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7장 안시성 30

오늘의 쉼터 2014. 11. 9. 16:05

제27장 안시성 30

 

 

 

그런데 며칠 뒤 말에 물린 사람이 끝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궁의 마정(馬政)을 맡은 관리가 승부(乘府) 어관(馭官)에게 품의하여 참형에 처하라는 하명을 받았다. 살주마(殺主馬)를 참(斬)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관리가 형관을 통해 살수(殺手) 둘을 얻어 데리고 말 묶인 곳으로 가는 길에 마침 삼도대감 천존을

만났다.

천존이 칼 든 망나니를 보고는,

“누구를 참하는가?”

하고 물으니 한동안 말 때문에 착실히 골머리를 썩인 관리가,

“그놈의 말, 오늘에야 저도 편하고 나도 편하게 생겼습니다.

굳이 죽이지 않아도 꼴을 보면 저녁에 죽을지 내일 아침에 죽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법이 어디 그렇습니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저리를 떨고는,

“죽은 사람 식구들이 고기를 얻어가려고 기다리는 중인데 원체 피골이 상접해

 뼈 추려내면 몇 근이나 나올지 의문입니다. 나리께서도 맛이나 보시렵니까?”

하고 되물었다.

천존이 그제야 필탄의 애마 얘기인 줄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가세. 내가 말을 한번 봐야겠네.”

천존이 관리를 앞세우고 말 묶인 곳에 이르니 말이 아니라

무슨 장작더미를 덮어씌운 헝겊 무더기 같은 것이 땅에 대가리를 누인 채 죽은 듯이

흉물스럽게 웅크리고 있는데, 구렁이처럼 꿈틀대던 쪽빛 갈기에는 버짐이 올라

듬성듬성 털이 빠졌고 반짝반짝 윤이 나던 푸른 가죽도 곰팡이 슨 군막처럼

거무튀튀하게 변해 이 말이 정녕 그 말인가 싶었다.

필탄이 잘났다고 자랑하던 이마의 흰 털도 절반은 빠지고 나머지 절반도 볕에 바랜 삼베처럼

누렇게 변해 있었다.

거기다 벌써 살점이 썩어가는지 나무토막 같은 앙상한 몸에서 코도 들이밀지 못할 만큼

심한 악취가 났다.

“저놈이 아직도 포악을 떠는가?”

천존이 묻자 관리가 손사래를 쳤다.

“웬걸입쇼. 사람으로 치자면 벌써 맥도 놓고 말문도 닫고 숨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형국이올시다.

눈만 살았습지요.”

관리의 말을 듣고 천존이 엎드린 찬간자에게 다가가니 웅크리고 누운 녀석이 눈알을 굴리며

쳐다보는데 그 눈빛이 참혹한 꼬락서니와는 달리 제법 똑똑하고 생기가 있었다.

“네가 나를 알아보겠느냐?”

천존이 대가리의 흰털 빠져나간 곳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을 걸자 녀석이 꼬리를 훌렁 뒤척였다.

“네 마음이 내 마음이다.

이놈아, 그날 너도 봐서 알겠지만 내가 어디 네 주인을 해치려고 그랬더냐?

하늘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나는 어떻게든 너희 주인을 살리려고 애를 썼다.

내 어깨에 난 상처를 좀 봐라.”

천존은 마치 사람에게 하듯 자신의 어깨에 난 상처를 말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성질 급한 네 주인이 당최 내 말을 들으려고나 했더냐?

너는 주인을 잃었지만 나는 벗을 잃었다.

여물을 먹지 않는 네 마음이 만인의 칭찬을 얻고도 줄곧 더부룩한 내 속이 아니겠느냐?”

그러자 녀석의 꼬리가 또 한차례 훌렁 춤을 추었다.

“주인을 따라 저승까지 가고 싶은 게로구나.”

천존이 고개를 숙이고 녀석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저승에 가서 주인을 태우고 만리장천을 휘돌고 싶은 게지?”

맥없이 끔벅거리던 녀석의 눈가가 조금씩 젖기 시작하더니

미간의 패인 골을 따라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천존의 눈가에도 물기가 맺혔다.

“왜 아니 그렇겠느냐.

그러나 너마저 이렇게 가고 나면 내 심정은 누가 또 알아줄 것이냐?”

천존의 탄식이 깊어지자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그리곤 주둥이를 천존의 품안에 밀어넣고 다독거리는 시늉까지 하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리와 망나니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혀를 빼물었다.

천존이 그런 녀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는 목을 감싸안고 갈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혹시 마음을 바꿔 나를 새 주인으로 섬기면 안 되겠느냐?

그럴 뜻이 있거든 일어나 여물부터 먹어라.

네가 나를 태우고 먼저 간 네 주인의 몫까지 대신해 나라에 큰 공을 세운다면

필경 저승의 네 주인도 기뻐할 것이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필탄이 죽던 그날부터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포악을 떨다가 사람까지 물어 죽인 녀석이

별안간 구부렸던 다리를 세우고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여물통에 주둥이를 가져가는 것이었다.

“나리, 저놈이 나리 말씀을 죄다 알아듣는 모양입니다요!”

관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천존은 주머니를 털어 관리에게 돈을 주며,

“죽은 사람 식솔들에게는 이걸로 대신 말고기를 사라고 하게. 이제 저 말은 내 말일세.

승부 어관한테는 내가 따로 허락을 구하겠네.”

하고는 그 길로 부리나케 승부 관사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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