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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장 전란 5

오늘의 쉼터 2014. 11. 9. 19:03

제28장 전란 5

 

 

 

그에겐 돌아 나올 길이 없었으니 뒤를 돌아볼 이유도 없었고, 혼자 싸우기로 작정한 마당이니

옆을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백제 군사 몇 명이 비녕자에게 달려들어 제법 거세게 호통을 치며 창날을 막아보았으나

비녕자는 젊어서부터 수십 년간 써온 창을 익숙하게 놀리며 가로막는 적군을 무참히 베고 찔렀다.

비녕자의 주위로 백제군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햇무리처럼 갈라졌다.

“저 자가 혹시 김유신인가?”

의직은 홀로 맹위를 떨치며 진중을 어지럽히는 비녕자를 보고 탄복한 얼굴로 좌우에 물었다.

“편장의 옷을 입고 창을 든 걸로 봐서 김유신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다면 뭘 잘못 처먹고 나온 놈이구나. 내가 상대하겠다.”

의직은 칼을 고쳐 잡고 쏜살같이 비녕자에게 달려갔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한데 어울려 기예를 겨루기 시작했다.

비녕자는 상대의 옷을 보고 의직임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그는 적장이 자신을 상대하려고 달려온 것이 여간 반갑지 않았다.

만일 적장만 베어 넘길 수 있다면 신라군의 사기가 불같이 되살아날 것은 필지의 일이었다.

흥분한 비녕자의 손에 갑자기 땀이 채였다.

그는 창칼이 잠시 떨어진 틈에서 적장의 빈곳을 엿보고 급히 창 자루를 짧게 쥐었다.

이어 우레 같은 기합소리와 함께 사력을 다해 창대에 힘을 싣고 허를 찔렀다.

“어림없다, 이놈!”

그러나 욕심이 너무 과했던 탓일까.

의직의 빈곳은 그가 즐겨 쓰던 마상 검술의 한 묘수였다.

의직은 일부러 허를 만들고 이를 공격하는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녕자의 창끝이 허를 파고드는 순간 이미 의직의 허리는 뒤로 꺾였고

이어 칼날이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비녕자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피를 뿜으며 땅에 떨어진 것은 투구를 쓴 비녕자의 머리였다.

백제 진중에서 뜨거운 함성이 일어났다.

성루 위에서 숨을 죽이며 지켜보던 신라군 가운데 비녕자의 아들 거진이 있었다.

거진은 손에 땀을 쥐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버지가 부디 이기고 돌아오기를 하늘에 빌고 또 빌었는데, 한순간 승패가 갈리고 아버지의 머리가 땅에 나뒹굴자 분연히 일어나 손에 칼을 잡았다.

“도련님!”

그런 거진을 합절이 황급히 붙잡았다.

“대인께서 출장에 앞서 이 합절에게 특별히 당부한 말씀이 있습니다요!”

“무슨 말씀을 남기셨느냐?”

합절은 비녕자가 한 말을 고스란히 거진에게 옮겼다.

그러자 거진은 대꾸도 하지 않고 말에 올라탔다.

합절이 그런 거진의 다리를 양손으로 우악스레 붙잡고 눈물을 뿌리며 애원했다.

“아들로서 아버지의 명을 저버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은 불효입니다.

제발 참으십시오!”

“놓아라, 이놈!”

“도련님!”

“아버지가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고도 참으란 게냐?

세상에 그런 자식이 어디 있느냐?

너는 그것이 효라고 생각하느냐?”

그래도 합절이 다리를 놓아주지 않자

거진은 칼로 합절의 팔을 내리치고 쏜살같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비녕자가 죽은 자리로 달려갔다.

하지만 거진은 아직 스무 살이 채 안 된 소년이었고 무예도 그다지 신통하지 않았다.

백제군은 고양이가 쥐새끼를 어루듯이 거진을 이리저리 가지고 놀다가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몸을 동강내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엔 합절이 말에 올랐다.

“하늘이 무너졌는데 낸들 살아서 무엇하겠소!”

그는 만류하는 군사들에게 말했다.

이미 팔 하나가 잘렸음에도 성한 손에 무기를 쥔 채 달려나가서 주인 부자를 따라 장렬하게 전사하니

이를 지켜본 신라군들은 마침내 이를 갈고 눈에 불을 켰다.

“어린아이도 잔인하게 죽이는 백제군이다!”

“팔을 잃고도 주인을 따라간 합절을 보라! 성한 우리가 무엇을 겁낸단 말이냐?”

“우리 자식이 왔어도 저 꼴을 당했을 게 아닌가?

의로운 부자의 원수는 우리가 갚자!”

세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신라군의 사기는 일순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성루에선 군사들을 충동하는 북소리가 힘차게 울려댔다.

성문이 열리자 신라군은 함성을 지르며 차례를 다투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지못해 떠밀려 나가던 어제의 군사들이 결코 아니었다.

비분강개하기로는 김유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두에 서서 직접 말을 몰며 백제군을 향해 돌진했다.

백제군이라고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양측 군사가 한 덩이가 되어 벌이는 사투는 해가 중천에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비명이 난무하고 피비린내가 천지에 가득 찼다.

그러나 기세를 회복한 신라군에게 백제 군사 3천은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한낮을 지나면서 이미 세력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한번 밀리기 시작하자 의직의 맹졸들은 급격히 기운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 사람이 두셋을 상대해야 하는 백제군으로선 시간이 갈수록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가 죽으면 옆에 있던 사람은 당연히 대여섯을 상대해야 했다.

적은 숫자로 많은 군사를 상대할 경우엔 한쪽이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마련이었다.

“퇴각하라! 무산 성으로 퇴각하라!”

위기를 느낀 의직은 남은 군사를 불러들였지만 그마저도 일은 쉽지 않았다.

이미 김유신이 퇴로를 막아선 채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적의 숫자를 감안하지 않고 군사를 한곳으로 모은 것이 큰 실수였다.

며칠간 교전에서 승리를 확신했던 의직은 갑자기 사정이 돌변해 패색이 짙어지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급기야 부하들을 챙길 겨를도 없이 혼자 도망가던 그는 협곡의 소로에서 김문영의 군사를 만났으나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무산성을 포기하고 대야성 쪽으로 길을 바꾸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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