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27
그날 밤,
비담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새면 드디어 보위에 올라 임금이 될 것을 생각하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일각이 여삼추로다. 어찌하여 시간이 이리도 더디게 흐른단 말인가!”
그는 밤새 몸을 뒤척이다가 겨우 먼동이 틀 무렵 군사들을 깨워 남산으로 향했다.
비담에게는 이제 화백의 만장일치라는 형식적인 절차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는 알천이 말한 대로 군사들을 남산 어귀에 세워두고 대신 셋과 사병 2, 30명만을 추려 우지암으로
올라갔는데, 마음이 얼마나 바빴으면 사병과 대신들을 다 팽개치고 제가 제일 먼저 목적지에 당도했다. 가서 보니 알천의 모습이 뵈지 않았다.
“내가 마음이 급해 너무 일찍 올라왔나?”
그는 털옷을 꺼내 관복 위에 겹쳐 입고 모닥불을 놓아 언 손발을 녹이며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한참 만에 사병들의 뒤에서 염종이 구부정한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한 채 허정허정 맥없이
산길을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이제 보니 공도 많이 늙었소이다.”
비담이 웃으며 말을 던지자 염종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창백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죽기 전에 나리께서 보위에 오르시는 것을 기어코 보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입지요.”
늙은 충복의 말에 비담은 매우 감격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상신 약속을 알천과 했으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공은 한평생 일심으로 나를 섬긴 것이 마치 삽량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충절을 떠올리게 하는구려. 이제 죽는 날까지 계림의 영화로움은 모두 공의 것이외다.
날이 차니 어서 이리로 와서 곁불이라도 좀 쬐시오.”
비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염종의 팔을 이끌어 불가로 끌어당겼다.
염종이 웃으며,
“칠십 노인이 영화를 누리면 얼마나 더 누리겠습니까?”
하고서,
“신에게 미돈이 셋 있는데 나리께서 신의 마음을 헤아리신다면
그놈들 앞날에 밥이나 굶지 않도록 보살펴주사이다.”
하고 헤헤거렸다.
알천과의 약속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던 비담은 염종이 자식들을 부탁하자 오히려 기뻤다.
“그런 걱정일랑 마시오.
아들뿐 아니라 딸이며 손자들까지 공의 식솔들은 모두 내가 보살피리다.”
이에 감동한 염종이 불 가에 엎드려 넙죽 절을 다 하였다.
바로 그 시간,
남산 밑에서는 미리 몸을 숨긴 채 기다리던 김유신과 알천의 군사들이 기세를 올리며 반군들을 포위했다. 안심하고 있던 반군들로선 불시에 당한 습격이라 제대로 대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대인은 이미 비담을 따라 우지암으로 올라갔고,
여운조차 천존이 먼저 사로잡아버려서 반군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은 마치 돌팔매에 놀란
벌판의 새떼처럼 어지러웠다.
김유신과 알천의 병부 군사들은 고함을 질러 반군들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항복하는 자는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겠다!”
속수무책이었다.
반군들은 포위를 당한 지 불과 얼마 만에 다투어 무기를 던지고 투항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우지암의 비담이 알 턱이 없었다.
반군을 대강 진압한 알천은 제일 먼저 천존에게 붙잡힌 병부대감 여운부터
데려다가 발 아래 무릎을 꿇렸다.
“이놈! 역모를 알았다면 마땅히 토벌하는 것이 병부대감의 소임이거늘
네 어찌 역적들과 한패가 되어 놀아났더란 말이냐?
너의 아비가 죄를 지었으면 너 또한 죄인이다!
죄인에게 죄를 묻지 않고 공을 세워 갚을 기회를 주었더니
끝내 하는 짓이 패역과 배신이더냐?”
여운은 눈물을 뿌리며 잘못을 빌었지만 이미 뒤늦은 후회였다.
알천은 여운의 군사들을 천존의 휘하에 편입시켜 병부의 군령 체계를 일원화하고
이들로 하여금 역모에 가담한 무리의 집을 돌며 처자와 구족(九族)을 잡아들이도록 명령했다.
그런 다음 제일 마지막으로 편장 수승에게 1천 군사를 주어 우지암으로 올려보내니
비담을 비롯한 반군 대신들이 사병 30여 명과 더불어 굴비처럼 오라에 묶여 내려왔다.
난리가 평정된 뒤 알천은 시급히 중신들을 소집해 조정의 의견을 구했다.
찬학(簒虐)을 꾀한 도당들을 참수하자는 데는 아무도 이견이 없었으나
문제는 후대의 보위를 누가 잇느냐는 거였다.
“먼저 신왕을 세우고 왕명을 받아 역적을 처단하는 것이 적법한 절차이올시다.
죄인의 죄가 막중할수록 그 처리 또한 칼날 같은 법리와 엄정한 기율 위에서 한 치의 그릇됨이 없이
이뤄져야 나라의 법무(法務)가 바로 설 것입니다.”
나이 많은 대신들이 이구동성 입을 모았다.
그리하여 논의는 자연스럽게 후왕을 결정하는 문제로 넘어갔다.
사정이 사정인지라 화백이 대궐에서 열린 셈이었다.
그러자 이찬 이상의 대신들은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대부분 알천을 추대했다.
“만조를 통틀어 알천공만한 인물이 없소.
알천공이 아니면 누가 이 어지러운 난국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겠소?”
상대등에서 물러났던 각간 사진이 중신들의 뜻을 대표해 알천을 강력히 천거했다.
이찬 대신들은 아무도 반대하는 이가 없었지만 오직 한 사람, 당자인 알천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당치 않소. 나는 임금의 재목도 아니지만 자격도 없는 사람이오.”
“지금 계림에서 재목과 자격을 논하건대 공을 앞설 사람이 또 누가 있소?
출장입상(出將入相)의 탁월한 이력은 그만두고 이번에 비담의 난을 진압한 한 가지만 가지고도
공의 자격은 충분하외다.”
품주대신 수품의 말이 끝나자 의례를 맡은 예부령 금강도 알천이 지증 대왕의 4대손임을 들어,
“진골의 서열로도 공이 적임자입니다.”
하였고, 이찬 대신의 말석에 앉아 있던 김춘추까지,
“화백의 의견이 만장일치로 모아졌으니 병부령께서는 어서 예를 갖추고 보위에 오르십시오.”
하고 소리를 높여 권유했다.
그럼에도 알천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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