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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장 안시성 28

오늘의 쉼터 2014. 11. 9. 15:44

제27장 안시성 28

 

 

 

“국법에 보위는 엄연히 성골로서 잇게 마련이오.

적법한 절차와 엄정한 법강을 말하는 대신들이 진골인 나를 임금으로 추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외다.”

“성골이 모두 동이 나서 없는 것을 어찌한단 말씀이오?

그렇다고 역적의 수괴 비담의 오라를 풀어 임금으로 세울 수는 없지 않소?”

노신 사진이 따지고 들자 알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승만 공주께서 아직 건재하십니다.”

알천의 말에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또 여주란 말씀이오?”

사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여주께서 정사를 그르친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알천이 반문했다.

“그동안 여주를 비난했던 자들은 비담과 같은 불충한 무리이거나 나라 밖의 간적(奸賊)들입니다.

그들은 공연히 빈계지신을 들먹이고 여주를 음해하여 자신들이 노리는 바를 취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우리마저 속아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건복(진평왕의 연호) 연간의 시속은 지금보다 훨씬 나빴지만 아무도 이를 남녀의 구분으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성조황고께서는 지난 15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정사를 살피고,

장병들을 키우며, 가야인과 신라인은 물론 부귀빈천의 간격을 좁히려 애쓰셨습니다.

지금 나라가 어려운 것은 나라 밖의 간적들이 그 어느 때보다 극렬히 날뛰기 때문이지

여주의 정사가 그릇된 바는 없었습니다.

당주가 여주를 빈정대고 적장들이 여주를 모욕할 수는 있으나 우리 스스로 여주를 업신여긴다면

이는 우리의 근본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간적들의 꾀임에 속아넘어가는 우를 범할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도 그른 데가 없는 알천의 지적이었다.

대신들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고 입을 다물었다. 알천이 다시 끊어진 말허리를 이었다.

“성골의 맥이 끊어져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 사정을 전들 어찌 모르겠습니까?

비단 보위뿐 아닙니다.

대신을 뽑고 장수와 관리를 선발하는 데도 사람의 능력보다는 가문과 출신을 따지는

계림의 골품 제도가 지금처럼 구적이 횡행하는 어지러운 세태에는 여간 불리하지 않습니다.

시급히 국법을 손질하고 관제를 뜯어고쳐 진골 가운데서도 임금이 나올 수 있어야 하고,

범골이라도 재주가 있으면 벼슬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새 임금이 즉위한 뒤 적법한 절차에 따라 행하실 일입니다.

법이 먼저 정해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따르게 하는 것이 법강의 기본입니다.

제가 보위에 올라 국법을 마음대로 뜯어고친다면

그렇게 만든 법으로 어떻게 만인을 복종시킬 수 있으며,

법 위에 군림하는 제왕을 어찌 떳떳한 군주라 할 수 있으리까?

저를 추대한 대신들의 뜻은 고마우나 승만 공주를 제쳐두고 제가 임금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담의 난을 평정한 공도 사라질 뿐 아니라 비담과 제가 다른 점조차도

입증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국기가 흔들리고 법강이 무너지면 계림이 의지할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런 나라를 누가 과연 목숨 바쳐 지키려고 하겠습니까?”

낮술을 마신 사람처럼 안색이 벌개서 시종 눈 둘 곳을 몰라하던 노신 사진이

가까스로 정색을 하며 말했다.

“호된 질책일세. 우리가 너무 생각이 짧았으니 용서하시오.”

“과연 알천공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워본 적이 없었소그려!”

잠시 알천을 의심했던 축건백이 수품도 난처할 때마다 하던 습관대로 미간의 흰 점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헛웃음을 쳤다.

“그러나 승만 공주는 본래 정사에 뜻이 없는 분입니다.

과연 세상에 나오려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춘추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알천이 대답했다.

“공주께서는 비록 정사에 뜻은 없었지만 성품이 맑고 인품이 고아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탁월하신 분이오.

게다가 돌아가신 전하와는 우애가 깊어 동복 자매처럼 지내오셨으니

추측컨대 부음을 전하고 대신들의 한결같은 뜻을 아뢰면 규방에서 나와 기꺼이 다음 세대를

이끌어주시리라 믿소.”

의논을 마친 대신들은 알천의 뜻을 좇아 승만 공주가 기거하는 사저로 갔다.

갈문왕 국반(國飯)의 외동딸인 승만은 용모가 아름답고 키가 7척이며 손이 무릎까지 드리운

기인이었는데, 그 아버지 국반이 일생 동안 천하를 주유하며 수백 권의 진귀한 책들을 집으로

가져와 탐독하는 바람에 어려서부터 학문과 서책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구러 승만이 나이가 차서 시집갈 때가 다가오자 여러 곳에서 매작이 들어오고 심지어

사촌간인 백반의 두 아들까지도 승만의 미색을 탐내어 청혼하였으나

승만이 어머니 월명(朴月明) 부인을 보고 하소연하듯 말하기를,

“저는 한 남자의 지어미로 사는 데 별관심이 없고 오로지 미지의 학문을 탐구하고

새로운 글을 읽는 데서만 재미를 느낍니다.

 어떤 남자가 그토록 오래 나를 기쁘고 즐겁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만나본 남자들이란 죄 무식하거나, 나약하거나, 남자라고 거들먹거리기나 할 뿐이라

두세 번 만나서 시시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남자들에게 시집을 가서 어찌 한평생을 살겠습니까?

시집을 안 가도 아쉬울 것이 없으니 저는 그저 책이나 읽고 글이나 보면서 아버지처럼

평생을 고아하게 살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하였다. 월명부인이 처음에는,

“네가 아직 짝을 만나지 못해 그렇다.

이 다음에 하늘이 내린 짝을 만나면 마음이 달라질 테니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해보자.”

하고 혼사를 뒤로 미루었는데,

그 뒤로 하늘이 내린 짝도 나타나지 않고 다시 얘기할 때도 좀처럼 오지 않았다.

월명부인은 하나뿐인 딸이 배필도 없이 늙어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오랫동안

속앓이를 했지만 아버지인 국반은 일찌감치 딸의 의사를 존중하여,

“그렇게 생겼으면 그렇게 사는 게지. 승만이 현명한 게야.

세속 잡사를 벗어나야 행복한 사람들이 더러 있거든.”

하고 오히려 딸 편을 들었다.

승만의 이런 꿈이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아 쉰이 넘도록 혼자 살았는데,

그가 혼자 살면서 공부한 것과 읽은 책의 양이 가히 엄청나서 글깨나 읽은 계림의 학자들간에는

이미 전조의 백결선생(百結先生)이나 당대 최고의 석학 담날(薛談捺:원효의 아버지)에 비유할 만큼

명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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