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전란 1
삼국의 어지러움은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신라에서 승만이 보위에 오른 그해,
당나라에서는 다시 요동 정벌의 논의가 있었다.
찬반양론이 비등한 가운데 혹자가 말하기를,
“고구려는 산에 의지해 성을 만들었으므로 쉽게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앞서 황제께서 친정하셨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싸우느라 농사를 짓지 못했고,
우리가 함락시킨 몇몇 성은 오랫동안 비축해둔 곡식을 모두 빼앗겨 성고(城庫)가 비었는데
그 뒤로 요동에선 한재(旱災)가 계속되어 태반의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전갈이올시다.
이때 만일 소부대(小部隊)를 파견해 그곳을 교대로 짓밟고 피곤하게 만든다면 백성들은 쟁기를 버리고
성안으로 숨어버릴 것이며, 이런 일을 수년간 계속하면 요동 천리는 황무지가 되고 민심 또한 저절로
황폐해질 것입니다.
압록수 북쪽을 싸우지 않고도 취할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였다.
이를테면 소규모의 군사를 내어 요동 전역의 농사를 망쳐놓고 굶주린 백성들이 고통에 못 이겨
흩어지고 나면 손쉽게 이를 취하자는 것이었다.
식량 때문에 곤란을 겪은 그들로선 으레 나올 법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전략이었으나
언필칭 천자를 자처하고 천지 만물을 교화와 덕으로 어루만진다는 황제의 대업(大業)으로는
지나치게 잔인하고 치졸한 술수가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몇 달을 모질게 앓고 일어나서 한쪽 눈의 시력마저 잃어버린 이세민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다시 요동으로 군사를 내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손이랑(孫貳朗)을 부총관으로 삼은 뒤
맹군 3천여 기를 주어 영주(營州:요녕성 조양)로 파견했다.
이적과 손이랑은 영주에 와서 영주도독부의 군사들과 합류했다.
영주도독 장검은 수전(水戰)에 능한 자들을 선발대로 뽑아 이적과 손 이랑의 군사들과 함께
신성 쪽에서 배를 이용해 요하를 건넜다.
요동에 도착한 당군들은 닥치는 대로 민가를 습격하고 백성들을 해치기 시작했다.
불시에 습격을 받은 고구려 사람들은 황급히 성안으로 도망가 성문을 닫아걸고 싸웠지만
어차피 목적이 백성들의 살림을 무참히 파괴하는 데 있던 당군들이었다.
이들은 말을 타고 여러 패로 무리를 나눠 분주히 요동 벌을 싸돌아다니며 들에 곡식을 짓밟고,
농부를 베고, 한꺼번에 달려들어 여자들을 겁탈했다.
싸우기 힘든 모성(母城)은 제쳐두고 치기 쉬운 자성의 나곽(羅郭)들은 보이는 족족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전소한 성곽은 남소성(南蘇城)을 포함해 여러 수십 개였다.
급보를 접한 모성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싸우려고 달려오면 당군들은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 다른 마을을 짓밟았다.
7월이 되자 이세민은 다시 좌무위장군 우진달(牛進達)과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에게
1만 군사를 주었다.
이들은 이적과는 달리 내주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요동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목적은 마찬가지였다.
1만이나 되는 군사들이 산지사방으로 돌아다니며 1백여 차례나 마을을 짓밟으니
그들의 비행과 만행에 목숨을 잃은 백성들이 무릇 3천 명이나 되었다.
한껏 재미를 본 이세민은 겨울이 되자
송주자사 왕파리(王波利)에게 칙령을 내려 강남의 12주에서 공인(工人)을 징발해
대선(大船) 수백 척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세민의 몰락이 머지않았다.
덕(德)과 교(敎)를 내세우며 우쭐거리더니 드디어 현무문의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쇠도 수명이 다하면 녹슬고 범도 죽을 때가 되면 썩은 고기를 탐하는 법이다.
어찌 일국의 임금이라는 자가 관복을 입고 녹읍을 받는 관리와 장수들로 하여금
시정잡배보다 더한 도적질과 노략질을 일삼도록 시킨단 말인가!”
연개소문은 최소한의 도의마저 잃은 당군의 횡포에 치를 떨며 분개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나 성읍을 짓밟고 사라지는 적의 졸렬한 기습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생각다 못한 그는 임금의 족친 한 사람을 구해 급히 막리지로 삼고 장안에 들어가 용서를 빌도록 했다.
“잘못을 저지른 쪽은 저쪽입니다. 당한 우리가 무엇을 사죄한단 말씀이오?”
대신들은 물론 임금조차도 반대했지만 개소문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한 보장왕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는 요동의 우리 백성들을 환난에서 구하기 위한 고육책입니다.
지난날 요수 강변에서 당의 잔병들을 쓸어버리지 않은 것이나
이제 사죄 사를 보내고 신년이 되면 끊겼던 조공을 다시 하려는 것이 모두 한 가지 이유입니다.
신은 우리 백성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나이다.”
개소문은 사죄하는 글월을 자신의 이름으로 쓰고 임무(高任武)라는 왕족도 자신이 직접 구했다.
임무는 아직 열 살 안팎의 소년이었는데 보장왕의 먼 친척이었다.
“사죄사가 왜 하필 어린아이입니까?”
“두 가지 이유입니다.”
임금이 묻자 개소문이 정색을 했다.
“천진무구한 소년을 보내 이세민의 잔인한 행동을 점잖게 꾸짖어보려는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개소문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각 있는 어른을 보내 더 이상 그와 무슨 말을 하겠나이까?”
임무가 사죄사로 떠난 것이 정미년(647년) 연말인데 무신년(648년) 정초,
개소문은 한동안 끊어졌던 조공사마저 다시 장안으로 보내며 이세민을 달래려고 애썼다.
그렇게 해서라도 위신을 좀 세워주면 사정이 달라질 줄 알았지만
이세민은 사죄사의 사죄와 조공사의 조공을 모두 받아들이고도 노략질을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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