불려온 법민이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자 춘추가 온화한 말로 입을 열었다.

“나는 내일 계림의 천년 사직을 등에 업고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떠난다.

어떻게든 이런 날이 오지 않기를 하늘에 빌고 또 빌었지만 시운이 나쁠 때의 일이란

제발 피하고 싶은 쪽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내 지난날을 돌아보면 꼭 지금 네 나이에 처음 중국에 건너가서 보고 배운 바가

일생에 유용하였을 뿐 아니라 그때 장안에서 사귄 사람들이 모두 벗바리가 되어 개인사는 물론

나랏일을 보는 데도 크게 보탬이 되었다.

당주도 네 나이에 만난 사람이요,

지금 당조의 중신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항차 장안에는 국학(國學)이 서고 학문이 넘쳐나서 연일 수많은 천하의 기재들이 모여든다고 하니

너도 이 기회에 나를 따라 장안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버지가 아는 사람들을 소개받으면 필경 네게도 유익할 것이다.”

“한동안 숙위(宿衛)하라는 말씀인지요?”

법민이 공손하게 물었다.

“오냐.”

“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법민은 먼저 그렇게 대답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숙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기왕이면 동생 한둘을 더 데리고 가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특별한 뜻이 있느냐?”

그러자 법민은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그만두고,

“아닙니다. 그냥 저 혼자 장안에서 지내기가 심심할 것 같아서 그럽니다.”

하며 웃었다. 춘추가 살펴보니 법민에게 무슨 뜻이 있는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다른 아들들에게도 금성보다 크고 넓은 세상을 보여줘 해될 것이 없었으므로,

“그럼 인문이도 데려가자꾸나.”

하니 법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버지와 제가 없는 집에 인문이마저 없다면 어머니가 어려울 것입니다.

문왕을 데려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춘추는 평소 법민의 생각이 깊은 줄은 알았지만 또 한번 기특한 느낌이 들어서,

“오냐. 네 뜻대로 하자.”

하고 웃으며 허락하였다.

이튿날 춘추는 품주대사(稟主大舍)인 한질허(邯帙許)와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금성을 출발했다.

사신의 행렬이 압량주 경계에 접어들자 법민이 춘추를 보고,

“여기까지 와서 큰 외숙을 뵙고 가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런데 춘추가 미처 무슨 대답도 하기 전에 말을 탄 사람 하나가 급하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망건 위로 허름한 명주 복두를 쓰고 검은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그는 방금 전에

법민이 말한 김유신이었다.

유신은 마상에서 고삐를 그러쥐고 빨리 가자 재촉하는데 기굴한 덩치를 이기지 못한 말이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엉덩이를 뱌비작거리며 뒤뚱뒤뚱 걸어오는 모습이 여간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말이 아니라 꼭 나귀를 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저놈의 말이 주인을 잘 섬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저러다 큰 낭패를 보겠구나!”

춘추가 유신을 태운 채 낑낑대는 말을 보고 걱정스럽게 혀를 찼다.

그 말은 전날 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얻어온 과하마 두 마리 가운데 하나였다.

“좀 전에야 기별을 받았습니다. 또 장안을 가신다고요?”

김유신은 외직에 있었기 때문에 금성의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청병을 하러 가긴 합니다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춘추가 그다지 밝지 않은 얼굴로 대답한 뒤,

“뭣들 하니? 어서 인사를 올려라.”

하고 두 아들에게 말하니 법민과 문왕이 대뜸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유신이 웃으며,
“내 조카들이 다 컸네. 아버지를 배웅하러들 가시는가?”

하고 묻자 법민이 배에 양손을 모은 채로,

“저희는 아버지를 모시고 장안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한동안 묵을 생각입니다.

당분간 큰 외숙의 존안을 뵙지 못하게 됐으니 저희가 돌아올 때까지 부디 강녕하십시오.”

하고 설명 겸 인사를 했다.

유신이 그 말을 듣고 춘추를 돌아보자 춘추가 웃으며,

“나도 이제 천천히 후사를 준비해야지요.”

하고서,

“장군이 출병할 때마다 가슴 졸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원군을 청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으로 갑니다.

돌아올 때까지 몸조심하십시오.”

하고 당부했다. 그러자 유신이 사신의 행렬을 재촉하고는,

“같이 가십시다. 압량주가 끝나는 데까지는 제가 모시지요.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긴한 얘기를 나눌 수 있겠소.”

하며 춘추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였다.

세상에는 비록 둘도 없는 사이라고 알려졌지만 오랫동안 얼굴조차 보지 못했던 유신과 춘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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