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8장 전란 2

오늘의 쉼터 2014. 11. 9. 18:39

제28장 전란 2

 

 

 

조공사가 다녀간 직후 당은 설만철(薛萬徹)과 배행방(裴行方)을 장수로 삼아 내주에서 전함을 내어

요동을 쳤는데 노략질에 동원된 군사가 무릇 3만 명이나 되었다.

또 4월에는 고신감(古神感)이 역시 바다를 건너와 역산(易山)에서 고구려 군사와 싸우고 돌아갔다.

여러 차례의 노략질로 요동이 어느 정도 황폐해졌다고 판단한 이세민은 드디어 중신들을 불러 모으고

이렇게 물었다.

“이제 명년쯤에 30만 군사를 다시 일으키면 단숨에 고구려를 격멸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대신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그때부터 고구려 정벌에 관한 당조의 논의가 다시금 불붙기 시작했다.

한동안의 격론을 거쳐 나온 방안은 전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식량을 확보하고 수군을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대군으로 동쪽을 정벌하려면 모름지기 한 해를 거뜬히 지낼 만한 양곡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짐승과 수레로 이를 운반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마땅히 배를 만들어 바다로 옮겨야 합니다.”

“수나라 말엽에 검남(劍南:중국 서남쪽 사천성)에만 유독 도둑이 없었고,

그곳은 요동의 전역(戰役)에 동원된 적도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많고 모두 부유합니다.

검남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 배를 만드십시오.”

이세민은 중신들의 의견을 좇기로 하고 좌령좌우부장사(左領左右府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로

파견해 나무를 베어 군함을 만들도록 지시하는 한편 따로 사자를 수로(水路)로 보내

무협(巫峽)에서부터 강주(江州)와 양주(楊州)를 거치며 장병들을 징발해 내주(萊州)로 향하게 하였다.

또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는 따로 조서를 내려 전국에서 도착하는 양곡과 병기를

오호도(烏胡島:요동반도 남단의 섬)로 옮겨 쌓아두게 하고 장차 대거(大擧)하여 고구려를 칠 때는

차질 없이 물자를 공급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을사년에 이어 또 한 번의 대전(大戰)이 시작될 판이었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국경이 연일 전란으로 어지러운 사이에 신라와 백제 간에도

여러 차례 피 튀는 접전이 벌어졌다.

먼저 싸움을 건 쪽은 백제였다.

백제 장군 의직은 여러 모로 성충과 대비되는 인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선왕에게 발탁되어 태자의 신하가 되긴 했지만 의직은 나라에서 주관하는

무관 시험을 쳐서 당당히 최고의 점수로 합격한 사람이요,

성충은 주위의 평판과 명성으로 입조한 사람이었다.

의직은 팔족 명문가 출신의 장수였으나 성충은 왕족이었고,

의직은 나라 안에서 학문을 익히고 무예를 닦았지만 성충은 일찍부터 당에 유학한 선비였다.

이런 점들에 대한 의직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특히 선왕이 친견한 무관 시험에서 발탁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 자신은 벼슬을

대궐 앞문에서 받았는데 더러 뒷문에서 받은 사람도 있다는 말로 성충을 빈정대곤 했다.

그럼에도 태자가 즉위한 뒤 성충은 상좌평이 되고 자신은 그 아래에 처하니

만인이 새파란 나이에 좌평직에 오른 것을 부러워하였어도 의직은 오히려 불만이 컸다.

그는 임금에게 미움을 받던 성충이 군사 3천 명을 데려가서 우술군의 일곱 성을 빼앗아온 뒤로

다시 임금의 신망을 얻게 되자 자신도 3천 명의 군사로 대공을 세워보겠다며 입버릇처럼 말했다.

“신라를 망하게 하는 방법을 비로소 깨달았다!”

우술 군을 뺏고 난 뒤 신라에서 정변과 내란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린 의자는 만조의 백관들 앞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다.

“신라에서 내란이 일어난 것은 모두 우리 상좌평의 공이다.

우리 상좌평이 우술 군을 뺏고 나자 신라가 이내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졌으니

이는 기둥을 쳐서 들보를 무너뜨린 것이며, 돌멩이 하나로 풍랑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고 보면 힘들게 지략을 짜내고 대군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기회를 봐서 간간이 변죽만 울려주면 신라는 저절로 궤멸할 것이 틀림없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의직이 자신에게도 기회를 주면 적성을 공취해

또 한번 신라를 흔들어보겠다고 나섰다.

의자는 의직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파안대소했다.
“상좌평이 공을 세우니 위사좌평이 셈이 난 게요?”

“그러하옵니다. 신에게도 오직 3천 군사만 내어주십시오.”

의직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의자가 이를 마다할 리 없었다.

“좋소. 위사좌평인들 어찌 상좌평과 같은 공을 세우지 못하겠소?

신라는 이제 막 임금이 바뀌었는데 신왕 또한 여자라고 하니

그런 나라가 천하 고금에 또 있을지 모르겠소.

이럴 때 장군이 가서 매섭게 본때를 보여주면 그 여자 임금인들 며칠을 가겠소.”

의자는 쾌히 군사를 내어주며 반드시 이기고 돌아올 것을 당부했다.

정미년(647년) 10월, 의직은 자신의 휘하에 배속된 3만 군사 가운데 맹졸 3천 기를 뽑아 이끌고

무산성(茂山城:무주) 동남 변으로 가서 신라의 감물성(甘勿城:밀양 서북)과 동잠성(桐岑城)을

공격해 싸우러 나온 부산현(夫山縣:진해) 현령 조미압(租未押) 등을 사로잡았다.

신라에서는 급히 김유신을 보내 군사 1만 명으로 이를 막게 했지만 기세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나서

세 갑절이나 많은 군사로도 오히려 맞서는 곳마다 크게 밀렸다.

싸움은 혼자 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김유신이라지만 1만이나 되는 군사로 3천 명에게 밀리자 열세를 회복할 방법이 없었다.

또 한 차례 내란을 겪고 난 신라군의 사기는 애당초 싸움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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