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24
이때 천존은 아직 비담의 진중에 있었다.
그는 알천에게 명활성의 기밀을 알린 뒤 비담에게 신복(臣服)하는 체 몸을 엎드리고 있었다.
물론 적당한 때를 틈타 비담과 염종을 주살할 생각이었지만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인 비담은
잠을 잘 때도 병장기를 든 사병들로 하여금 장막을 치고 지냈으므로 좀체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내가 여러 차례 눈여겨보았는데 아무래도 장군은 힘껏 싸우지 않는 것 같소.
혹시 저쪽에 미련이 있는 게 아니오?”
비담은 싸움이 벌어지고 났을 때마다 천존에게 그런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그대의 무예라면 김유신이나 알천과도 능히 견줄 만한데 어쩐 일로 싸우는 시늉만 하고
졸개 하나도 베지 못하오?”
그럴 때마다 천존은 필탄에게 베인 어깨의 상처를 핑계삼아 위기를 벗어나곤 했다.
월성 군사들에게 대패한 그날 밤에 천존은 막사로 비담을 찾아갔다.
“양측이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하며 연일 아까운 군사들만 축낸다면
어차피 백제와 고구려만 이득을 볼 뿐입니다.
지금이라도 사신을 보내 싸우기를 중단하고 화평을 도모하십시오, 나리.”
천존의 말에 비담은 벌컥 역정부터 냈다.
“치고 박고 싸운 지 이미 여러 날이다.
누구와 무슨 수로 화평을 도모한단 말인가?
말 같지도 않은 얘길랑 당장 집어치워라!”
“그렇게 화만 내실 일이 아니올시다.”
천존은 차분하게 준비해간 말을 털어놓았다.
“일이 이처럼 심하게 틀어진 것은 김유신이 멋모르고 나타났기 때문이지 알천공의 뜻은 아닙니다.
일전에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분명히 여주가 돌아가신 것을 반기듯이 말했습니다.
백제가 미친 짐승처럼 날뛰고 고구려와 당이 우리를 상대조차 하지 않는 것은
모두 나라의 근본인 사직이 천리(天理)를 역행하기 때문인데,
임금의 총애를 받은 몸으로 직접 앞장서서 역리를 바로잡지는 못해도 거사를 일으킨 사람을
크게 나무랄 마음은 없다는 것이 알천공의 뜻이었습니다.”
천존이 잠깐 말허리를 끊고 비담의 기색을 살폈다.
그만두라고 소리치던 비담은 고개를 외로 꼰 채 반응이 없었고,
염종과 대인을 비롯한 반군 장수들은 귀를 쫑긋이 세우고 천존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눈치였다.
천존이 끊어진 말허리를 이었다.
“어찌 알천공만 그럴 것이며, 또한 그런 사람이 조정에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게다가 수일간 서로 피를 흘리며 교전한 대가라곤 애써 기른 수천 명의 군사를 죽인 일밖에 없습니다.
이 사정 또한 양측이 똑같습니다. 하물며 이대로 가다간 싸움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시일이 흐르면 흐를수록 불리한 쪽은 나리십니다.
이제 저쪽에는 명절을 쇤 병부 군사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고,
외주 군주들 또한 여주가 총애하던 자들이라 저쪽 편을 들 공산이 큽니다.
만일 이럴 때 알천공을 만나 서로 원만한 해결책을 강구한다면 양측에서
다 같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어떤 해결책을 염두에 두고 그같은 말을 하는가?”
그렇게 물은 사람은 염종이었다. 천존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우지암에서 양측 대신이 동수(同數)로 참석하는 화백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승복하는 것입니다.”
비담은 그제야 관심을 보이며 비딱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화백은 본시 만장일치가 국법일세.
양측이 동수로 참석하면 만장일치가 될 턱이 있는가?”
“그러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드네.”
“생각해보십시오.
저쪽에서 만일 나리의 즉위에 반대한다면 내세울 사람은 승만 공주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승만 공주는 여자이므로 화백에 참가할 이찬 이상의 대신들은 이를 탐탁찮게 여길 것이 뻔합니다. 화백에서 만장일치를 얻지 못하면 차수를 바꿔 여러 날에 걸쳐 논의를 할 것인데,
막중한 보위를 어찌 한가롭게 오랫동안 비워둘 수 있겠나이까?
결국에는 나리께 득이 되지 손해날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시일이 흐를수록 나리가 사는 길이지만 이곳에서 버티는 것은 날짜가 갈수록 나리께서
죽는 길이올시다.”
“조리가 있는 말일세.”
염종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싸움에 지친 노장 대인도 반색을 하며,
“동수 합의만 본다면 그편이 낫지.”
하고 염종을 거들었다.
천존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비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알천공도 어쩌면 나리 편을 들지 모르므로 예상보다 일이 쉽게 끝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면 그런 논의를 누가 한단 말인가?”
비담이 물었다.
“마땅한 사람이 없다면 제가 가겠습니다.”
천존의 대답을 들은 비담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염종이 권했다.
“그렇게 하시지요, 나리.”
“밑져야 본전이올시다.”
대인도 부추겼다.
이에 천존은 비담의 허락을 얻어 월성을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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