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전란 4
그날 밤이었다.
병부에서 중당의 장수로 따라 나온 비녕자(丕寧子)가 몰래 유신의 군막을 찾아왔다.
금관국 사간의 장손으로 젊어서부터 용화향도를 따라다닌 비녕자는 이때 나이가 쉰이 넘은
중늙은이였다.
“형이 밤중에 어인 일이시오?”
유신은 갑옷을 벗어놓고 평복 차림으로 누웠다가 가물거리는 등촉의 심지를 돋우며 일어나 앉았다.
비녕자가 7척이나 되는 큰 키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군막 안으로 들어섰다.
“심란하실 장군을 생각해 술이나 한잔 나눌까 하고 왔습니다.”
유신은 자신보다 두 살이 많은 비녕자를 사사로운 장소에선 언제나 깍듯이 예우했다.
“허허, 이심전심이구려. 나도 마침 술 생각이 간절해 머리로 그림을 그리던 중입니다.”
유신은 군막 밖에 연통하여 주안상을 들이도록 지시했다.
조촐한 안주로 두어 차례 술잔이 오가고 났을 때 비녕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일생을 사는 동안 가장 자랑스러웠던 일을 한 가지만 말하라면 젊어서부터 장군의 낭도로
풍류황권에 이름을 남긴 일이오.
지금도 눈을 감으면 1년 3백날을 아무 걱정 없이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놀던 그때가 어제 일처럼
선히 밟힙니다.
눌최(訥催)가 풀피리를 불면 해론(奚論)이 그놈의 잔나비 춤은 얼마나 신명나게 잘 추었고,
죽죽(竹竹)이는 또 가야국의 사설 가락들을 얼마나 구성지게 잘 뽑았소?
우리가 여름날 5악 계곡에서 놀이판을 벌이면 유람 온 다른 낭도나 젊은 여인네들이 구경을 하고는
아주 사족을 못 썼지요.
혈기야 그렇게 다스렸으면 삼한이 생기고는 제일이었을 게라.
무예면 무예, 풍류면 풍류, 누가 우리를 따라왔습니까?
오죽했으면 북악(태백산)에서 만난 사다함의 낭도 영감 하나가 우리 노는 것을 보고
천하에 너희만한 무리가 없다며 향도(香徒)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소?
그 얘기는 지금 아이들이 들어도 모다 부러워할 게요.”
비녕자가 새삼스레 옛일을 거론하자 유신도 덩달아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형도 삼현삼죽(三絃三竹)과 북소리에 맞춰 죽마(竹馬) 타고 추는 칼춤이 대단했지.
실직주(悉直州:삼척)의 젊은 색시가 그 춤에 녹아 만노군(萬駑郡:진천)까지 따라오지 않았소?”
“그 색시 바람에 도망을 얼마나 다녔는지 몰라.
인물이 조금만 잘났어도 뒤가 좋았을 텐데.”
“그러게나 말씀이오.”
술 한 잔을 더 마신 비녕자가 돌연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제 마침내 내 차례가 온 모양이오.”
“차례가 오다니요?”
“송백(松柏)의 차례 말씀입니다.”
비녕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제야 유신은 비녕자가 찾아온 까닭을 알아차렸다.
“장군이 아실까 모르지만 내 자식이 여기에 같이 왔소.
평소 그놈한테 해론과 눌최, 죽죽이 얘기를 자랑삼아 얼마나 떠벌렸는데
이제 드디어 아비의 용맹을 보여줄 때가 된 셈이지요.”
유신은 무거운 얼굴로 비녕자의 빈 잔에 술을 쳤다.
“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후회도 여한도 없소.
망국의 후예로 중당의 당주까지 된 것은 오로지 장군의 덕이외다.
김유신을 만나 일생을 장부답게 살았으니 이제 그 은혜를 보답할 때가 되었지.
훗날 음부(陰府:저승)에 세상이 또 있어 거기서 만나거든
먼저 간 벗들을 다 모아놓고 음부 대왕이 놀라도록 다시 신명나게 놀아봅시다.”
비녕자가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환하게 웃었다.
순간 유신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그는 말없이 비녕자의 손을 붙잡고 몇 차례나 손등을 어루만지며 아쉬워하다가,
“오늘의 일이 다급하니 형님을 붙잡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다시금 주르르 눈물을 쏟으니 비녕자도 웃는 낯에 눈물을 글썽이며,
“한겨울이 아니고야 송백이 푸른 것을 어찌 알 것이며,
강적을 만나지 않고 어찌 세상에 이름을 남기겠소?
나를 믿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오.
화랑께서는 부디 서역을 정벌하여 우리 낭도들의 뒤를 아름답게 만들어주시오.”
하고 일어나서 생전에 마지막 예로 절을 하였다.
김유신은 비녕자를 군막 밖에까지 배웅한 뒤 돌아오자
입술을 깨물며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기필코 백제를 멸할 것이다!
천지신명에게 거듭 맹세하거니와 반드시 백제를 멸하여 그 사직을 땅에 묻을 것이다!”
이튿날 출정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자
비녕자는 자신을 따라온 종 합절(合節)을 가만히 불러 말했다.
“나는 오늘 국가를 위하고 또한 오랜 벗을 위하여 죽을 것이다.
그런데 거진(擧眞)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뜻이 장렬하여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면
반드시 따라 죽으려고 할 것이다.
만일 부자가 함께 죽는다면 남은 식솔들은 장차 누구를 의지하고 험한 세상을 살겠느냐?
너는 거진을 말렸다가 대장군이 적을 쓸어버린 뒤에 내 해골을 거두어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 어미의 마음을 잘 위로하도록 해라.”
종에게 당부를 마친 비녕자는 곧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그날 양측의 교전에서 단연 눈에 띈 사람은 비녕자였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그는 마상에서 춤을 추듯 창을 현란하게 휘두르며 적진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