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전란 6
백제는 이 싸움에서 3천 군사를 모두 잃었다.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오직 의직 하나가 있었을 뿐이었다.
김유신은 싸움이 끝나자 비녕자와 거진, 합절의 시체를 거두어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고
크게 슬퍼했다.
개선 군이 돌아와 이 사실을 고하니 임금 또한 눈물을 흘리며 세 충신의 시신을 예를 갖춰
고향인 반지산(反知山)에 합장토록 하고, 나머지 식솔들과 구족(九族)에게도 은상(恩賞)을
후하게 주어 걱정 없이 살도록 배려하였다.
한편 단기(單騎)로 사비에 돌아간 의직은 이듬해인 무신년(648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서변을 공격했다.
임금이나 다른 장수들은 모두 병가지상사를 거론하며 의직이 패한 것을 문제 삼지 않았으나
패장의 수모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이는 바로 의직 당자였다.
그는 겨우내 성주산 군영에 나가 나무와 천막으로 바람막이를 만들고 생쌀을 씹어 먹으며
군사들을 매섭게 훈련시켰다.
부하들은 물론 조정 중신들과 심지어 임금의 입에서까지 독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의자는 의직의 벗인 달솔 자견(自堅)과 정중(正仲)에게 양식과 고기를 주어 성주산 병영으로 보내고
의직과 군사들을 위로하게 하니 의직이 찾아온 벗들에게 말하기를,
“성은이 하해와 같으나 그 하사품은 당분간 자네들이 좀 맡아주시게.
신라를 쳐서 이기고 김유신의 목을 베어 와서야 먹겠네.”
하였다.
자견과 정중은 모두 팔성 출신의 장수로 의직과는 동문수학한 사이여서 그가 한번 독기를 품으면
얼마나 매서운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임금의 뜻 또한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의 마음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장수와 군사들도 먹여야 힘을 쓸 게 아닌가?
저들도 사람일세.
나라 살림이 풍족해진 뒤로 겨울에 집집마다 고깃국 안 끓이는 데가 드문데 맨밥에 마른 찬으로
무슨 기운을 쓰겠는가? 너무 그럼 군사들한테 불만이 쌓여 일이 어려울 수 있다네.”
자견의 충고에 정중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군사들도 군사들이지만 자네 얼굴을 한번 보아.
그게 어디 사람의 형상이던가?
자칫하다간 출병도 하기 전에 송장부터 치겠네.”
하지만 의직의 결심은 단호했다.
“천막에서 자는 잠은 부차(夫差:오나라 왕)가 섶나무 위에서 잤던 잠보다 달고,
생쌀을 씹는 것은 구천(句踐:월나라 왕)이 쓸개를 핥은 것에 미치지 못하네.
나는 오히려 너무 편하게 지내는 게 아닐까 걱정이니 과히 심려치 말게나.
지금 기름진 음식을 먹이면 여태까지 고생한 바가 모두 물거품이 되네.”
의자는 자견과 정중으로부터 의직의 말을 전해 듣고 또다시 혀를 찼다.
“위사좌평이 기어코 일을 내려는 모양이다. 어디 한번 지켜보자꾸나.”
그렇게 서너 달을 절치부심(切齒腐心)한 의직은 3월이 되자 마침내 군사를 일으켰다.
감물성의 패배가 너무 뼈아팠던 탓일까.
이번에 그는 1만이나 되는 군사를 거느리고 성충이 이미 얻은 우술 군으로 나와 소비포를 건너
요거성(腰車城:상주)을 쳤는데, 그 전술이 얼마나 치밀하고 용병이 재빨랐는지
신라의 향군들은 손도 미처 써보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요거 성을 얻은 의직은 군사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붙여 자성 10여 개를 공취하는 개가를 올렸다.
만족한 성과를 거둔 의직은 슬슬 장난기가 발동했다.
4월이 되자 그는 휘하의 군사 가운데 날쌘 자만을 뽑아 데리고 야음을 틈타 신라의 옥문곡(玉門谷)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신라의 강역을 한껏 유린하여 내란을 치른 적국의 민심을 다시 어지럽히고,
여주와 그의 허약한 조정을 교란시키는 데 있었다.
신라에서는 급히 김유신을 옥문곡으로 파견해 가까스로 의직을 물리치긴 했지만 이미 빼앗길 것은
죄다 빼앗긴 뒤였다.
그로 말미암아 신라는 또 한번 크게 흔들렸다.
의직에게 요거성 등 10여 성을 뺏긴 직후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절박감이
신라 조정을 압도했다.
임금과 중신들은 연일 편전에 모여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는데,
각간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부득불 당나라의 힘을 빌려오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전날에는 당의 흑심을 경계하여 반대하던 이들도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당을 경계하기에 앞서 먼저 백제에 잡아먹힐 판이니
당장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보는 것이 순서였다.
여기에 당주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문도 일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기왕 당의 조력을 구할 양이면 이세민이 살았을 때 하는 것이 여러 모로 훨씬 유리했다.
조정 공론이 드물게 하나로 모아지자 다음엔 사신으로 누구를 보내느냐는 의논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굳이 긴 의논이 없이도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그처럼 중대한 일을 당주와 무릎을 맞대고 의논할 적임자로는 단 한 사람,
예나 지금이나 오직 김춘추가 있었을 뿐이었다.
축건 백이 수품이 나이가 많아 물러난 뒤로 품주대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김춘추는
사신이 되어 떠나기 전날 밤,
자신의 아들 가운데 장남인 법민을 불렀다.
큰누이 고타소가 시집갈 때만 해도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아 애를 먹이던 법민이 어느새 스물하나,
어엿하고 건장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